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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사수대작전(완)

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수정판

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김경욱, <맥도날드 사수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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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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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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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색을 안하려고 했지만, 어제밤 내내 엄마는 자꾸만 우두커니 서서, 멍해져 있었다. 밥을 먹다가, 빨래를 개다가, 어제 먹던 깻잎통이 어디 있는지, 아빠 작업복은 어디에 두는지, 수정이가 엄마에게 물을 때마다 엄마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다시 불러야 엄마는 화들짝 깨며 수정이를 보았다. , 그래, 수정아, 뭐라고 그랬지? 하며 엄마는 물었지만, 그 물음 뒤에 서려 있는 아득한 표정을 엄마는 수정이에게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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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방과후수업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 아침 조례가 끝나고 담임샘이 수정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지난 3월부터 방과후수업비가 밀려 있으니 이번 주 안으로 꼭 내 주시라고 부모님께 알려드리라고 하셨다. 가끔 부모님이 실수로 착각하실 때가 있다며, 담임샘은 별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수정이도, 별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왔지만, 사실 수정이에게 이 일은 여전히 별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자주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했던 수정이었기에, 아니,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정이었기에 더욱, 이런 일은 수정이에게 여전히 '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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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잔뜩 불편해져서, 수정이는 오늘만큼은 리쌍샘의 방과후수업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입사 대비로 논술면접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한 수업이었다. 뭔가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그 동안의 수업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아서 나름, 재미를 느끼고 있던 수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 역시, 이 수업은 듣는 게 아니었어. 아마 종례가 끝나고, 미지가 수정이에게 팔짱을 끼며 늦었다고 우당탕탕 끌고 오지 않았다면, 수정이는 오늘 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지의 호들갑 때문에 엉겁결에 자리에 앉긴 했지만, 수정이는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오늘도 여지없이 '안녕하세용~' 하는, 되도 않는 개인기로 인사를 시작하는 리쌍샘을 보고도 평소처럼 웃음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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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바를 해야 할까. 수정이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홀써빙은 시급은 쎘지만 일이 고되고, 괜한 오해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술 취한 남자들이 불쾌한 짓들을 하는 때도 많다고 했다. 전단지 알바는 수정이도 해 본 적이 있었다. 일이 간단하긴 했지만 시급이 짰고, 일도 자주 없었는데, 무엇보다 수정이가 꺼림직 했던 건, 뭔가 일이 볼품이 없었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괜히 뒷골이 땡기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실제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동네 할머니에게 한 바가지 욕을 들어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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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가 보기에 꽤 그럴 듯한 알바는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깔끔한 제복에 하는 일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만 일하는 게 그냥 보기 좋았다. 시급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요일도 선택할 수 있고, 시간대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야자는 뺄 수 있었다. 수정이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0등에서 오르내리는 정도는 됐다. 정리의 힘이었다.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않고도 이 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담임샘은 무척 대견해 하셔서,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수정이가 야자를 빼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허락해 주셨다. 물론 엄마도, 전적으로 수정이를 믿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뭘 해도 늘 깔끔하게 마무리를 잘 해 놓는 수정이여서, 요즘은 오히려 엄마가 마음으로는 수정이에게 기대는 때가 많았다. 중학교 때, 3년 내내 여름방학마다 이어졌던 20일의 해외 어학 캠프도 혼자 다녀온 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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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맥도날드. 거기를 알아봐야겠어. 수정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리쌍샘이 소설을 건네 주었다. 무심결에 소설을 받았다가 수정이는 깜짝 놀라서 눈이 번쩍 뜨였다. / / / . 