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트리 최종본.

레몬트리 2014.12.22 05:41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었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었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 순 없다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우리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내가 버틴 건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늘 수정이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있어 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야?” 지원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근데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한 거야?” 수정이가 열을 올린다.

  “그니까. 살 빼야 되는데 밤 11시에 티비에서 막 먹방하고 그럴 때 느끼는 처절한 고통 말이지?”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염미지. 멋진데? 그래서?” 단비가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일 없다는 걸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방금 미지 말 듣고 생각난 건데,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지 않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지금 아무렇지 않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거다?”

  “말 되지 않아?”

 

  고통. 나혼자 감당해야하는 것.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뭐 꼭 그런 건 아니지…….”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아니 난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긴데 넌 또 왜 이렇게 열내?”

  “고통이란 건…”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저만 빼놓고.”

  또 슬그머니 다가와 눈을 반짝거리는 리상쌤이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해보려구요. 진지하게 잘 들어 주세요. 뭐 훈계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니 긴장 푸시구요.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꿈이 국어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국어과목이 성적이 잘 나와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사범대에 들어왔고 정말 운이 좋아서, 시험에 빨리 붙었죠. 선생님이 되고 나서 어땠을까요? 기쁜 것은 잠시예요. 그냥 이것도 하나의 일상입니다. 등교하듯 출근하고, 하교하듯 퇴근하고. 근데 정말 무서운 건 10년 넘게 꾸던 꿈을 이루고 나니, 나한테는 꿈이 없는 거에요. 그 때 만나던 여자친구가 가끔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선배는 꿈이 뭐냐고. 대답할 수가 없는 거죠. 내 꿈은 국어선생님이었는데, 나는 꿈을 이뤘는데, 꿈이 뭐냐니.”

  뭔가 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말은 못했다. 선생님이 너무 진지해서.

  “1년차를 정신없이 보내고 제일 방황했던 게 2년, 3년차였던 거 같아요. 근데 그런 방황과는 별개로, 직업을 가지니 생활이 안정되는 거죠.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특히 고3 담임할 때는 돈은 버는데, 쓸 시간이 없더라구요. 그 때는 주5일제도 아니었어서 한 달에 딱 하루 쉬었거든요.”

  “고3 많이 힘들어요?” 단비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 고3때는 그렇게 안 힘들었던 것 같은데, 고3은 몰라도 고3담임은 진짜 힘들어요. 근데 몸이 힘든 거랑은 별개로 신경쓸 일은 별로 없어요, 고3 담임이. 딱히 사고치는 애들도 없고, 업무도 입시 외에는 별 거 없고. 그리고 수업도 여러분 내년에 많이 하시겠지만 EBS 문제집 풀이 하는 거 반복이잖아요. 고3담임 딱 2년째 하고 나니까 드는 생각이 이거더라구요. 이거 너무 편한데?”

  “편해요? 주말이 없잖아요?”

  “주말이 없는 대신, 수능 이후에 시간들이 있죠.”

  “아아…….”

  “아무튼, 그 때 딱 머릿속에 떠오른 소설이 이거에요. 레몬 트리!”

  “아! 선생님. 결국은 수업 얘기!” 아이들이 난리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워워, 진정들 하시고. 소설에서 주인공은,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죠. 생각해보니까 그 때의 생활이 딱 그랬어요. 아무렇지 않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제가 생긴 건 귀공자처럼 생겼어도 어렸을 땐 좀 힘들었거든요, 우리 집이. 대학 다닐 때도 알바하느라 바빴고. 근데 직장을 갖고 나니까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한 거죠. 삶이 윤택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삶 말이죠. 근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든 거죠. 이 안정된 생활을 즐기면 어떻게 될까? 내년에도 고3을 맡고, 더 안정된 입시지도를 하고 EBS 문제풀이는 더 노련하게 해주고, 그러다가 돈 모아서 차 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게 된다면.”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내가 꿈꾸던 삶이,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이, 이런 것이었나 싶었던 거죠.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더 지내고 나면 EBS 문제풀이를 잘 해주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겠다 싶은 무서운 생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고3 안하겠다, 했죠.”

  “주말에 놀고 싶었던 건 아니구요?”

  “아, 쪼끔 그런 것도 있고. 하하하.”

  리상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엽게 웃었다.

  “결국 안정을 버리고 택한 것은 고통입니다. 이 수업 준비하느라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수업시간에 슬슬 돌아다니기나 하고 하는 것 없는 거 같지만 실제 수업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두 배 세 배로 힘들다구요.”

  “선생님 수업하면서 되게 재미있어 하잖아요?”

  “그거야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재미있는 척 하는 거죠. 여러분 읽는 소설들만 해도 그래요. 제가 그냥 쉽게 복사하지 않고 다 일일이 타이핑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기 좋으라고. 저 이래뵈도 독수리거든요. 검지 중지 네 손가락 씁니다. 한참 타자 치다보면 새끼손가락이 굳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럼 그렇게 고통스러운 걸 왜 자꾸 하시는데요?”

