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여성,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아유, 스타킹 또 나갔어!”

 “뭐하다 그랬는데?”

 “몰라. 또 어딘가에 긁혔나 보지.”

 “에이그, 여자가 칠칠맞기는.”

 “야, 그럴 수도 있지. 거기서 여자가 왜 나오냐? 그럼 여자가 스타킹 찢어먹지 남자가 찢어먹니?”

 그래. 굳이 거기서 여자가 나올 필요는 없다. 

 여자니까 몸가짐이 단정해야지, 이런 건 후져도 너어무 후진, 이를 테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죽어라고 가족들을 설득해 이제 막 결혼에 골인하려는 찰나 “걔, 니 여동생이다.”와 같은 대사를 듣는 것처럼 김빠지는 일인 것이다. 21세기도 꾸역꾸역, 지루하고 무던하게 흘러가고 있고 세상은 이를 테면 아무 일도 없고, (아니 사실은 일이 너무 많아 어딘가에 빼곡하게 적어놓지 않는 이상 일일이 기억해줄 수가 없고) 또 어딘가에서는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다는데

 

 미지는 오늘 또 스타킹이 나갔고 지원이는 미지의 그 칠칠맞음에 대해 십구세기식 타박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함께 읽어볼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입니다. 많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 한권이라서 단편을 읽는다는 취지에 맞게 첫 번째 수기까지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빌려서 더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앞부분이라고는 해도 충분히 완결적이기는 합니다만.”

 

 인간 실격. 제목 참 도발적이다. 실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짤막하고도 단호한. 뭔가 더 매달려보아도 더욱 구차해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짐짓 더 졸아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대체가 ‘자격’이라는 걸 정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딜 기준으로 선을 긋고 선 밖에 있는 자들을 자격미달로 규정한단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남자의 자격이니 인간의 조건이니 하는 예능프로 제목만큼 오만한 게 또 있을까.

 

 “뭔가 음침해. 그래서 기분 나빠.” 소설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리상쌤의 공통질문에 미지가 말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니?” 혜민이는 오늘도 팔짱을 낀 채로 반대질을 시작한다.

 “뭐가 그럴 수가 있냐?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딨는데? 순 변태 같잖아!” 수정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열을 올린다.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예민한 거 아닐까?”

 “예민? 예민하면 다 이래?”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음...이 사람은 뭐랄까, 초식동물 같다고나 할까?”

 “초식동물? 초식동물이 예민해?”

 “그럼! 걔네들 완전 예민해!”

 “맹수나 이런 애들이 감각도, 운동능력도 더 발달한 거 아니야?”

 “아니. 초식동물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거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오오, 뭔가 알듯 말듯 그럴듯한 얘기다! 난 이래서 단비 좋아!” 미지가 밝게 웃으며 내 오른쪽 팔에 매어 달렸다. 기분이 썩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평생의 연기

 

 “그래도 그렇지. 평생을 연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진심은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단 말야?”

 “뭐 소설이니까 뻥이 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심하잖아. 엄청 웃기고 재밌어서 인기도 많은 애가 사실은 괴로운데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니.”

 

 실제 나와, 남들에게 보이는 내가 달라야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자신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덤벙대고 주구장창 엉뚱한 듯 하지만 그건 소설 속 요조처럼, 캐릭터일 뿐. 사실 나는 어둡고 조용하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불도 켜지 않고 있을 때가 있다.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있으면 차분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이럴 때 엄마가 방문을 열면 꼭 불을 재빨리 켜며 이 어둔 곳에서 잠도 안자면서 뭘 하냐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면 안되나?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반드시 불을 켜 놓아야해? 그 시간에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해? 나는 그냥 어둠을 즐기고 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엄마가 길이길이 일장 연설을 하실 것 같아 말하기를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어두운 게 좋다.

 

 조용한 것도 그렇다. 사실 나는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듣지도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묵언수행. 이런 거 정말정말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조용함이 이어지면 그 침묵의 시간 동안에 온갖 상상들이 생겨나 버리고 그것들은, 대개 나쁜 쪽이었다.

 말이 없으면서도 사람 대접 받으려면 지원이처럼 높은 콧대와 늘씬한 기럭지, 안아주고 싶은 여린 몸매 정도는 가진 여자라야 한다. 나처럼 투박한 주먹코에 앉은키 덕분에 더불어 커진 키와 그에 못지않은 골격을 가진 여자는 말이라도 우습게 해줘야 이 험한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오버페이스지만 그렇다고 너무 유난을 떨어도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덤벙’과 ‘엉뚱’은 ‘가끔’이라는 단어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걸 내 몸은 이미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 판의 연기가 끝나고 나면 마치 내 성격이 원래 그랬나 하고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나 자신마저 속아 넘어 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의 막이 내리고 혼자가 되면, 늘 10년은 묵은 듯한 피로가 코와 입으로 또 귀와 눈으로, 더불어 몸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기분이 드는 까닭에, 깊은 숨을 한 번 몰아 쉰 뒤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나는 조용한 인간이었지. 어둠이 더 편안했었지 하고.

