인간 실격

여성,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아유, 스타킹 또 나갔어!”

 “뭐하다 그랬는데?”

 “몰라. 또 어딘가에 긁혔나 보지.”

 “에이그, 여자가 칠칠맞기는.”

 “야, 그럴 수도 있지. 거기서 여자가 왜 나오냐? 그럼 여자가 스타킹 찢어먹지 남자가 찢어먹니?”

 그래. 굳이 거기서 여자가 나올 필요는 없다. 

 여자니까 몸가짐이 단정해야지, 이런 건 후져도 너어무 후진, 이를 테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죽어라고 가족들을 설득해 이제 막 결혼에 골인하려는 찰나 “걔, 니 여동생이다.”와 같은 대사를 듣는 것처럼 김빠지는 일인 것이다. 21세기도 꾸역꾸역, 지루하고 무던하게 흘러가고 있고 세상은 이를 테면 아무 일도 없고, (아니 사실은 일이 너무 많아 어딘가에 빼곡하게 적어놓지 않는 이상 일일이 기억해줄 수가 없고) 또 어딘가에서는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다는데

 

 미지는 오늘 또 스타킹이 나갔고 지원이는 미지의 그 칠칠맞음에 대해 십구세기식 타박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함께 읽어볼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입니다. 많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 한권이라서 단편을 읽는다는 취지에 맞게 첫 번째 수기까지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빌려서 더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앞부분이라고는 해도 충분히 완결적이기는 합니다만.”

 

 인간 실격. 제목 참 도발적이다. 실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짤막하고도 단호한. 뭔가 더 매달려보아도 더욱 구차해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짐짓 더 졸아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대체가 ‘자격’이라는 걸 정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딜 기준으로 선을 긋고 선 밖에 있는 자들을 자격미달로 규정한단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남자의 자격이니 인간의 조건이니 하는 예능프로 제목만큼 오만한 게 또 있을까.

 

 “뭔가 음침해. 그래서 기분 나빠.” 소설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리상쌤의 공통질문에 미지가 말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니?” 혜민이는 오늘도 팔짱을 낀 채로 반대질을 시작한다.

 “뭐가 그럴 수가 있냐?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딨는데? 순 변태 같잖아!” 수정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열을 올린다.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예민한 거 아닐까?”

 “예민? 예민하면 다 이래?”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음...이 사람은 뭐랄까, 초식동물 같다고나 할까?”

 “초식동물? 초식동물이 예민해?”

 “그럼! 걔네들 완전 예민해!”

 “맹수나 이런 애들이 감각도, 운동능력도 더 발달한 거 아니야?”

 “아니. 초식동물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거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오오, 뭔가 알듯 말듯 그럴듯한 얘기다! 난 이래서 단비 좋아!” 미지가 밝게 웃으며 내 오른쪽 팔에 매어 달렸다. 기분이 썩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평생의 연기

 

 “그래도 그렇지. 평생을 연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진심은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단 말야?”

 “뭐 소설이니까 뻥이 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심하잖아. 엄청 웃기고 재밌어서 인기도 많은 애가 사실은 괴로운데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니.”

 

 실제 나와, 남들에게 보이는 내가 달라야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자신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덤벙대고 주구장창 엉뚱한 듯 하지만 그건 소설 속 요조처럼, 캐릭터일 뿐. 사실 나는 어둡고 조용하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불도 켜지 않고 있을 때가 있다.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있으면 차분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이럴 때 엄마가 방문을 열면 꼭 불을 재빨리 켜며 이 어둔 곳에서 잠도 안자면서 뭘 하냐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면 안되나?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반드시 불을 켜 놓아야해? 그 시간에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해? 나는 그냥 어둠을 즐기고 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엄마가 길이길이 일장 연설을 하실 것 같아 말하기를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어두운 게 좋다.

 

 조용한 것도 그렇다. 사실 나는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듣지도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묵언수행. 이런 거 정말정말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조용함이 이어지면 그 침묵의 시간 동안에 온갖 상상들이 생겨나 버리고 그것들은, 대개 나쁜 쪽이었다.

 말이 없으면서도 사람 대접 받으려면 지원이처럼 높은 콧대와 늘씬한 기럭지, 안아주고 싶은 여린 몸매 정도는 가진 여자라야 한다. 나처럼 투박한 주먹코에 앉은키 덕분에 더불어 커진 키와 그에 못지않은 골격을 가진 여자는 말이라도 우습게 해줘야 이 험한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오버페이스지만 그렇다고 너무 유난을 떨어도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덤벙’과 ‘엉뚱’은 ‘가끔’이라는 단어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걸 내 몸은 이미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 판의 연기가 끝나고 나면 마치 내 성격이 원래 그랬나 하고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나 자신마저 속아 넘어 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의 막이 내리고 혼자가 되면, 늘 10년은 묵은 듯한 피로가 코와 입으로 또 귀와 눈으로, 더불어 몸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기분이 드는 까닭에, 깊은 숨을 한 번 몰아 쉰 뒤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나는 조용한 인간이었지. 어둠이 더 편안했었지 하고.