소설에 그 네 글자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다, / / / / , 이라니. 뭘까, 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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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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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해 봄 내가 새끼 밴 고양이처럼 독기를 품은 채 지켜내려 했던 것은 거추장스럽기도 했던 순결과 있으면 성가시고 없으면 아쉬운 가정과 하나쯤 사라진다 해도 표도 나지 않을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 안락한 미래와 교환될 수 있는 나의 '가치'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몸값'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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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수정이는 이 문장 앞에 주저 앉아 넘어가지 못했다. 새끼 밴 고양이까지는 아니어도, 수정이는 요즘 자기가 정말 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다. 수정이는 이미 주말에 예식장 부페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 9시간이 넘도록 종일 서서 그 무거운 접시들이며 유리잔이며 음식들을 나르는 게 정말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은 뭐 그리 음식들을 빨리도 먹고 많이도 버리는지 음식을 셋팅하고 테이블 사이로 그릇을 거두고 나면, 어느 새 음식이 텅 비어 있었다. 멀리 카운터에서 말쑥한 정장을 빼 입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점장은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낌새가 보이는 것 자체부터 싫어해서, 바로 밑의 매니저들을 자꾸만 불러 채근했고, 덕분에 알바생들은 더 빡빡하게 홀을 뛰어 다녀야 했다. 독서실에서 하루 밤새면서 공부하고 오겠다고, 그렇게 토요일 새벽에 나와서 이틀을 꼬박 알바를 하고 나면, 나름 여고생 치고는 체력이 좋다고 자부했던 수정이도 너무 피곤하고 팔다리가 쑤셔서 돌아온 독서실에서 다시 책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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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이는 없는 힘을 짜 내어 책상 앞에 앉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모자란 공부를 마저 했다. 절박했다. 완전히 공부에만 몰입할 수 있는 여건에서 완전히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완전히 대단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수정이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수정이가 그렇게 살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사실 그 절박함은 불안함이었고, 근본적으로는, 두려움이었다. 수정이는 두려웠다. 지금의 이 생활도 유지할 수 없을까봐, 그래서 수정이의 인생마저 추락하게 될까봐서. 돈은 지금 당장 필요했지만 성적은 더 지금 당장 필요했다. 그것도 더 많이 필요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성적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것이 몰락해 가는 집안에서 수정이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수정이가 가진 유일한 가치였다. 뉴스에서 몰락, 추락 운운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정말이지, 지금의 생활만이라도, 수정이는 사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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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불안함과 두려움이 시작되었던 것은 아마도 중 3 겨울방학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즈음부터 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술을 잘 못 먹는 아빠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는 침대에 쓰러지듯이 자는 날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진작에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엄마도 왜 그런지 그 즈음부터는 아빠를 가만히 두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옷을 힘들게 힘들게 벗겨 잠옷으로 갈아 입힌 다음, 조용히 안방을 나와 손님방에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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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도 아빠에게 그리 많은 걸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빠는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건실한 가구공장 사장님이었고, 15명이나 직원을 두고 있었고, 사업을 할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다며 3년엔가 한 번씩 자가용을 바꾸는 사람이었다. 지금 수정이네가 살고 있는 신도시의 52평 아파트도 아빠의 한 마디로 이사오게 된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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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이곳에 이사오려던 때,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가 아빠에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걱정하는 말을 건넸던 것을 기억한다. 아빠는 짧게, 괜찮아, 그 정도는 돼, 라고 말했다. 뭐가 어떻게 무리라는 것인지 그 때 수정이로서는 정리가 안되었지만, 엄마의 불안함이 전해져 수정이도 무언가 걱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집에 이사오던 날, 학교를 마치고 엄마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 와 엘리베이터로 12층에 내려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점점 커져가던 수정이의 두근거림은 베란다 커튼을 여는 순간 빵 터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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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호수를 품은 커다란 공원과 그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가 저물어가는 노을빛에 노랗게, 빨갛게 가득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정말 예쁘고, 정말 시원했다. 