  “바로! 그겁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리상쌤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결국, 풉. 저한테 이만큼의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는, 뭐 그런 얘기겠죠. 하하하.”

  “아, 뭐야! 나 이 수업 괜히 들었어. 아, 오그라들어…….” 여기저기서 아주 난리들이 났다.

  “우스꽝스럽게 얘기했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래요. 여러분들이 힘들었던 순간들, 그 고통의 시간들이 과연 다 헛된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이 수업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아무렇지 않은 내가 있기 위해서 나한테 그 고통스런 경험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이미 그 때의 고통을 이겨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대략 열 시간 가량이어서, 꼬박 지새울 각오만 한다면야 모든 면모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 깊도록 해변에 주저앉아, 수평선 어두운 사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과 때로는 되레 내 쪽에서 크게 앓고 말았던 여러 얼굴들, 우리 악수한 손에서 전해지던 운명선의 차가운 느낌이라든가, 방금 한 결별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떤 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두는, 서른번째 여름마저 무료하게 지나가버리고 만 것에 불과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벌써 이 강좌도 다음 시간이 마지막 소설이네요. 사실 오늘 배운 소설은 좀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내년에 고3 되면 힘들 거에요. 슬럼프에 무기력증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방황이, 여러분을 키울 겁니다. 고통 속에서 많이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끄읕!”

 

  내 꿈은 심리상담사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되는 것 같다. 피상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예전의 나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하지만 예전의 내가 있었기에 나는 심리상담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내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일일 거다. 이 수업, 잘 들었다.

10.31.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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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3차본

레몬트리 2014.12.21 15:33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우리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내가 버틴 건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대략 열 시간 가량이어서, 꼬박 지새울 각오만 한다면야 모든 면모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 깊도록 해변에 주저앉아, 수평선 어두운 사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과 때로는 되레 내 쪽에서 크게 앓고 말았던 여러 얼굴들, 우리 악수한 손에서 전해지던 운명선의 차가운 느낌이라든가, 방금 한 결별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떤 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두는, 서른번째 여름마저 무료하게 지나가버리고 만 것에 불과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진짜 그렇네. 근데 참 멋있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지?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했나?”

  “아니야, 미지야. 보통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반대쟁이. 멋진데? 그래서?”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일 없다는 것은 좋은 거 같은데,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혜민이 말처럼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라고 봐.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거다?”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 나는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고통은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제 주변에 저렇게 반대를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을 겁니다.

별일 없이 산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괴롭고 흉한 무늬와 빛깔일지라도, 그건 한 땀 한 땀 힘들게 새겨놓은 시간의 자수, 엄연한 너의 지난날이라는 것을. 더욱이 내겐, 너를 그토록 함부로 대할 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닐 순 없다

 

 아니,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절대 오케이 되는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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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2차본

레몬트리 2014.12.19 15:48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영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영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냐?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이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격하게 흔들리며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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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완성판

병섭4 2014.12.03 21:42

스마트폰 어벤져스

배명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름의 뜻부터 뭔가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보다 4배나 커다란 크기에 겨울이면 눈이 오기도 하고, 고이는 물은 대부분 사람이 먹을 수 없어 더 위험한 사막. 그러나 이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로 이어진 오아시스를 따라 아랍, 인도, 티벳, 중국, 러시아의 땅들이 붙어 있어 예부터 비단길로 유명했다.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신임장을 받고 출발해서 17년 동안이나 중국에 머물며, 그 동안의 기록을 동방견문록으로 정리한 마르코 폴로가 둘러간 곳도 바로 이곳 - 타클라마칸 사막이었다.

 

미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검색하자 스마트폰에 떠오른 이야기였다. ‘위키 백과라는 사이트였는데, 화면을 밑으로 내리는 대로 타클라마칸의 지형과 기후, 인물, 민족, 분쟁 등등 온갖 이야기들이 밀려 나왔다.

 

다른 블로그에 링크된 3D 지도 사이트 - 구글 어스에서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는 화면에서 시작해 카메라가 줌인하듯 지정된 타클라마칸의 지역으로 쭈우우욱 확대해 들어가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단비야, 이거 봐봐! 오오, 이거 신기한데!”

 

미지는 지구 밖에서부터 시작해 지구의 어느 지역까지 쭈우욱 떨어져 내리는 화면을 보는 게, 이게 생각보다 엄청 신기하고 짜릿했다.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는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으아악!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재밌어서, 인제 다른 것 좀 보자는 단비의 걸걸한 한 마디가 나올 때까지 미지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화면을 다시 봤다. 그렇게 확대해서 본 타클라마칸은 정말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누렇게 말라붙은 바다 같았다.