 

 요조가 너무 심하다구? 아니, 그런 사람은 실제 있어. 나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너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연기를 하잖아? 앞에서는 살살거리고 돌아서서는 뒷담을 일삼는 게 사람이란 걸 알아. 말도 안되는 역겨운 짓을 해놓고서는 자식 앞에 서기 민망하니까 처세니 사회생활이니 하며 변명하는 어른들은 너무 많이 봤어. 변태? 도대체 어디까지가 병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 건데? 99도까지는 끓는 물이 아니다가 100도가 되면 끓는 물인 것처럼 기준을 정하고 나누면 그만인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단비야? 단비야?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아! 아……, 오늘 저녁에 등갈비가 나온다고 해서 몇 개나 집어먹을까 생각 중이었어.”

 “아, 정말 너는! 못 말려어.”

 “어? 근데 리상쌤 어디 가셨어?”

 “수업 끝났어.

 

 

 “네. 벌써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군요. 이렇게 연기로만 점철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진짜 존재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는 일단 접어둡시다. 다른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육교나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어린이의 시각 같았어요. 동심이란 게 살아있다면 이렇게 대답했겠죠.”

 “여러분은 동심이 없는 거죠?”

 “뭐 어찌됐던 이젠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럼 그 동심이란 건 언제 없어졌나요?

 

 

쓸모가 있다

 

인간 실격.

 

실용적.

 

실용적이 나쁜 말이야?

 

스타킹이야 말로 가장 비실용적인 제품.

 

다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그것도 은밀하게. 도대체가 왜 그래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물건을 학생들한테 신게 하는 이유가 뭔가.

 

모든 멋이란 쓸모없음에서 나온단 말이죠.

 

넥타이, 자기 목을 조르는 기괴한 장식품

 

이런 것을 남자들한테 매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를 테면 머리스타일 말이죠. 남자들의 짧은 머리, 불황과 관련이 있다. 사회가 능력있는 남성성을 강조한 결과. 지고

지순한 여성성을 강조한 결과 긴 생머리가 있는 것처럼.

 

짧은 머리.

힐끗힐끗 쳐다보며 킥킥대는 남자애들. 짜증나고 열받는다.

 

한편으론 무섭다.

 

 

 “나처럼 그냥 신지 마. 그럼 되잖아.”

 “그럴까봐. 근데 넌 오늘도 체육복 입고 온 거야?”

 “당연하지.”

 “교문에서 안 걸렸어? 집중단속 한다고 했잖아.”

 “오늘은 걸렸어. 젠장. 그래서 아까 학생부실 내려갔다 왔잖아.”

 “키킥, 젠장이래. 어쩌다 그랬는데?”

 “원래 그 시간엔 아무도 안 지키는데 오늘따라 체육이 떡 하니 있더라구. 체육복 걷어올린 거 딱 걸렸지.”

 “아무튼 너도 참 대단하다. 매일 같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그리구 치마 입기 싫으면 교복바지 하나 사면 되잖아?”

 “엄마가 안 사준단 말이야.”

 “어머니도 참 대단하시고 말야.”

 내가 매일같이 하는 그 대단하다는 일은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다. 치마가 입기 싫다. 단지 그 뿐이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못 입겠다. 그래야 정확하다. 도대체 왜 내 다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보여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려 하는 대신, 혹은 이해하는 척만 하는 대신 더 쉽고 편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열여덟의 여학생에겐 흔하디 흔한 일이지 않나?

 

 체육복 바지를 입고 그 위에 교복 치마를 입는다. 슈퍼맨이 그랬지. 바지를 입고 팬티를 입는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을 소화한 그는 선구자다. 나도 이를 테면 그런 거다. 선구자. 모두가 다 다리를 드러내놓고 치마를 입을 때 나는 그렇지 않는다. 슈퍼맨이 그랬던 것처럼, 훗날 누군가가 나 정단비의 슈퍼함에 대해서도 영화를 만들어서 기억해주지 않을까?

 맵고 짜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교복치마를 입고 집을 나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뭔가 잊은 듯 아차차 하며 계단으로 급히 올라가 1.5층 쯤에 멈춰서는 가방에 구겨넣은 체육복 바지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뒤도 안돌아보고 직진하면 된다. 내 슈퍼한 패션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멀한 녀석들은 버스 손잡이의 동그라미 사이로 눈빛을 교환하며 킥킥대기 바쁘지만 니네들의 개그 소재가 될 지언정 니네들한테 내 다리를 보여줄 순 없단 말이다. 이 응큼한 녀석들아.

 만원버스의 숨막힘도 일주일만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남학생들의 비웃음 따위 못 견딜 게 아니다. 귀를 쾅쾅 울리는 Nirvana의 스멜을 맡다 보면 밀려밀려 내릴 때가 되곤 하는 것이다.

 교문에 누가 지키고 섰다 싶으면 변신을 해야한다. 공중전화박스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스마트한 시대는 도무지 그런 작은 공간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단 말이지. 명색이 정문이랍시고 만들어놓은 커다란 돌기둥이 내내 이어져온 지루한 담과 만나는 곳에 작은 빈 공간이 있다. 나만의 피팅룸. 그곳에 들어가 입고 온 체육복 바지를 발목부터 두껍게 세 번쯤 접고 그 다음엔 쭈욱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다. 그리고 나서 함께 딸려 올라온 치맛단을 톡톡 쓸어내리듯 쳐주면 얌전히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되는 것이다. 허벅지 안쪽을 도톰하게 쓸리는 체육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팔자걸음을 걸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문을 지나는 그 시간만이고 건물에 들어서면 다시 손을 집어넣어 말아 올라간 체육복 바지를 내리기만 하면 되니 또한 얼마나 간단한가. 교실에 들어오면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멤버들은 또 있기 마련이니 자연스레 그들에 섞여 치마를 벗으면 내 슈퍼함은 이내 일상 속으로 사라진다.

