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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완)

소설 제목이 왜 역사예요?(ver1)

소설 제목이 왜 역사예요?

김승옥, <역사力士>

 

1. 이 지독한 사람

 

  선생님께서 따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수업이 몇 차례 진행되는 동안 나도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세상에 어떤 것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특히나 단편소설 같은 경우에는 제목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그리고 자존심이 센 작가일수록 자신의 작품에 완벽을 추구하려 할 것이고 그 완벽의 끝, 마침표는 제목이라는 거. 근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이따윈가. 역사는 소설 속에 서씨를 가리키는 말 아닌가. 서씨가 그리 중요한 인물이었나? 물론 비중이 낮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더 센 인물 같은데. 그리고 굳이 ‘역사’같은 잘 쓰지도 않는 옛날말 말고 더 세련된 제목들을 많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한 나는 다소 늦은 시간임에도 선생님께 카톡을 보냈다.

 

존경하는 쌤~

주말인데 잘 지내고 계시어요?

근데 제가 너무 궁금한 게 있어가지구요~

소설 제목이 왜 역사예요?

역사역사역사 도대체 서씨가 왜 중요한데요?

궁금해 잠도 못자겠어요!!! 알려주세욬ㅋㅋ

 

  몇 분 간격으로 꾸준히 내 액정깨진 폰을 들여다봤건만 대화창에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월요일 아침 7:35분. 내 액정깨진 폰이 카톡거린다. 잽싸게 나꿔채 답을 확인하려는데 패턴이 풀리기도 전에 세 글자가 지나간다.

 

  그러게.

 

  그러게? 그러게? 그러게라니! 호기심 왕성한 제자의 기나긴 카톡에 이틀이나 늦게 답을 주시면서 그러게라니, 아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라고 따지고 싶지만 무엇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호기심소녀가 이 상황에서 화를 낼 순 없다. 선생님의 츤츤함이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어서 빨리 답을 듣고 싶을 뿐.

 

아니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불쌍한 소녀를 위하여 답을 좀 주시와요, 네? +.+

 

  라고 쓰고는 ‘샘아 샘아 답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하는 주문을 외고 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있다.

 

  아 진짜 샘이고 뭐고. #$^%&$#@$#@%^564

  결국 나의 호기심은 하루 더 묵혀 화요일 보충수업 시간에,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뾰족뾰족하게 선생님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지독한 사람.

 

 

2. 낙서가 있는 집

 

  소설의 시작은 시시껄렁하다. 흔하디 흔한 액자식 구성에 뭔가 갈팡질팡하는 인상을 주는 게 별루다. 이런 소설이 뭐가 좋다는 건지. 특히나 소설 앞부분은 인정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이보다 시시할 수 없는 벽지의 무늬 따위를 이야기하느라 한 페이지를 다 보낸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잡아끄는 문장이 툭 튀어나온다.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

 

  나를 개새끼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낙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 낙서부터 읽고 ‘그래, 맞아. 나는 개새끼였지.’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루를 버텨갈까. 그리고 그 문장을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이들은 모두 창신동 빈민가에 살고 있다. 열 살짜리 딸을 호되게 때리는 절름발이 사내, 이름을 바꾸면 운명도 바뀔 거라고 믿는 순진한 창녀, 영자. 그리고 문제의 역사, 서씨. 이들이 창신동을 이루고 있다. 매일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술집과 술집 사이에 놓여진 비가 새는 판자촌. 방문이 드륵 열리면 삼일은 머리를 감지 않은 ‘내’가 부스스한 떡진머리와 눈꼽 낀 얼굴로 으응? 하고 반응할 것 같다. 상상하기도 싫은 공간이다.

이런 공간을 내버리고 근사한 양옥집으로 이사를 갔으면 깔끔하게 잘 살 것이지, 이건 또 뭔가. 양옥집은 창신동보다 더하다. 양옥집은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곡명은 언제나 ‘엘리제를 위하여’. 심지어 이거 우리 학교 수업시작 종소리다. 조금만 읽어도 고등학교의 생활같은 답답함이 턱밑까지 차오를 지경이다.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살 난 아이까지도 일어나야 하고, 열 시에 미싱 소리, 열두 시에 라디오, 네 시에는 엘리제를 위하여. 늦어도 오후 여섯시 반까지는 모두 집에 와 있어야 하고 밤 열 시에는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는 말을 듣고 아, 그 집 여고생은 야자를 안하는구나 하는 나는 또또 뭔가.