 

다른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타클라마칸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곳도 있었다. 놀랐던 것은 모래언덕이 바람을 따라 진짜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과학이나 지리시간에 몇 번 듣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영상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람이 심한 날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높은 바위산에서 캠코더로 찍어서 빨리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마치 모래로 된 파도가 서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나르면 수 천 대의 트럭으로도 수 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를 그 거대한 작업을 모래바람은 단 몇 일만에 해 내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그 작은 화면만으로도 그 영상은 진짜 대단했다. 미지는 정말 자연의 신비나 어떤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듯해서 놀라웠다.

 

 

스마트폰 논쟁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짝꿍과 함께 소설을 읽으면서 잘 모르는 것들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주기 바랍니다. , 소설에 관련된 것만 검색하는 겁니다. 소설과 관련 없는 웹서핑이나 게임, 페북질은 엄격히 금지합니다. 특히, 문자나 카톡을 하지는 말아 주세요. 우리 수업에 집중하게요. 만일 문자나 카톡을 하다 걸리면, 전송된 문자를 우리 모두 앞에서 큰 소리로 읽는 벌을 받겠습니다. 우아..무지 창피하겠죠? 그러니, 이 규칙을 꼭 지켜주세요. 부탁합니다.”

 

뭐래니? 리상샘이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미지는 스마트폰에 달려 들었다. 지난 시간에 리상샘은 다음에 할 소설로 배명훈 작가의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를 소개하면서 스마트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소설에 대해 검색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오오~~ 하는 웅성거림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무언가 금지된 것이 다시 허락될 때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아이들의 표정 속에 있었다.

 

미지네 학교는 핸드폰을 아침에 걷어서 종례시간에야 나눠 주었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서, 걸리기만 하면 그날 하루 압수에, 벌점 중에서도 최고 벌점인 ‘5을 받아야 했다. 무단지각이 벌점 2점이었고 흉기소지가 벌점 3점인 것에 비하면 진짜 대단한 벌점이었다.

 

하지만 미지는 모든 아이들의 핸드폰이 다 스마트폰인 듯이 너무도 당연스레 말하는 리상샘이 좀 거슬려서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스마트폰 없는 사람들은 뭐 하나요?”

 

미지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아직 2G폰을 벗어나지 못한 미지였다. 새로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비싼데다가 액정도 쉽게 깨지는 거 같고, 뭐 좀 할려고 하면 그놈의 까똑. 까똑.’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는 게 공부를 할려면 없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개뿔!!

 

미지는 사실 스마트폰이 정말정말 갖고 싶었다. 미지네 학교와 반의 온갖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그 단톡방도 언제 어디서든 바로 들어가고 싶었고, 오늘 학교 급식의 점심메뉴가 뭔지 클릭만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그 간편함도 즐기고 싶었고, 멋지게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당장 프사에 올리고도 싶었다.

 

또 멋진 글과 사진과 영상을 올려서 미지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며 재치가 있는지 친구들에게, 아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고도 싶었다. 미지가 무슨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기 보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일이 정말 간단하니까 말이다. 페이스북에 사진 몇 장, 동영상 몇 개로 단번에 수십만의 좋아요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우리 반 영주는 무슨 결심을 했는지, 매주 월요일에 우리 학교 5, 전망이 좋은 서쪽 창문에서 학교의 풍경사진을 찍었다. 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공원에는 작은 연못과 조그만 언덕과 아담한 숲이 있고 잘 정돈된 산책로에 저녁이면 조명도 은은해서, 우리 학교는 꽤 예쁜 학교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영주는,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빼먹기도 했지만, 한 해 동안 우리 학교의 그 이쁜 풍경을 스물 몇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가 2학년에 올라오는 2월에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 학교에서 1년을 보낸 짧은 감상을 덧붙여서 말이다.

 

영주의 사진은 순식간에 퍼져 놀랍게도 불과 열흘만에 좋아요3천이 넘었다. 댓글에는 우리 학교 애들이 써 놓은 응원과 공감의 말도 있었지만, 졸업생 언니들의 추억 돋는 댓글도 있었고, 이제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는 중3 아이들의 감탄과 기대에 찬 댓글도 있었다. 근처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댓글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외국어로 된 댓글도 있었다. 내 손 안에서 간단한 조작 몇 번이면 내가 만든 무언가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간단하고 대단한 일도 먼저 스마트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에효, 작은 한숨이 미지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청소년 요금제로 한 달에 이 삼만원 정도면, 웬만한 스마트폰은 가질 수 있었다. 그 정도 돈은 미지의 용돈으로도 해결될 만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빠였다. 다른 것에는 그리 엄하지 않은 아빠가 유독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에는 엄격하게 반대했다. 스마트폰은 바보상자이고,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뜨리는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위험한 걸 아빠는 왜 샀으며, 고작 10만원 어치 사 놓은 걸로 무슨 대단한 투자인양 왜 맨날 주식시세는 들여다 보고, 주말마다 몇 시간 넘게 야구에, 드라마에, 예능에 빠져서 밥 먹다가도 맨날 엄마한테 혼나는 아빠는 뭐냐고 미지가 따져 물어도 아빠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는, 정말이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그런 일은 스마트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반복되었는데, 얼마 전에 아빠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지가 씩씩 거리며 거의 소리를 지를 듯이 아빠에게 마구 따져 묻었을 때, 대답은 않고 내내 듣기만 하던 아빠가 말했다.