 가끔 엘베에서 만나는 아랫집 여드름은 매일같이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나를 어지간한 덜렁이쯤으로 생각하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힐끔거리지만 아니, 나는 이렇게나 치밀한 년이다.

 

 그렇게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 지독한 연극 무대를 매일 올라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 때문이다.

 

 대학 카톨릭 모임에서 만난 엄마와 아빠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아빠는 그나마 가부장제의 풍파 속에서도 남자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남아있는 사람인데, 엄마는 외할머니의 고지식함을 이어받고 친할머니의 고루함을 전수받아 참 고루고루 보수적이시다.

 이런 엄마의 바람은 하나뿐인 딸이 예쁜 여성으로 자라나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받고 사는 거란다, 내 참. 외모도 그 정도면, 성적도 그 정도면, 성격 또한 그 정도면 모든 것이 적당히 기준 이상인 오빠가 사춘기랄 것도 없이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생이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나도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지. 오빠가 그런다고 해서 나도 꼭 그런다는, 그래야 한다는 것은 폭력이잖아.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해. 나 같으면 그냥 입겠어. 전에 입은 거 보니까 예쁘기만 하던데 뭘.”

 나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엄마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예쁜 핑크색 주름 치마를 사고 그 자리에서 입고 나왔다. 하지만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울상이 되고 말았다. 엄마한테 사정하다시피 매달리고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입고서야 내 발로 백화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기만 벌써 다섯 번째. 내 옷장에는 핏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길이와 두께도 다른 치마가 다섯 벌이나 있지만 그걸 입고 외출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쯤되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치마를 입지 않는 내 고집이 대단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치마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의 의지가 대단한지 길 가는 사람 잡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 되어 솟을 기세다.

 

 한창 반항기가 돋던 중학교 때에는 바지를 입었다. 지금은 짧은 단발이지만 그 때는 머리가 조금 더 짧았다. 멋부리는 남자애들처럼 짧은 머리에 다른 여자애들보다 키는 더 큰 데다가 바지까지 입고 있으니 처음보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남자취급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인기도 좋았다. 도심에서 조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던 여중이었는데, 같은 학년 애들은 물론이고 예쁜 언니들도 종종 나를 찾아와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가곤 했다. 나는 나대로 그런 언니들이 싫지 않아서, 예쁜 언니를 눈 앞에 앉혀놓고 코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예쁘다는 것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순간순간 황홀한 그 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에 반대했던 엄마

 

 딸, 여성스러움을 강조.

 

 인간으로써 쓸모가 있는 인간, 그렇지 못한 인간의 실격

 여성으로써 쓸모가 있는 여성. 그렇지 못한 여성의 실격

 

 

 남자 고등학생이 싫은 것

 

 긴 머리가 싫은 것

 

 치마에 스타킹이 싫은 것

 

 유치원 때 학예회날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하얀 투피스에 살색 스타킹을 신었던 날

 

 옆집 오빠가 나를 데려간 것

 

 나를 여자로써 쳐다보는 것이 싫다.

 

 오히려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게 된 것.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조심하지 못한 나를 나무란 엄마

 

 

 단풍 구경 나가자.

 으이그 또 넘어졌지?

 아무튼 꽈당 염미지 알아줘야돼.

 좀 조심좀 해라. 뭐냐. 스타킹 다 나갔네.

 미지야?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

 넘어졌을 때, 넘어져서 아플 때, 넘어져서 아파서 울상이 되었을 때 해줄 말은,

 많이 아프지다. 조심했어야지가 아니라.

 

 

무릇 영웅이란 이 정도의 이중생활쯤은 감당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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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냐 돈이냐

"꿈"이냐, 돈이냐

 

 

4월 단편소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야, 미지야. 너 그거 봤어?"

  "뭐?"

  "케이블에서 하는 드라마 말야. 고등학생이 대기업 본부장인가로 나오는."

  "아. 그거 알아. 근데 아직 보진 못했는데, 벌써 시작했어?"

  "어. 이번 주말에 시작했는데, 대박. 꼭 봐? 보고 이야기 좀 하자 나랑."

  "그 드라마가 왜?"

  "아니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재밌고, 이제 첫 화긴 한데 남주 매력 터지고. 딱 내 스타일이거든. 이 드라마의 향후 전개에 대해서 예비 작가님한테 이야기를 꼭 듣고 싶어서 말야."

  "정말 요샌 케이블이 대세라니깐. 보기만 하면 열불 터지는 막장 드라마 없지, 뻔하디 뻔한 재벌 드라마도 없지. 소재도 신선하고. 배우들도 신선하고."

  "그건 그래. 근데 나는 뻔한 드라마도 보다보면 재밌든데, 존잘생긴 애들도 많구."

  "아니야. 뻔한 드라마는 그 자체로 죄악이야. 특히 배우 바뀌고 회사만 바뀌는 재벌 드라마는 꼭 사라져야할 존재라구. 나는 작가되면 그런 건 절대 안쓸거야."

