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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도둑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1/ 4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지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비밀주머니에 대일밴드와 빨간약을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다행이었다.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먹먹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되게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를 알겠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도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란 것인지.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이런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말도 내뱉지 않고 미지는 가만히 있었다. 미지는 그게 무슨 말이든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 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하늘의 별이 빛났다. 그렇게 미지는 밤하늘을 보며 한참을 누워서,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을 다시 생각했다. 그건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하셨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되는 게 여고의 생리라는 걸 혹시 모르시나?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하며 기대가 된 채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