 

“..., 염미지.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하자.”

 

아빠는, 일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웃음기 하나 없이 아주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뭔가 뜨겁고 날카롭고 빨간 경고등이 윙윙 대는 듯한 아빠의 표정에 미지는 일단 멈춰 섰다. 뭔가 더 말을 하면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아빠가 성큼성큼 미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려도, 아빠를 쫓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거의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무서웠다. 이 쯤 되면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아빠를 쫓아 가야 하나? 한 번 더?

 

미지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화를 내는 아빠를 보는 것도 물론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아빠랑 그렇게 진짜 싸우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그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뭔가 깝깝하고 답답하고 어색해서, 뭔가 윤기라고는 없이 바싹 말라버린 듯한 그 시간이 미지는 정말정말 불편했다. 거기까지 가야 하나? 스마트폰 때문에? 아빠에 대해 미지의 화가 풀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빠의 말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이다. 서로 진짜로 화를 내고 싸워서 그 메마른 시간이 얼마나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더 아빠에게 말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스멀스멀, 그 때 풀리지 않은 화가 뜨끈하게 속에 차올랐다. 그것 때문인지 미지는 괜히 가슴까지 두근댔다. 리상샘에게 질문을 가장해 그렇게 쏘아 붙인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대답이 또 기가 찼다.

 

... 미지학생. 스마트폰을 갖는 능력보다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게 더 큰 능력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짝꿍으로 데려오세요.”

 

아니 폰을 가져오라면서, 폰이 없다는데, 그 시간에 사람을 데려오라니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이냐? 꼭 질문을 하면 대답은 안하고 맨날 능력이 어쩌고 하는 그런 이상한 쫄리는 말같은 걸 던져서, 순간 우리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냥 스윽 빠져 나가는 게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특기란 걸 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당했다. 순간 또 뭔가 알쏭달쏭해서 미지가 더 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리상샘은 미지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고는 스윽, 교실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아놔, 진짜 이 남자인간들을 그냥...

 

벌써 몇 번이나 수업에 빠지고 딴 데로 새 버렸던 단비가 오늘만큼은 이 수업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미지는 아침부터 자리까지 몰래 바꿔가며, 단비 옆을 내내 지키다가 단비를 방과후수업 교실로 끌고 왔다. 단비에게는 스마트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신형에다, 예쁜 폰트에다가, 토끼양 케이스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단비의 핸드폰은 스마트폰이긴 했다. 하지만 완전 구형에다가 액정은 다 깨져서 전화나 될까 싶은 거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부터 단비는 이렇게 예쁜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으이그, 기집애, 뭔 일인지는 몰라도 단비, 너의 이 이쁜 아가는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었던 거야. 오늘은 이 언니가 네 스마트폰 좀 써 주실께.

 

미지가 무슨 말을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는 단비를 옆에 두고, 미지는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이야기 속에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스마트폰은 할 수 없는...

 

“...미지학생? 대답해 보세요.”

 

으잉? 이게 무슨 소리지?

 

내내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미지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오늘 미지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교실의 맨 뒷줄에 앉아서, 책상에 코를 박을 듯이 몸을 숙이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상샘과 아이들의 시선이 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완전 위기였다.

 

미지는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슬쩍 폰의 전원을 끄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옆눈으로 단비를 쳐다 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무슨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비는 미지의 당황해 하는 눈길은 전혀 모른 채, 소설 학습지에다 노란색 색연필로 박박 낙서나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기집애. 으이그, 이걸 짝꿍이라고... , 짝꿍!

 

그제서야 미지는 리상샘이 짝꿍끼리 얘기해서 소설에 대한 토론주제를 정하고 같이 이야기 해 보자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때도 리상샘의 말을 귀로만 듣고는,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 이런...

 

이건 사고였다. 이건 정말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순전한 사고였다. 미지는 정말 이 소설수업에 열심히 참여할 생각이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이 특이해서 미지는 점심시간에 이 소설을 한 번 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으면 대강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상샘과 아이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학생, 빈스토크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죠?”