아빠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진짜 고마웠다. 수정이는 신나게 이 방 저 방을 구경했다. 방이 다섯 개였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아빠였기에, 사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수정이와 엄마 둘 뿐이라 할 만했다. 그러니까, 그 방들은 다 수정이 꺼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는 공부방, 여기는 옷방, 여기는 책방, 여기는 이벤트방, 여기는... 방마다 재밌는 것들을 가득 채워 놓고, 좀 지루해질 때마다 방을 바꿔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정이는 정말, 신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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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팔겠다고 나선 것은 엄마였다. 아빠가 술에 잔뜩 취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 한 달 째 거듭되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엄마는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앉은 자리에서 아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정이는 불안했다. 엄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며, 바깥 일은 내가 한다니까! 하고 소리를 지를까봐 무서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빠는 엄마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콩나물국 한 숟갈을 조용히 떠 마셨다. 그리고 탁, 숟가락을 놓더니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무셨다. 아빠, 우리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 피면 안된다고... 수정이가 말을 마저 하려 했으나, 엄마가 수연이의 어깨를 잡았다. 돌아본 엄마의 얼굴은 아빠의 뒷모습을 붙잡고 있었는데, 단단했으나, 무언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게 울음을 참을 때 엄마의 표정이란 걸 수정이는 알고 있었다. 어딘가, 우리 집이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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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머리부터 발끝까지 맥도날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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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여주는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맥도날드 매장의 메인을 지원한다. 해야할 일들이 훨씬 많았고 일은 더 고됐지만 여주가 성실히 일을 해 나가며 한 달을 보낸 어느 날, 맥도날드 매장 앞에서 전단지가 발견된다. 3세계 해방전선이라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지만 무언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이름으로 그 전단은 맥도날드를 비난하고 응분의 댓가를 운운하고 있었다. 단지 전단지 한 장일 뿐 무엇 하나 확정된 것이 없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은 더 위협적이었고, 매니저가 위험수당을 약속하자 실체가 없던 위험은 구체적인 실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전단지가 발견된 이후 맥도날드 매장의 모든 사람들이 더 강력하게 맥도날드화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예측가능하고 계산가능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행동은 기계처럼 자동화 되었다. 패티를 정확하게 굽고, 양상추를 정확하게 썰면서 그들은 더욱 표준화 되었고, 오직 맥도날드 시스템의 효율과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들의 차이는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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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는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무언가가 자신을 서서히 구석으로 몰아 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도록 무언가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기계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를 정확하게 정리해 두는 것은 수정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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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수정이 너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렇지. 뭐든 딱 떨어지게 정리하는 거, 나는 잘 하지도 못하지만, 잘 하고 싶지도 않아. 그건 왠지 나랑 안맞아. 내 방이 엉망이라고, 여자애가 무슨 방정리를 그렇게 안하냐고 엄마는 나한테 맨날 뭐라고 하지만, 사실 그 안에도 나는 나한테 맞게 정리를 나름 한 거거든? 내가 침대에 딱 누우면, 한 두 바퀴 정도 몸을 굴려서 닿는 거리에 내가 필요한 것들이 다 있지. 나름 인체공학적인 정리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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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토론 시간에 수정이의 불만을 듣고 미지가 말했다. 물론 미지는 수정이가 모둠토론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수다로 마구 늘어놓은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 것이 정말 고맙고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미지의 말에 수정이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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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그게 필요해서 하는 거야. 나도 정리를 꼼꼼하게 하는 거, 피곤해. 하지만 무언가 일을 하려면 정리를 잘 하는 게 꼭 필요해. 공부도 그래. 학교에서 배우는 거 잘 정리를 해 놓지 않으면 시험을 잘 볼 수가 없어. 그건 정말 너무 당연한 거야.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라구.”