 

 요조가 너무 심하다구? 아니, 그런 사람은 실제 있어. 나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너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연기를 하잖아? 앞에서는 살살거리고 돌아서서는 뒷담을 일삼는 게 사람이란 걸 알아. 말도 안되는 역겨운 짓을 해놓고서는 자식 앞에 서기 민망하니까 처세니 사회생활이니 하며 변명하는 어른들은 너무 많이 봤어. 변태? 도대체 어디까지가 병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 건데? 99도까지는 끓는 물이 아니다가 100도가 되면 끓는 물인 것처럼 기준을 정하고 나누면 그만인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단비야? 단비야?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아! 아……, 오늘 저녁에 등갈비가 나온다고 해서 몇 개나 집어먹을까 생각 중이었어.”

 “아, 정말 너는! 못 말려어.”

 “어? 근데 리상쌤 어디 가셨어?”

 “수업 끝났어.

 

 

 “네. 벌써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군요. 이렇게 연기로만 점철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진짜 존재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는 일단 접어둡시다. 다른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육교나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어린이의 시각 같았어요. 동심이란 게 살아있다면 이렇게 대답했겠죠.”

 “여러분은 동심이 없는 거죠?”

 “뭐 어찌됐던 이젠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럼 그 동심이란 건 언제 없어졌나요?

 

 

쓸모가 있다

 

인간 실격.

 

실용적.

 

실용적이 나쁜 말이야?

 

스타킹이야 말로 가장 비실용적인 제품.

 

다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그것도 은밀하게. 도대체가 왜 그래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물건을 학생들한테 신게 하는 이유가 뭔가.

 

모든 멋이란 쓸모없음에서 나온단 말이죠.

 

넥타이, 자기 목을 조르는 기괴한 장식품

 

이런 것을 남자들한테 매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를 테면 머리스타일 말이죠. 남자들의 짧은 머리, 불황과 관련이 있다. 사회가 능력있는 남성성을 강조한 결과. 지고

지순한 여성성을 강조한 결과 긴 생머리가 있는 것처럼.

 

짧은 머리.

힐끗힐끗 쳐다보며 킥킥대는 남자애들. 짜증나고 열받는다.

 

한편으론 무섭다.

 

 

 “나처럼 그냥 신지 마. 그럼 되잖아.”

 “그럴까봐. 근데 넌 오늘도 체육복 입고 온 거야?”

 “당연하지.”

 “교문에서 안 걸렸어? 집중단속 한다고 했잖아.”

 “오늘은 걸렸어. 젠장. 그래서 아까 학생부실 내려갔다 왔잖아.”

 “키킥, 젠장이래. 어쩌다 그랬는데?”

 “원래 그 시간엔 아무도 안 지키는데 오늘따라 체육이 떡 하니 있더라구. 체육복 걷어올린 거 딱 걸렸지.”

 “아무튼 너도 참 대단하다. 매일 같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그리구 치마 입기 싫으면 교복바지 하나 사면 되잖아?”

 “엄마가 안 사준단 말이야.”

 “어머니도 참 대단하시고 말야.”

 내가 매일같이 하는 그 대단하다는 일은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다. 치마가 입기 싫다. 단지 그 뿐이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못 입겠다. 그래야 정확하다. 도대체 왜 내 다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보여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려 하는 대신, 혹은 이해하는 척만 하는 대신 더 쉽고 편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열여덟의 여학생에겐 흔하디 흔한 일이지 않나?

 

 체육복 바지를 입고 그 위에 교복 치마를 입는다. 슈퍼맨이 그랬지. 바지를 입고 팬티를 입는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을 소화한 그는 선구자다. 나도 이를 테면 그런 거다. 선구자. 모두가 다 다리를 드러내놓고 치마를 입을 때 나는 그렇지 않는다. 슈퍼맨이 그랬던 것처럼, 훗날 누군가가 나 정단비의 슈퍼함에 대해서도 영화를 만들어서 기억해주지 않을까?

 맵고 짜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교복치마를 입고 집을 나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뭔가 잊은 듯 아차차 하며 계단으로 급히 올라가 1.5층 쯤에 멈춰서는 가방에 구겨넣은 체육복 바지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뒤도 안돌아보고 직진하면 된다. 내 슈퍼한 패션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멀한 녀석들은 버스 손잡이의 동그라미 사이로 눈빛을 교환하며 킥킥대기 바쁘지만 니네들의 개그 소재가 될 지언정 니네들한테 내 다리를 보여줄 순 없단 말이다. 이 응큼한 녀석들아.