  "그래. 유난히 재벌이 많긴 해. 근데 왜 계속 재벌이야?"

  "단비야, 그건 말이야. 방송사들도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작단가를 낮출려고 외주제작 드라마들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외주 제작사들은 개네들 나름대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간접광고에 목을 매게 되고 광고비를 많이 받으려면 아무래도 대기업이 들어오는 편이 수월하니까..."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봐."

  "뭐 돈이 되니까 그렇지." 

  "그래, 돈. 그게 제일 중요하지. 그렇긴 해."

  "근데 너 오늘 보충 들을 거야? 왜 계속 빠져?"

  "아, 그거. 오늘은 들을 거야. 걱정 마." 

 

 

화성에서 온 단비

 

  돈이 제일 중요하다. 이 냉혹한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화성인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더운 날엔 짜먹는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먹으면서 나는 원래 더위를 잘 견디는 체질이었을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곰곰히 따져 보려면, 결국 돈이 있어야 한다.

 

  엠버. 내 별명이다. 대형 기획사 소속 걸그룹에서 보이시한 역할을 맡고 있는 멤버의 이름이다. 그래 내가 남자애 같기는 한데 왜 걔랑 비교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걔는 나랑은 다르게 눈은 크고 얼굴은 작고 피부도 좋다. 펑퍼짐한 옷을 주로 입는 까닭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몸매도 좋을 거다. 내가 걔랑 비슷한 거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큰 키, 그리고 짧은 커트 머리 밖에는 없을 텐데. 그래도 나는 그 별명이 썩 싫진 않다. 내 주제에 아이돌이라니.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한때는 내가 정말 남자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초등학교 내내 팔씨름이든 닭싸움이든 힘으로 하는 거는 져본 적이 없고 여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보다 더 잘 달리는 아이는 본 적이 없다. 피구를 해도 발야구를 해도 늘 나에겐 '넘사벽'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서 모두 내가 있는 편에 오려고 하는 게 기분 좋았다. 샤워를 하는 욕실에 전신거울만 없었다면 나는 정말 내가 남자구나 하고 착각하며 살았을 지 모른다. 그랬던 게 고등학교에 와서는 조금 바뀌었다.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는 체육시간에는 -대학에서 그것을 전공했다던 선생님 덕에- 발레를 한다. 체육시간에는 자고로 한바탕 땀나게 뛰어야 성이 풀리는데 보기만 해도 민망한 타이즈 바지를 입고 몸을 배배 꼬고 있으려니 몸만 꼬이는 게 아니라 심사도 꼬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1년에 하루 체육대회가 있다는 것은, 그것도 1학기인 5월에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하루 반짝 하면 일년 내내 무시받지 않고 산다. 이날 만큼은 아무도 날 막을 수 없겠지, 벼르고 별려 왔건만 체육대회 예선 종목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줄다리기, 단체 줄넘기 같은 고전적인 반대항 종목은 그런다 쳐도 '안전바 밀어밀어', '릴레이 신발 던지기', '널빤지 공 튀기기' 같은 중딩스럽고 아기자기한 게임들 속에서는 도무지 나의 탁월한 신체적 역량을 마음껏 뽐낼 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건강 에어로빅은 또 뭐냐. 우리가 무슨 주민센터 아줌마도 아니고. 우리 앞에서는 우아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한가득 숨겨놓은 뱃살을 어찌할 줄 몰라 고민하는 발레 전공 체육선생님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자 단비는 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면 신경써야 할 종목은 딱 두 개에 불과했다. 이어달리기와 개인 줄넘기. 결승전이라곤 하지만 워낙 실력차들이 있었던 탓에 한 바퀴 가까이 차이가 나고 말았던 이어달리기도 시시했고, 30분 가까이 줄을 넘다 비로소 시작된 이단뛰기도 150개를 넘어가자 슬슬 걱정은 되었지만 결국엔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이기고 만 개인 줄넘기에서는 '저거 참 독하네' 하는 뒷소리만 많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던 1학년의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자 단비는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았다. 몰랐으면 좋았을 인생의 비밀을 알아채 버린 어린아이처럼 말수가 줄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건 참 기가 막힌 일이다.

 

  그때 눈에 띈 게 미지였다. 잡티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나는 명랑해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눈빛, 거기에다가 친절한 미소와 덤벙거림까지. 한 눈에 봐도 인기있을 것 같은 저 아이와 함께라면 남은 고교 생활은 순탄할 것 같았고, 예상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그런 미지가 공부까지 잘하는 건 덤이었다. 그 덕에 바닥을 기던 내 성적도 올해에는 조금씩 밝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라인을 잘 타야 돼, 라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염미지 라인.

 

  "단비야, 니 사진은 다 좋아. 기획 좋고, 구도 좋고. 근데 색감이 살짝 떨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색감? 그게 어떤데?"

  "음... 뭐랄까. 너무 천연색이 많이 섞인 느낌이랄까? 좀 파스텔톤이 섞이면 고급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도 나 카메라 바꿀려고 알바하고 있어. 지금 있는 거는 어지간한 폰카보다 못해서 말야. 카메라 사면 나랑 사진 찍으러 가자."

  "우와! 언제쯤? 꼭 나랑 가기다! 약속했어?"