 

리상샘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가벼운 연기가 더 필요했다. 10여년 학교 생활에, 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연마했던 필살의 연기력으로, 미지는 벌써부터 같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며, 미지도 굉장히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리상샘에게 질문을 다시 정리해 달라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민소는 폭격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격추되어 죽을 위기에 있지요. 그런데 빈스토크 방위군은 민소를 구하러 가지 않아요. 민소가 수행한 임무는 선제공격을 금지한 국제법을 어기는 불법적인 비밀임무였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를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펼치면 빈스토크가 불법적인 공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겠지요. 이 부분을 근거로 많은 학생들이 빈스토크를 비난했어요.”

 

, 그래, 민소, 기억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추락했지. 그래, 국제법, 아까 그걸로 검색도 했었어. 그거라면 대답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래서, 질문이 뭐지?’

 

미지는 리상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검색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 되려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리상샘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하는 자신을 상상하기까지 하면서, 미지는 리상샘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혜민이는,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밀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병사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빈스토크군은 민소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빈스토크군이 민소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민소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중에서, 미지학생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 ... 선택하라구요?

 

순간, 미지는 머리 속이 하얘졌다. 분명 한 번 읽은 소설이라 대충 무슨 이야기인가 알기는 하겠는데, 입장을 선택하라니,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라니. 그런 걸 생각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며 검색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까 잠시나마 솟았던 자신감은 쨍그랑 부서지고,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불쌍한 여고생만 남았다.

 

“..., 저기... 그게...”

 

리상샘은 그런 미지를 보다 빙긋이 웃고는 말했다.

 

미지학생, 스마트폰이 참 대단하긴 해도, 결국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하는 그 힘까지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걸 잊지 말고, 잠시, 서 있는 채로, 스스로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주길 바래요. 먼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미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께요.”

 

리상샘의 말은 차분했지만, 미지는 전혀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런 쪽팔림이라니...

 

미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괜히 옆에 앉은 단비를 흘겨 보았다.

 

어느 새 단비는 아까 그 박박 낙서하던 학습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놓고는 뭔가 열심히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기집애가 의리 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하지만 단비한테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비는 원래 이런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하는 애였다. 단비한테 오늘 그냥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것도 미지였다. 이건 분명 미지의 책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미지는 선 채로, 다시 소설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빈스토크라는 도시가 있다. 가로가 2키로, 세로가 3키로에 높이가 674층이란다. 엄청 거대하고 화려한 이 건물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이 도시 안에는 군대도 있고, 의회도 있고, 인공위성 제작과 서비스라는 주요 산업도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라 할 만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곳이어서, 이 건물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돈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돈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빈스토크는 그게 유난히 심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 소설의 남주인 민소였다.

 

사랑하는 연인 은수가 빈스토크에 있는 인공위성 회사에 입사하면서 연락을 끊자, 민소는 군대에 들어가 해군 파일럿을 지원한다. 빈스토크는 시민권이 없으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빈스토크 방위군의 경력이 있으면 빈스토크 영주권을 얻는데 아주 유리했다. 민소는 은수와 다시 만나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민소가 빈스토크군의 정규군이 아니라 빈스토크 해군에 고용된 방위업체의 비정규직 파일럿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 제대하기 6개월 전에 민소가 폭격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소설의 내용을 정리하자, 미지의 머리 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 ... 그런데 가만있어 봐. 비정규직이라고? 빈스토크 해군은 이런 어렵고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왜 비정규직 파일럿에게 맡긴 거지?’

 

 

타클라마칸과 배달사고

 

선생님, 이건 정말 국가가 비겁해요. 민소는 비정규직 파일럿이었어요. 어찌 됐든 정규직보다 불안한 자리이고 언제든 짤릴 수 있는 자리라고요. 혜민이 말대로 그게 정말 중요한 임무고 필요한 임무라면 정규직 파일럿에게 시켜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수정학생의 말도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겠다고 한 것은 민소잖아요. 그럼 둘 다 합의했으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그건 비겁해요. 합의라는 게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해야 합의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까지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을 하게 하는 건 합의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정규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써먹고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 지지 않는 걸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수정이였다. 미지가 찾아낸 질문이 미지만 찾아낸 질문은 아니었나 보다. 때마침 비정규직이라는 민소의 신분에 대해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정이는 간결하고 명확한 정리로 선생님의 논리를 차근차근 반박하고 있었다. 다들 수정이의 발표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지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뭔가 말이 안된다는 느낌은 드는데, 뭐라 딱 말할 수는 없어서 미지는 좀 갑갑하기도 했다. 리상샘이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정학생은 빈스토크군의 결정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애초에 계약이, 그러니까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 걸로 봐야 한다는 것이군요. 또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 거기, 손 들은 학생. 3반 연미학생 맞죠? , 이야기해 주세요

 

저기... 저희는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빈스토크 헌법에는 입주자와 방문자를 모두 보호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사실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만 보호하고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민소도 일단은 빈스토크의 방문자라고 할 수 있는데,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나 자기들 입주한 기업의 이익만 보호하려고 하지 방문자도 보호하려고는 안한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헌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거죠.”