 

  근사할 것만 같았던 양옥집의 삶은 한 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나와 생각이 똑같았던지 소설 속의 나도 거사를 준비한다. 그런 걸 쉽게 살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흥분제라는 것을 사서 모두가 마실 보리차에 넣는 데 성공을 한다. 결과는? 대참패. 혼자서 꾸민 일이 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상에 어려운 일, 하나도 없다.

 

 

3. 열 시 정각에 마시는 보리차

 

  작품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게 한 선생님은 대뜸 칠판 가운데에 줄을 하나 그으셨다. 그리고는 커다란 글씨로 한쪽에는 ‘창신동’, 반대편에는 ‘양옥집’이라고 쓰셨다. 이 소설에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두 공간을 기준으로 서로 쌍을 이루고 있으니 그걸 찾아보라는 말씀이시다. 그래, 이런 거 나올 줄 알았다. 혼자만 신이 나셔 가지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시는 걸 보니 또 우리 뒤통수를 치려고 뭔가를 준비하시고 계시나보다. 내 이번엔 절대 당하지 않으리라. 두고 보자!

  우리 모둠은 인물 먼저 나눠보기로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에 부딪혔다. 창신동에 서씨라고 쓰고 나니 양옥집에 누굴 써야할 지가 영 까다로운 거다. 힘센 걸로 보면 당연히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서씨는 창신동의 권력자가 아니다. 아니 창신동에는 권력자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럼 서씨의 상대편은 누구란 말인가.

  모둠 아이들과 소설을 다시 훑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며느리. 서씨는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며느리도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같은 노래를 반복하는 데에만 쏟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잘 발견한 것 같다.

  그럼 할아버지의 반대편에는 누가 있을까. 존재감도 없는 집주인은 아닐 테고, 월세 잘 내는 영자도 아니다. 그럼 절름발이 아저씬가? 따져 보니 그런 것도 같다. 할아버지도 나를 무릎 꿇린 채 계속 가풍이란 것을 주입하려고 했고 절름발이도 자신의 딸을 무릎 꿇린 채 뭔가를 계속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아! 이런 걸 발견해내는 우리 모둠, 참 멋진 것 같다. 으쓱.

여기까지밖에 못했는데 활동 시간이 끝나버렸다. 그래도 중요한 ‘인물’을 해결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대뜸 우리 모둠에게 이 단어를 주신다.

 

보리차.

 

  보리차? 보리차? 보리차라니. 서씨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니고 보리차라니. 도대체 보리차가 무에 그리 중요하단 말씀이십니까. 나 원 참.

아니 선생님, 이건 말도 안돼요. 다른 걸 주세요!

  라고 하고 싶었으나 자신만의 득의양양함으로 한껏 생글거리는 저 얄미운 얼굴 앞에 좀 더 쉬운 걸 달라는 부탁은 차마 하기 싫었다.

  3분의 시간 동안 한숨만 푹푹 쉬다가 결국 우리 모둠에서 나온 답변은 ‘술’이었다. 왜 양옥집 사람들이 매일 보리차를 마시면 창신동 사람들은 매일 술을 마실 것 같지 않나. 술집에도 맨날 간다며?

  자신없어하는 우리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에 생기가 돈다.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 생기가 답을 맞춘 제법 영리한 학생들에 대한 감탄, 혹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보람쯤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다. 저것은 요건 몰랐지? 하는 어느 정도의 약올림과, 그래서 너희들은 아직 나한테 배워야 하는 거야 라고 생각되는 일종의 우쭐함, 이 두 가지가 적절한 선에서 균형을 맞춘 어린아이 마음에서 출발하는 표정인 게다. 아, 유치해.

 

  유치함의 절정을 뚫고 제시된 답은 ‘저녁요리’였다. 엥? 그런 게 있었나 싶었는데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런 것도 같다. 매일 밤 10시 정각에 가족 모두가 마시는 보리차. 그 반대편에는 이것이 있었던 것이다. 요리책에도 없고 그때그때의 사정이 허락하는 신기한 요리재료로 맛을 낸, 그래서 이 냄비와 저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음식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풍토보다도 더 다른. 그 요리들.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이 먹어야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정말이지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음식들을 스스로가 만들어서 자유롭게 먹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모둠에 제시된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① 엘리제를 위하여

② 누렇게 변색된 천장

③ 절름발이 사내의 딸 교육

④ 서씨의 괴력

⑤ 가풍이 없는 가정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 답은 또한 이런 것들이었다.