 

  아, 이 세상 걱정없는 밝은 녀석. 미지는 드라마 작가가 꿈이라는데 정말 십년쯤 지나고 나면 TV 화면 속에서 '염미지 극본' 이라는 다섯 글자를 볼 것만 같은 기대감이 들 정도다. 기대감? 모르겠다. 그게 기대감인지. 체육대회 종목을 알기 전에 내가 가졌던 감정이 기대감이라면 종목들을 알고 나서 내가 가졌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미지가 이름난 드라마 작가가 되는 건 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정단비. 너는 도대체 뭐가 될 거냐?

 

 

 

금성에서 온 미지

 

  "당연히 돈보다는 사랑이지."

  그래. 돈보다는 사랑을 택할 낭만도 기미 하나 없는 하얀 피부 정도는 가져야 가능한 거지, 라고 단비는 생각했다. 해도 뜨기 전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샛별처럼 하얗고 조막만한 얼굴을 갖고 있는 미지는 분명 금성인임에 틀림없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금성은 영어로 비너스라니 참 아니꼽게도 어울린다 싶었다. 화성은 영어로 뭐라고 부를까? 파이어스? 아니면 바이러스? 화성인 바이러스? ㅋㅋㅋ

 

  꿈? 그게 나중에 무슨 직업을 가질 거냐고 묻는 거라면 나도 그런 게 하나 있긴 하다.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 그게 내가 꾸는 꿈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타고난 신체능력을 발판삼아 체육선생님이나 할까 했었는데 그것도 담임이랑 상담하고 나서는 물건너 갔다.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사범대의 성적과 어떻게 지방의 사회체육과를 가더라도 날고 기는 애들도 재수 삼수가 기본이라는 임용고시 얘기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대신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만화나 그리면 좋겠다 싶어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근데 이건 또 웬 인생급 태클인지 따지기 좋아하는 혜민이란 녀석이 만화가가 되려면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아야 하며 머리까지 좋아야 한다는 거다. 옆에서 수정이가 맞장구 치지만 않았어도 나도 한 마디 따져 보았을 텐데 그 때 한 마디도 못하고 나서는 꿈을 바꿨다. 그래. 생각해보면 만화는 그림만 있는 게 아니고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거는 금성사는 미지나 잘 하지 나하곤 영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인터넷을 뒤진 끝에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라는 직업을 찾아냈다. 적당히 길고 적당한 영어도 들어가 있어서 있어보이고 좋다. 그래. 그렇게 내 꿈은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로 정해졌다.

 

  화성에서 온 주제에 지구인 흉내라도 내고 살아가려면 참고 버티는 정도는 해야한다. 이번 학기부터는 방과후 학교를 신청해서 한다지? 당연히 미지와 시간표를 맞췄다. 들어봤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수학도 하나 끼고 다른 것도 딱히 나을 건 없지만 진짜 나랑은 완벽하게 반대편에 놓여있는 영어도 하나 꼈다. 남는 칸엔 뭐지? 그나마 들을 만한 국어 차롄가 하고 보는데 뭔 제목이 이리 길어.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인문학? 아니 국어쌤이 왜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거야? 그리고 문학이면 문학이지 인문학은 또 뭐야. 내가 실업계에 온 건 아니니까, 인문계는 다들 인문학이란 걸 배우나? 그렇게 시작한 수업은 소설 읽는 수업이었다. 한 시간은 소설을 읽고, 한 시간은 수다를 떤다. 나머지 한 시간에 발표를 하거나 글을 쓴다. 나의 경우에는 마지막 시간엔 대개 잠을 잔다. 아, 이 얼마나 완벽한 조합인가. 소설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잠을 자는 수업이라니.

 

  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잠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딴 생각은 할지언정 엎드려 자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생겼다.

  사진을 찍고 싶다. 이왕이면 컴퓨터 바탕화면 같은 멋진 걸루. 풍경 사진을 찍고 나서 그걸 그림으로 옮겨보는 게 내가 요즘 흥미를 붙이고 있는 일이다. 이게 퍽 재미가 있다. 연습장 한 바닥에 사진 한 장을 정밀하게 그리려면 -그림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시간 반 정도가 필요한데 이거 하나 하고 나면 야자 시간이 뚝딱 갔다. 다 그린 그림을 칠판 가운데에다 슬쩍 붙여 놓으면 내일 아침 담임이 발견하기 전까지 많은 애들이 본다. 심지어는 사진으로 찍어 담아가는 애들도 있고, 그렇다. 한번은 지원이네 반에 놀러갔을 때, 칠판에다가 송도 신도시를 그렸었는데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자세히는 못그렸지만 리상쌤이 정말 대단한 재주라고 칭찬도 해줬다. 아, 얼마만에 듣는 선생님의 칭찬인가.

 

  DSLR을 갖고 싶다. 하지만 집엔 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알바를 한다. 편의점 야간 알바. 여자 고등학생이 편의점 야간알바 자리를 따내기는 쉽지 않지만 내 덩치와 보이시한 분위기가 한몫 했다. 덩치가 고맙기는 처음이었다. 다음날 쳐박아뒀던 이력서를 다시 꺼내 읽어보시고 나서야 내가 여자임을 인정한 점장님은 내가 여학생임에도 생각대로 무거운 음료 박스를 잘 나른다며 탄복했고, 내가 여학생임에도 생각보다 밥을 많이 먹는다며 탄식했다.