 만원버스의 숨막힘도 일주일만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남학생들의 비웃음 따위 못 견딜 게 아니다. 귀를 쾅쾅 울리는 Nirvana의 스멜을 맡다 보면 밀려밀려 내릴 때가 되곤 하는 것이다.

 교문에 누가 지키고 섰다 싶으면 변신을 해야한다. 공중전화박스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스마트한 시대는 도무지 그런 작은 공간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단 말이지. 명색이 정문이랍시고 만들어놓은 커다란 돌기둥이 내내 이어져온 지루한 담과 만나는 곳에 작은 빈 공간이 있다. 나만의 피팅룸. 그곳에 들어가 입고 온 체육복 바지를 발목부터 두껍게 세 번쯤 접고 그 다음엔 쭈욱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다. 그리고 나서 함께 딸려 올라온 치맛단을 톡톡 쓸어내리듯 쳐주면 얌전히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되는 것이다. 허벅지 안쪽을 도톰하게 쓸리는 체육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팔자걸음을 걸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문을 지나는 그 시간만이고 건물에 들어서면 다시 손을 집어넣어 말아 올라간 체육복 바지를 내리기만 하면 되니 또한 얼마나 간단한가. 교실에 들어오면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멤버들은 또 있기 마련이니 자연스레 그들에 섞여 치마를 벗으면 내 슈퍼함은 이내 일상 속으로 사라진다.

 가끔 엘베에서 만나는 아랫집 여드름은 매일같이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나를 어지간한 덜렁이쯤으로 생각하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힐끔거리지만 아니, 나는 이렇게나 치밀한 년이다.

 

 그렇게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 지독한 연극 무대를 매일 올라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 때문이다.

 

 대학 카톨릭 모임에서 만난 엄마와 아빠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아빠는 그나마 가부장제의 풍파 속에서도 남자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남아있는 사람인데, 엄마는 외할머니의 고지식함을 이어받고 친할머니의 고루함을 전수받아 참 고루고루 보수적이시다.

 이런 엄마의 바람은 하나뿐인 딸이 예쁜 여성으로 자라나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받고 사는 거란다, 내 참. 외모도 그 정도면, 성적도 그 정도면, 성격 또한 그 정도면 모든 것이 적당히 기준 이상인 오빠가 사춘기랄 것도 없이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생이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나도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지. 오빠가 그런다고 해서 나도 꼭 그런다는, 그래야 한다는 것은 폭력이잖아.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해. 나 같으면 그냥 입겠어. 전에 입은 거 보니까 예쁘기만 하던데 뭘.”

 나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엄마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예쁜 핑크색 주름 치마를 사고 그 자리에서 입고 나왔다. 하지만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울상이 되고 말았다. 엄마한테 사정하다시피 매달리고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입고서야 내 발로 백화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기만 벌써 다섯 번째. 내 옷장에는 핏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길이와 두께도 다른 치마가 다섯 벌이나 있지만 그걸 입고 외출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쯤되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치마를 입지 않는 내 고집이 대단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치마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의 의지가 대단한지 길 가는 사람 잡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 되어 솟을 기세다.

 

 한창 반항기가 돋던 중학교 때에는 바지를 입었다. 지금은 짧은 단발이지만 그 때는 머리가 조금 더 짧았다. 멋부리는 남자애들처럼 짧은 머리에 다른 여자애들보다 키는 더 큰 데다가 바지까지 입고 있으니 처음보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남자취급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인기도 좋았다. 도심에서 조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던 여중이었는데, 같은 학년 애들은 물론이고 예쁜 언니들도 종종 나를 찾아와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가곤 했다. 나는 나대로 그런 언니들이 싫지 않아서, 예쁜 언니를 눈 앞에 앉혀놓고 코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예쁘다는 것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순간순간 황홀한 그 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에 반대했던 엄마

 

 딸, 여성스러움을 강조.

 

 인간으로써 쓸모가 있는 인간, 그렇지 못한 인간의 실격

 여성으로써 쓸모가 있는 여성. 그렇지 못한 여성의 실격

 

 

 남자 고등학생이 싫은 것

 

 긴 머리가 싫은 것

 

 치마에 스타킹이 싫은 것

 

 유치원 때 학예회날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하얀 투피스에 살색 스타킹을 신었던 날

 

 옆집 오빠가 나를 데려간 것

 

 나를 여자로써 쳐다보는 것이 싫다.

 

 오히려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게 된 것.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조심하지 못한 나를 나무란 엄마

 

 

 단풍 구경 나가자.

 으이그 또 넘어졌지?

 아무튼 꽈당 염미지 알아줘야돼.

 좀 조심좀 해라. 뭐냐. 스타킹 다 나갔네.

 미지야?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

 넘어졌을 때, 넘어져서 아플 때, 넘어져서 아파서 울상이 되었을 때 해줄 말은,

 많이 아프지다. 조심했어야지가 아니라.

 

 

무릇 영웅이란 이 정도의 이중생활쯤은 감당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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