 

맞아요... 어머!”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순간 다들 좀 놀라서, 리상샘과 친구들의 시선이 한번에 미지를 향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미지의 모습을 보자 다들 하하하 하며 웃고 말았다. 다시 또 얼굴이 빨개지다가, 미지도 자기가 한 행동이 좀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는 같이 웃었다. 리상샘이 말했다.

 

아고, 미지 학생, 미안해요. 이렇게 존재감이 확실한 미지학생을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우리 수업이 더 명랑해 졌네요. 좋아요, 미지학생. 할 말이 있는 거죠? 발표해 주세요.”

 

미지는 이 우스꽝스런 상황에 계속 웃음이 나서 마음을 고르지 못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리상샘을 보며 말했다.

 

하하, 흠흠. . , . 발표하겠습니다. ... 저는 빈스토크군이 민소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애초에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가 아닌 거 같아요. 오로지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 소설에 나오는 병수와 아내도 그래요. 병수의 아내는 남편과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병수에게 화목한 아내의 모습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완벽하게 화목한 부부를 연기하고, 그게 끝나면 다시 집을 나가버리잖아요. 화목한 부부라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어떤 이익을 얻는 거겠죠. 안정된 수입일 수도 있고, 대단한 명예일 수도 있고요.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구요. 빈스토크는 행복해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만 신경쓰는 껍데기 도시 같아요.”

 

미지의 발표가 끝나자, ~~하는 소리가 교실에 울리더니 다시 까르르 하는 웃음이 아이들 사이에 번졌다. 막 당황한 모습으로 웃겨 주다가 미지가 차분하게 정리된 발표를 하자, 그 의외의 모습이 그 자체로 아이들을 좀 웃겼던 것이다.

 

미지도 뭔가 좀 쑥스럽기도 하면서, 또 뭔가 해 낸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같이 웃었다. 그렇게 다같이 웃고 나서 다시 고요함이 찾아올 때 쯤, 리상샘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하, 미지학생. 고마워요.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제 앉아도 좋아요. ... 하지만 빈스토크에는 파란 우편함이 있잖아요. 이 우편함은 순전히 돈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죠.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파란 우편함에 자기 층의 주소가 적힌 편지가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갖다 주잖아요. 이건 이익과 상관 없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소설 속에서 병수도 이걸 근거로, 빈스토크가 그래도 인간적인 도시라고 홍보하기도 하고요. 배송 성공률이 94%나 된다고 했죠. 그렇다고 하면 빈스토크를 그냥 껍데기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 연미학생?”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파란 우편함도 개인에게 책임을 맡긴 것이지 빈스토크가 책임을 지지는 않죠. 거기 경고문에도 써 있잖아요. 빈스토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요. 민소의 편지가 은수에게 배달되지 못한 것도 병수라는 한 사람이 편지를 가져갔다가 잊어버려서 였잖아요. 물론 병수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느껴서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결국 은수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인만 책임을 느낄 뿐, 빈스토크라는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죠.”

 

2반 선경이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이 소설에서 자꾸 닳아 없어진다’, 혹은 풍화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걸 이야기했는데요, 이 표현들이 왜 이렇게 자꾸 반복되는 건지 저희끼리 이야기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지금 발표를 들으니까 좀 이해가 된 거 같아요. 민소가 은수를 보낼 때, 병수가 아내의 빈 방에서 아내의 흔적을 떠올릴 때, 이 말들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게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거 같아요. 빈스토크는 사람들이 완전히 개인화 되어서 사람들의 관계가 다 메말라 버린 거죠. 그래서 빈스토크는 사막처럼 되 버린 거에요.”

 

타클라마칸처럼?”

 

순간, 미지의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 . 타클라... ? 어머, 맞아요, 그래요. 어머머, 타클라마칸 사막처럼요! , 그러니까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이 제목에서 타클라마칸은 빈스토크를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우와! 선생님,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선경이의 외침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어머, 어머, 어머머머를 연발하면서,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소름을 확인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미지는 그렇게 같이 웃으며 법석을 떨 수도 없이, 팔에서 그치지 않고 등줄기까지 뻗어나가는 소름에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지의 머리 속에서, 친구들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이어져서, 뭔가 퍼즐이 다다닥 맞춰져 들어가는 느낌에 온 몸이 찌릿했던 것이다.

 

타클라마칸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배달사고도 있었다.

 

민소가 추락한 곳은 타클라마칸이었다. 그런데 민소는 폭탄을 떨어뜨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하다 사고가 난 것이므로, 일종의 배달사고라 할 수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병수가 민소의 편지를 은수에게 제 때 배달하지 못한 것은 배달사고였다. 그런데 병수는, 또 은수와 민소는, 방금 애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인간적인 관계가 메말라 버린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다들 외롭고, 그립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그 가득한 마음의 배달사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타클라마칸에서, ‘배달사고를 겪고 있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을 압축하고 있었다. 세상에... 아놔, 정말... 이런 변태같은 소설가들 같으니라구...