 

  "소설에서 기린이 뭘 상징하는가를 알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소설이란 그냥 재밌게 읽으면 그만이죠. 재미 있게 읽고 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세요. 없으면 말죠 뭐."

 

  없으면 말라니. 참 무책임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 불러주며 칭찬해준 선생님이니 넘어가지 뭐, 라고 생각했지만 단비는 할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기억이란 게 있던 순간부터 아빠는 늘 누워만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할 때도 응 그래, 학교 다녀왔습니다 할 때도 응 그래. 가끔씩 일어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늘 가슴을 쥐어뜯으며 장판이 꺼질 듯 기침을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중3 때. 참 희한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오히려 살만해졌다는거다. 한부모가정인가 뭔가도 됐고 그래서 주민센터에서 돈도 얼마 나오고 그러니 나랑 동생 학비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했다. 옷은 맘대로 못 사입어도 수업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옷이야 뭐 알바하면 되니까 뭐 걱정거리도 안된다. 아빠는 갔지만 우리는 잘산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쌤쌤.  

  지금이야 그림 그리는 야자도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천국이었다. 알바천국. 뭔가 부모님 몰래 돈이 필요한 애들은 죄다 나한테 상담을 했다. 나는 또 나대로 그런 애들이 반가워서 열과 성의를 다해 안내를 해주곤 했다. 초딩때부터 전단지도 돌리고 신문도 돌리고 했던 경험을 밑천삼아 주유소에 편의점에, 안해본 일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참 많은 일을 해본 건 사실이다. 얼마 전엔 공부도 잘하고 도도한-공부를 잘하면 저절로 도도해지는지 나는 참 알 길이 없긴 하지만-수정이가 알바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하길래 호텔 부페 서빙 알바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소개라니, 나도 같이 하려고 갔다가 과장이란 사람이 너는 안된다며 훼방을 놓는 통에 주차장에 내려가 딱봐도 할아버지같은데 자기는 노총각이라고 주장하는 아저씨와 농담따먹기는 많이 했지. 검은 진에 흰 남방을 입고 오라고 하길래 깔끔하게 차려입고 갔는데 수정이한테는 근사한 베스트를 주고 나한테는 분홍색 어깨띠와 경광봉을 주길래 이거 참 폼이 안난다 싶었지만 뭐 폼이 중요한가. 돈이 중요하지. 끝나고 오는 버스 안에서 수정이한테 물어본 결과 받은 돈은 같았으니 뭐 또 결과적으로는 쌤쌤.

 

  노동의 현장을 꼭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다나 어쨌다나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수정이도 그렇지만 말이 많다는 건 또 금성인들의 특징인가 보다. 미지 이 녀석도 말이 꽤 많다. 늘 붙어다닌 덕이긴 하지만 나조차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대로 지구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렷다.

 

  "알바하면 힘들겠지?" 딱히 나를 보고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내가 대꾸하지 않으면 맥이 탁 끊길 것 같아 "힘들긴 뭘." 하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금성인이 화성인의 마음을 알까 싶었다. 라면값이 왜 이리 비싸 요앞 마트는 다섯개 삼천원 하더만 아니 아줌마 그러면 거기 가서 사시든지요-네네, 청년이 고생이 많네 아니 할아버지 제가 청년으로 보이세요-네네, 어째 결산이 안 맞는 것 같네 돈이 비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딴짓 못하게 cctv까지 달아논 거 다 아는데 무슨 소리세요? - 네? 아, 네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네네 하며 웃어주면 그럭저럭 시간이 가고 그럭저럭 시간이 가면 여차저차 돈이 들어오는 게 알바라는 것을 금성인들이 꼭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돈보다 사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도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기가 쉬웠다.

 

 

나의 산수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분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산수. 시간당 오천백원씩 열시간이면 오만천원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사흘하면 십오만삼천원 그렇게 한달 반을 하면 구십만원이 모이는구나 하는 게 내가 세운 식이었다. 물론 공식을 세운다고 답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다. 온갖 유혹을 견뎌내야 비로소 답을 낼 수 있다. 키스가 푸딩 맛일까 푸딩이 키스 맛일까 같은 알쏭달쏭한 궁금증도 천이백원이 있어야 풀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궁금증은 갖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치즈 넣은 불닭볶음면이 맛있어요 계란 넣은 불낙볶음면이 맛있어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건 그냥 둘다 살쪄요 라고 생각하고 전주비빔밥의 껍질을 뜯으면 된다. 야간 편의점엔 까먹고 싶은 게 정말 많지만 유통기한이 갓 지난 삼각김밥과 달달한 쥬시쿨이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

 

  온갖 유혹을 참고 답을 냈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신이란 게 있다면 이거야말로 신의 영역이 아닐까 하고 단비는 생각했다. 내가 낸 답에 동그라미가 쳐지느냐 마느냐. 카메라는 손안에 잡히는가 싶더니 엄마의 아픈 허리가 도졌다. 병원에 사흘 입원해있던 엄마는 허리에 커다란 압박 붕대를 감고 돌아와서는 두 달동안 마트에 못 나갔다. 에휴 갖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어쩌누 어쩌긴요 엄마가 쉬니 나라도 벌어야지. 편의점엔 애초에 세운 공식보다 한달 반만큼 더 나갔고 카메라는 없었다. 내가 하는 산수란 늘 그런 식이다. 빼기와 나누기는 많은데 더하기와 곱하기는 없다. 운좋게 더하기가 들어서면 다음엔 0이 오고, 더 운좋게 곱하기가 들어서면 다음에는 1이 오고. 그러다가 빼기, 그러다가 나누기.

