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레몬트리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빛이 빛으로 보이는 법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같은 게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괴롭고 흉한 무늬와 빛깔일지라도, 그건 한 땀 한 땀 힘들게 새겨놓은 시간의 자수, 엄연한 너의 지난날이라는 것을. 더욱이 내겐, 너를 그토록 함부로 대할 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아무 것도 아닐 순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기에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함게 터널을 지나온 친구라 그 누구보다도 각별하다. 지금도 자주 만나고 연락할 정도로 가깝지만 때때로 그 친구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날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체념하는 모습을 볼 때.

 

  물론 그 친구는 나보다 몇 배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어 버릴 때마다, 자신을 너무 혹사시킬 때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피하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친구 생각을 했다. 친구가 그럴 때마다 내가 울적해지고 화를 내는 건 변하지 않은 친구 때문이 아니라 그 시절 속에 있는 나를 보기 싫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장래희망은 심리상담사이다. 그래서 더욱 항상 고민이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예전의 나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하지만 예전의 내가 있었기에 나는 상담사를 꿈꾸게 되었고 내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것일 거다. 그 친구는 나보다 더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던 걸까? 솔직히 그 자격이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 친구는 지금 나보다 어떤 면에서는 인생을 더 즐겁게 살고 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같은 게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빛이 빛으로 보이는 법

 

이응준, <레몬 트리>

 

1. 현빈이 안 먹힌다

 

야심차게 준비한 시크릿 가든, 반응이 시원찮다. 복학생오빠라 그런가 보다.

 

엑소의 초능력이라도 외워야 될라나부다. 이런 젠장.

 

드라마로 한 시간 때운다. 참 좋다. 과자값 정도야 쿨하게 댄다. 한 시간 날로 먹는 편안함과 바꿀 수 있으랴.

'레몬트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몬 트리 최종본 2차  (0) 2015.01.09
레몬트리 최종본.  (0) 2014.12.22
레몬트리 3차본  (0) 2014.12.21
레몬트리 2차본  (0) 2014.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