 

 

우리를 구하는 것

 

선경학생, 고마워요. 다른 발표한 친구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 그렇지요. 빈스토크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점점 더 깊어지고 풍부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의 관찰력과 논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명확해진 것도 참 좋아요. 이젠 여러분들이 얼굴이나 몸매만이 아니라 뇌까지도 섹쉬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정말 좋아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근원은 저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겠지만요. 하하.”

 

아이고... 잘 나가다가 뜬금 없이 또 시작된, 저 근본도 논리도 없는 리상샘의 외모 개그에 아이들이 정말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온갖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듯한 표정들을 보였지만 물론, 진심으로 불쾌해 하는 아이는 없었다. 사실은 다들, 리상샘이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름, 뿌듯해 하고 있었다.

 

우아.. 이 열렬한 환호,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인데요,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무슨 어려운 해석이 필요하거나 그런 부분이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좌아~발적으로 하도록 하죠. , 그럼 혜민학생부터 시작해 보죠. 하하.”

 

리상샘이 웃으며 좌아~발적으로, 자기 왼편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혜민이를 불렀다. 혜민이는 이게 뭐야~ 싶은 표정이긴 했지만, 역시 같이 웃고 있었다. 혜민이가 말했다.

 

.... 다들 그랬을 거 같은데, 일단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국가가 구조를 포기한 사람을 수 십 만의 사람들이 함께 구했다는 게요. , 물론, 그 사람들이 다 같이 타클라마칸에 간 것은 아니지만, 20만 개로 나눠진 타클라마칸의 실시간 인공위성 사진을 그 사람들이 다 같이 인터넷으로 찾아본 거잖아요. 그게 뭔가, 좀 감동적이었어요.”

 

맞아요. 특히나 마지막에 그... 얼마더라?”

 

, 연미학생, 이백칠십칠만 사천팔백육십칠, 이지요.”

 

, 맞아요 선생님. 그 이백칠십만.. , 그게 넘는 그 접속자 수가 나왔을 때, 완전 감동 먹었어요.”

 

, 좋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다음은 지원학생? 이야기해 주세요.”

 

... ... 저는, 은수의 편지가 좋았어요. 민소는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이고, 은수는 지금 결혼할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자기 때문에 민소가 그렇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래서 그 사람을 구하려고 편지를 쓴 게, 그 내용이, 좀 안쓰럽기도 하고, 괜히 고맙기도 하고 그랬어요. 어쨌든 그 편지가 파란우편함으로든, 인터넷으로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게 사람들을 움직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편지를 잘 써야겠구나.”

 

와하하... 순간, 지원이의 말에 아이들이 한번에 웃었다. 미지도 내내 조용히 듣다가 편지를 잘 써야겠구나하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좀 엉뚱하게 들린 지원이의 말에 같이 웃었다. 하여간 이 엉성한 얼음공주,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미지는 밝은 분위기에 용기가 나서 손을 들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좋았어요. 어쨌든 결국 민소를 구한 거잖아요. 민소가 막 몸도 못 움직이고, 의식도 잃고, 점점 죽을 거 같다가 마지막에 헬기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와서 진짜 다행이었어요. 진짜 그렇다니까요. 인터넷으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구요.”

 

순간, 리상샘의 눈빛이 고요해 졌다.

 

다들 미지에게 공감하는 듯한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뭔가 차갑고, 뭔가 더 날카로워진 느낌으로, 리상샘이 고요하게 미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미지학생. 민소가 정말, 구조가 되었나요?”

 

아니,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하는데 그게 왜 당연하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 그래, 이거. 미지는 소설의 뒷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잖아요. ‘멀리서 하느님의 사자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 사자가 내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어쩐지 HH-60G의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분명히 민소는 헬기 소리를 들었다고요. 그럼 구조된 거 아닌가요?”

 

두 개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민소는 지금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 민소는 엔진 소리처럼들렸다고 했지요. 환청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요. 둘째, 설령 그것이 헬기라고 해도, HH-60G가 빈스토크군의 헬기이거나 민소를 구하기 위한 빈스토크의 민간헬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헬기는 적국인 코스모마피아의 것일 수도 있지요.”