 

  "열차는 뭐 가장 기본적인 은유지. 한 량의 정원은 180명인데 실은 400명이 타야한다잖아. 당연히 못타는 사람들이 있겠지." 수정이가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못타는 사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못타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리고 문제는 탄 사람들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는 거지. 밀리고 구겨지고 봉변당하고." 혜민이의 말이었다.

  "그럼 편안히 가는 사람은 누구야 도대체? 기관사야?" 미지가 물었다.

  "아니 기관사도 결국엔 승객이야. 코레일 사장 쯤은 되야 편안히 가는 사람이지." 수정이였다.

  "그럼 필요한 건 열차를 늘리는 거네. 배차간격을 좁히든 차량 크기를 늘리든. 그래야 되는 거잖아?"

  "꼭 그 방법만 있는 건 아니지. 이용하는 사람을 줄일 수도 있지."

  쭉 지켜보던 단비가 갑자기 끼어들자 애들은 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단비야.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다른 교통수단으로 나누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모두 열차를 타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야지."

  "아니. 그냥 사람을 줄여버리는 거야. 출근하지 못하게."

  "실직 얘기야?" 미지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뭐 실직일 수도 있고 다른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면 되는 거잖아."

  "다른 거라니?"

  "예를 들면, 음... 주... 죽음이라든지."

  "그건 일반적이지가 않잖아.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다고."

  "아니야!"

  단비가 갑자기 너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교실에 있는 모두가 우리 모둠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리상쌤이 우리 모둠으로 오셨고, 아이들은 더욱 우리를 주목하였다. 

 

  "음... 무슨 일이 있나요?"

  "음.. 그게... 어..."

  "아니에요. 아무 일도. 죄송합니다." 

 

  "열차와 산수 이야기가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꼬리를 잡으려면 소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모둠활동에 집중하세요들!"

  모두를 향해 그렇게 말씀하신 리상쌤은 내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으신다. 두 손을 책상 위로 모은 채 턱을 살짝 괴고 자리에 앉아있는 날 올려다 본다. 많이 조심스러운 눈초리다.

  "음... 무슨 일이죠?"

  단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아빠는 죽고 우리 엄마는 실직해서 내가 대신 열차를 타고 있는 거라고, 세상은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니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렇게 눈 똥그랗게 뜨고 놀랄 일은 아니라고. 니네도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럴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그럴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열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비좁은 열차에 많은 사람이 타는 해결책을 찾고 있었는데 미지가 차량을 늘리는 방안을 이야기했고, 단비는 사람을 줄이는 방안을 이야기했어요."

  이럴 땐 수정이도 참 고맙다. 고마운 금성인.

  "사람을 줄인다는 건 무슨 이야기죠?"

  리상쌤이 또 나를 쳐다본다. 어쩌란 거야. 나에 대해 알고 싶어? 알고 나면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 감당할 수 있어?

  "실직이라든지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이번엔 미지다. 아깐 얄미웠지만 지금은 너무 고맙다. 또 고마운 금성인.

  "실직과 죽음이라... 음..."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조용했다. 그 와중에 단비는 좀 멍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구석에 몰리는 듯한 경험,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이럴 때마다 더 날카로워지는 자신이었다.

  니네들이야 공부 잘하니깐 다들 대학 가겠지만 나는 몰라 내년에 우리집 상황이 어떨지. 사랑? 꿈? 좋지. 근데 정말 중요한 건 돈이야. 돈이 있어야 데이트도 하고 돈이 있어야 결혼도 해. 돈이 있어야 꿈도 꾸는 거야. 나는 가끔 무서워. 이렇게 죽기전까지 알바만 하다 어느 순간 그냥 사라져버릴까봐. 어느 순간.

  "음...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사실 아직 전체적으로 논의는 안했지만 그 얘기는 다음 토의 주제거든요."

  리상쌤은 비밀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쭉 빼며 이야기했다. 덩달아 우리의 목과 눈도 쌤을 닮아갔다.

  "사실 열차라는 걸 만든 사람들의 전략은 그래요. 누구나 다 열차에 뛰어오게 하고 열차를 타야만 하게 만들죠. 180명 정원에 400명을 밀어넣고도 타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길 바라죠. 그러다가 타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아까 단비가 말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거에요. 대량 실업 사태라든지, 기아, 천재지변, 심지어는 전쟁까지."

 

  내가 한 말이 맞단 말이지. 틀린 게 아니라고. 틀린 게 아니다. 틀린 게...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에요. 너무 심각하시네들. 하하하."

  리상쌤은 장난기 자글자글한 얼굴로 또 경박하게 웃었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소설은 뜨거운 여름에서 시작해서 이상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에서 끝나요. 지구의 봄은 따뜻한 계절이죠. 만물이 소생하고 새싹이 움트는. 여러분들은 봄을 좋아하세요?"