 

① 장사치 여자들의 떠드는 소리, 옆방의 웅웅거림, 궤음과 경적

② 무늬없는 베니어 합판

③ 할아버지의 오리엔테이션

④ 며느리의 피아노 실력

 

  우리 모둠이 어려운 게 걸렸다. 라고 생각했다. ①도 그저 그렇고, ②도 쉽게 알 수 있다. ③과 ④는 우리 모둠 토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⑤의 설명을 듣고는 삐죽 나온 입이 쏙 들어갔다.

⑤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

 

  그 구절을 다시 찾아보니, 할아버지는 이사를 하느라 힘든 나를 꿇어앉혀 놓고 대뜸 그런 말을 한다. 가풍이 없는 가정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고. 처음 읽을 때는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고 흘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놀랠 노짜다.

  가풍이 없는 가정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런데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풍 따위는 없다. 즉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인간들이 아닌 개새끼인 것이다. 이런 미친 작가를 봤나.

 

 

4. 학교, 그리고 국가, 마지막으로 인류

 

  선생님이 던져준 생각거리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씨의 괴력은 며느리의 피아노 실력과 대응된다. 둘 다 남들이 갖지 못한 재주? or 능력? 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서씨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돈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돈에 팔고 싶은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서씨는 그 능력을 자기 안에 가둔다. 그리고는 모두가 잠든 통행금지 시간에 찬란한 조명이 비치는 동대문 위에서 마음껏, 힘을 뽐낸다.

  하지만 양옥집에서는 어떤가. 며느리가 가지고 있는 피아노 실력은 예술적 능력이다. 예술을 하려면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액체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 떨어지는 포도당이 아니다. 평소에는 바짝 말라버렸다가도 어느 순간 왈칵 쏟아져버리곤 하는 게 감정이지 않나. 양옥집의 며느리는 오후 네 시만 되면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고 곡이 끝나갈 즈음에는 어느 정도의 감정도 담겨있을 법한 허밍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감정의 오르내림조차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절름발이 사내는 또 어떤가. 집안의 누군가를 가르쳐야할 때 할아버지는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허락도 없이 기타를 두들겼던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그 대화의 방향은 언제나 할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흘러가게 될 것이다.

  포식자들에게 둘러싸여 위태로울 순 있지만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하늘을 가진 새가 서씨라면 매일매일 같은 모이를 받아먹고 주인에게 예쁜 소리만을 들려주어야하는 새장 속에 갇힌 관상용 새가 며느리였다. 인간은 자유가 주어질 때 생기가 넘쳐나고 누군가의 통제를 받을 때 무기력해진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학교만 그렇던가. 국가라는 것이 더 그렇다.

 

 

5. 무한하게 먼 곳에 있는 어느 지점

 

  처음에 나는 이 집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것이 처음 보는 경치에 보내는 감탄과 같은 성질의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알았다. 이해와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이 가족의 계획성 있는 움직임, 약간의 균열쯤은 금방 땜질해 버릴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는 전진적 태도, 무엇인가 창조해 내고 있다는 듯한 자부심이 만들어 준 그늘 없는 표정-문화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희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사람들은 매일매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지점과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이것은 나의 그들에 대한 이해였다.

  그러나 그 어느 지점이 무한하게 먼 곳에 있을 때도 우리는 그들이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나로 하여금 기타 켜는 시간의 제약까지를 주어 가면서 말이다. 차라리 이 사람들의 태도야말로 자신들은 걷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매일매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그 끝없는 공전(空轉)같아 뵈던 생활이 이곳보다는 오히려 더 알찬 것이 아니었을까.

 

 

6. 작가는 미쳤다

 

  이걸 쓴 게 스물 세 살 때였다고 하니. 나는 지금 열 여덟. 오년 뒤면 스물 세 살이 된다. 스물 세 살 이면 지금은 군대에 간 우리 오빠 나이다. 우리 오빠를 생각해보건데, 김승옥은 정말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는 거다.

 

+ 선생님의 보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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