 

아니 이 사람은 대체, 뭐가 그렇게 베베 꼬여서, 도대체가 해피엔딩이란 걸 배겨내지 못하는 무슨 심각한 상처라도 있는 건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일도 왜 들춰내서 괜히 사람 기분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건지, 그것도 하필 미지가 기분 좋게 발표할 때 이렇게 찬물, 아니, 찬물로는 부족해, 완전 딴딴한 얼음덩이를 면상에 대놓고 날리는 이런 시츄에이션을 만드는 건지, 미지는 속으로 괜히 마음이 상해서 궁시렁 궁시렁 대고 있었지만, 사실은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면 그건,

할 말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위기의 상황. 뜨거운 사막에서 아무도 없이, 누군가 구하러 와 줄 거라는 간절한 바람만큼이나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 싸여, 점점 죽음으로 가라앉는 그 절박하고 고독한 민소의 상황을, 정말이지 절박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그가 살아남기를 끝까지 절박하게 바랬다면, 우리는 끝까지 치밀해야 했다. 치밀하게, 그의 구조를 확인해야 했다. 확인해서, 그의 생존과 귀환과 다시 시작한 그의 삶을 확인해야 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그럴 가능성이라도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성급하게 해피엔딩을 말할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의 생존을 바랬다면... 그냥 소설 한 편에 너무 지나친 반응일까? 아니다...

 

물론 소설일 뿐이지만, 그냥 소설일 뿐이라면,

우리가 같이 이렇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지가 말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껏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볼까지 발그레해져서, 한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에, 다들 뭐라도 하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리상샘은 그 고요함을 충분히 견딘 뒤에, 말을 이었다.

 

이백칠십칠만 사천팔백육십칠. 이 숫자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일이란 물론, 쉽지 않지요.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인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바로 해결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였다 해도, 그들 중 누군가는, 우리들 중 누군가는 끝까지, 치밀하게, 그의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쓰러진 그를 안고, 호흡을 확인하고, 들것에 실어서 구조헬기에 그를 싣는 일을 우리가 하면 좋겠지만,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끝까지, 지켜보는 일은 우리가 해야지요. 소리 지르는 일은 우리가 해야지요.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기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이...”

 

까똑!”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들,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온 것인지 당황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까똑, 까똑!”

 

이런 세상에... 다시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미지도 좀 기분이 나빠져서, 이 카톡 알림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 하고 돌아봤다가 순간, 깜짝 놀라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그 방향과 거리를 종잡을 수 없었는데, 알고보니 그 카톡 소리는 바로 미지 옆, 단비의 핸드폰에서 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미지만큼이나 단비도 놀랐는지, 뭘 어떻게 꾸며도 선머슴아 같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단비가 이 때 만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은 똥그래져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 단비학생. 단비학생인가요?”

 

리상샘의 부름에도, 단비는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냥 굳어버렸다.

 

단비학생. 제가 카톡은 안된다고 했지요?”

 

리상샘은 수업을 시작할 때 말했던 그 규칙을 다시 확인했다.

 

벌입니다. 그 카톡 메시지, 이곳에서, 모두에게, 읽으세요. 큰소리로.”

 

리상샘은 비교적 부드럽게 말했지만, 말하는 마디마디마다 어떤 서운함과 적지 않은 분노가 스며 있었다. 미지는 이 모든 일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단비만큼이나 몸이 굳어버린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단비가 일어섰다. 단비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더니 읽기 시작했다.

 

... 세월호 유가족, .. 후원 청소년 모임 노랑나비의 회원님들께 알립니다.”

 

단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비의 목소리만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말을 듣자마자,

뉴스에서, 라디오에서, 포털에서, 페북에서, 내내 보고 들어서 익숙하던 그 말이,

그 순간만큼은 뭔가, 이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듯이 너무도 낯설어서,

미지는 온 몸의 신경이 곤두 선 채로 몸이 떨렸다.

미지는 조용히 리상샘을 보았다. 리상샘도 무척 놀란 듯했다.

리상샘의 눈빛도, 떨리고 있었다.

 

“...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67일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930일이지만, 167번째 416일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세월호 유가족 분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분들에게 시간은, 416일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월호의 아이들을,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 세월호의 유가족 분들은 구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바라는 서명운동을 내일 오후 6, 시청 앞 광장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회원님들은... ”

 

단비의 목소리가 고요한 교실을 채우고 있었다.

 

미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교실을 돌아 보았다. 아이들은 다들, 약간은 좀 멍해진 채로, 단비가 읽어내려가는 메시지를 같이 듣고 있었다. 리상샘도, 무슨 일이 일어나던 반짝반짝 빛내던 평소의 그 눈빛은 내지 못하고, 멍하니 교탁 어디를 바라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뭔가 좀 슬프고, 뭔가 좀 아프고, 뭔가 좀 부끄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때라면 그게 고소해 보일 텐데, 미지도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무심코 단비의 책상을 내려다 본 단비는 잠깐, 놀랐다. 그리고 단비에게 좀 미안하고, 좀 부끄럽고, 그리고 그냥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았다.

 

그곳에는,

반으로 접혀 있던 학습지가 살며시 펼쳐져,

수 십 개의 작은 노란 리본이 모여,

커다란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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