 

  봄. 그런 계절이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고 새싹이 움튼다는, 상상만 해도 따뜻하고 졸리운. 근데 그런 계절이 있었나? 잘 모르겠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사이에 끼인 우울한 가을은 기억이 난다. 봄. 봄 같은 계절, 봄 같은 기억.

 

  "쌤이 말씀하신대로 시간의 흐름은 그래.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지나서 봄에서 끝나. 근데 다른 축을 생각해보면 여름으로 서술된 부분은 뭐라그럴까 현실적이랄까? 그냥 그렇고 그런 청소년소설 느낌이잖아. 근데 가을 부분에서 뭔가 좀 환타지스럽더니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갑자기 지하철역에 기린이 와서 앉아있고 그러잖아. 말도 안되는 환상이란 말이지."

  수정이는 오늘도 말이 많다.

  "시간적 배경이랑 소설의 서술이 함께 가고 있다는 말이야? " 미지는 오늘도 궁금증이 많고.

  "그렇지. 그런 셈이지.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 게 있는데 그건 화성이랑 금성 얘기야. 왜 처음 여름 부분 시작할 때 그렇게 말하거든. 화성인들은 좋겠다. 또 겨울 부분 시작할 때는 금성인들은 좋겠다라고 하거든. 화성이랑 금성. 이 부분도 이야기해봐야 돼."

 

  '화성'이라는 말에 깜짝한 단비는 수정이의 말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여름과 현실 그리고 화성. 겨울과 환상 그리고 금성. 수정이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할 순 없지만 마음 속에서는 뭔가가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그건 같은 건데 여름이랑 현실도 그렇고 또 겨울이랑 환상도 그렇고 거기다가 금성도..."

  "단비야,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해줘봐."

  "그러니까 니네들은 금성인이니까 차가운 거고 그러면서도 꿈이나 그런 걸 갖고..."

  "아니 우리가 왜 금성인이야? 그럼 너는 화성인이냐? 하핫"

  혜민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단비는 아무래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화성이랑 현실, 금성이랑 환상이 연결되는 건 맞는데 그게 여름이랑 겨울이랑은 연결되지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야. 화성은 엄청 춥거든. "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화성이 추워? 왜? 화성은 뜨겁잖아. 그래서 화성 아니야?"

  "아니야. 화성은 추워. 오히려 금성이 뜨겁지. 화성이 빨간 건 표면에 철분 성분이 많아 그게 산화되면서 붉은 색을 띠는 것 뿐이야. 쉽게 말하면 녹슨 쇳가루가 날라다녀서 그런 거라구."

  "그래. 그러면 아귀가 맞아. 왜냐면 소설에서 화성인들은 좋겠다고 그랬거든. 지구는 더운 여름이니까, 화성인들은 좋겠다. 화성이 추운 곳이어야 그 말이 맞지. 반대로 겨울엔 추우니까 금성인들은 좋겠다. 금성이 뜨거운 곳이어야 그 말이 맞지. 그러네!"

 

  화성이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갑다고? 오히려 금성이 뜨겁다고? 그럼 나는 뭐지? 나는 화성인인데, 그게 맞는데. 아니 진짜 애들 말이 맞는 거라면 나는 금성인인가? 말이 안되는데...

 

  그 다음엔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늘 하던대로 멍하니 딴 생각을 했을 뿐이고 애들이 주고받는 소리도 리상쌤의 썰렁한 유머도 BGM으로만 남아 인식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알았을까. 내가 금성인이었다니. 이른 저녁에, 새벽에 그렇게도 밝고 찬란하게 빛나던 곳이 내 고향이었다니. 사랑의 비너스. 내가 그곳에서 왔다니.

 

  화요일 아침 단비는 일찌감치 일어나 집을 나왔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살짝 들러 삼천원을 들여 오렌지색 립글로스를 하나 샀다.

 

  "단비야. 너 리상쌤이 잠깐 오라든데? 야 너 근데 입술이 왜 그래? 뭐 발랐어?"

  "어. 음.... 이상해?"

  "아니? 완전 이쁜데! 너무 귀여워. 완전 엠버, 아니야 설리 같애. 설리! 무슨 바람이야? 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아니. 뭐 그냥. 너 따라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봐."

  "빨리 가봐! 리상쌤 놀래겠다. 캬캬컄" 

 

  교무실에 들어서니 리상쌤은 컴터 앞에서 뭔가를 열심치 치고 계셨다.

  "선생님. 부르셨다고..."

  "어. 단비 왔구나. 잠깐만. 어디 뒀더라... 아! 여깄다."

 

  "이건 딴 애들한테는 비밀인데..."

  리상쌤은 특유의 가는 눈을 하고는 주위를 쭉 살폈다.

  "사실은 나도 거기에서 왔어. 이건 선물이야. 고향친구가 주는 선물."

  쌤이 내민 건 시집이었다. 김명인이라고. 그 다음엔 또 기억이 잘 안난다. 뭔가 변했단 이야기가 들렸고 나는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던 것 같다. 교무실을 나와 자리에 돌아와서 시집을 펼쳐보았다. 중간에 책갈피가 꼽혀 있었다. 그 책갈피엔 조잡한 솜씨로 기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기린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말풍선을 하나 달고 있었다.  

 

 

  "지구에 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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