아니, 이건 취향의 문제야. 그리고 정말 문제는 효율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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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표정으로 지원이가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요즘 들어 지원이는 뭔가 좀 분위기가 바뀌어서 예전보다는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가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면 역시 얼음공주답게, 되게 차갑게 말을 던지곤 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곧잘 같이 다니기도 했기에 지원이가 어떤 애인지 수정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더 수정이는 지원이의 차가운 대답이 좀 더 서운하고, 좀 재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지원이도 공부를 곧잘 하긴 했지만, 어쨌든 수정이보다는 못했다. 수정이보다 공부를 못하는 지원이가, 같은 소설을 읽고도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한 것 자체가 수정이는 자존심이 좀 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들어야 했다. 자기보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잘 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하나하나 따라하며 여기까지 온 수정이였다. 지원이의 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원이의 설명이 더 필요했다. 수정이는 상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취향이 문제라니, 정말 문제는 효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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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이 필요한 건 맞아. 누구든 비효율적인 일을, 정말이지 쓸데 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 진짜 죽고 싶을 거야. 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 문제는 취향이야. 선택이라구. 내가 선택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은 걸 무조건 하라고 하고, 효율적으로 하라고 하면, 그게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해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 수정이 너한테 효율적으로 교과서를 다 찢어 버리고, 효율적으로 모의고사 점수 낮게 받도록 하고, 그동안 노트 필기한 거 효율적으로 다 없엘 방법을 찾아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 즐거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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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 아니, 그게... 그건 좀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리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학생이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공부를 효율적으로 다 망치고 그만두라니. 그건 말이 안된다구. 정말 말이 안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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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의 목소리가 컸다.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컸다. 수정이도 말을 뱉고 나서 잠깐, 이렇게 흥분하는 자신이 낯설어 보일 만큼 컸다. 수정이는 이미 토론이나 발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떤 토론 시간에도, 어떤 적정한 수준의 감정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지면, 누구든 결국 흐트러졌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 사람을 되게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했다. 수정이는 프로가 되고 싶었다. 그 동안 잘 해 왔다고 자부하는 수정이었다. 그랬던 수정이가 오늘, 이렇게 흥분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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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가 이렇게나 흥분한 것은, 사실 지원이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 즐거울 수 있어? 즐겁냐고? 세상에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원래 공부는 재미가 없는 거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는 게 대단한 거다.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열심히 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하는 건, 정말 어려운 거니까. 그 어려운 걸 잘 해내는 사람이 인내력과 성실함과 우수함에서 인정을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난 지원이의 말, 알겠어. ... 정리하자면, 효율은 수단이고 취향은 목적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에게 더 당연해야 할 건 효율이 아니라, 취향인 거지.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효율은 의미가 없으니까.”

혜민이 말이 맞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그렇게 살면, 다 똑같아 져. 차이가 없어진다구. 여주의 가족들을 봐. 여주의 남친을 보라구.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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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똑같아 진다구? 혜민이이 말을 다 듣고도 수정이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지원이가 말한 여주의 가족과 남자친구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맥도날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수정이가 알바를 하게 될 지도 모를 그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인지 놀라서 정리를 해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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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는 세계 120여 개 국가에 무려 3만여 개의 매장을 있었다. 맥도날드의 영업준비는 세계 모든 매장에서 똑같단다.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하루에만 43백만 명이 넘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맛의 햄버거를 똑같은 방식으로 소비했다. 거기에는 인종과 언어와 종교와 이데올로기도, 성별과 나이와 신분과 계급도 없었다. 모두가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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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 똑같아 지는 게 뭐가 나쁜 거지? 이게 세계화 아닌가? 세계적으로 다 통할 수 있는 걸 배울려고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거 아닌가? 글로벌 인재라는 게 그런 거잖아. 맥도날드 안에서는 차이가 없어졌다잖아. 차이가 없으면 싸울 일도 없는 거잖아. 그건 좋은 거 아닌가? 만약에 그게 좋은 게 아니라고 쳐도, 그럼 그 좋지도 않은 걸 사람들은 왜 똑같이 하는 거지? 대체 사람들이 똑같아 지는 이유가 뭐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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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수정이는 정리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지원이가 말한 여주의 남친과 가족이야기는 분명히 읽은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논리가 아니다. 주장의 근거를 대는 것이 논리다. 무엇을 주장하든 소설 안에서 근거를 찾아라. 리쌍샘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였다. 내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읽었나? 그래, 다시 읽어 보자. 수정이는 소설을 다시, 이번에는 정말 교과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늘 하던 것처럼 검은 색과 파란 색과 빨간 색의 볼펜으로 메모를 해 가며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수정이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그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에 갑갑해 졌다. 무언가 확정되지 않은, 그래서 더 갑갑한 불안함이 수정이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엄마 때문이었다. 아빠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정이 자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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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자유는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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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맥도날드화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의 의사소통은 단 몇 마디 말로도 가능해졌다. 각자의 어깨에 얹힌 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밥은?” “됐다.” 이런 식이었다. 맥도날드의 고객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나도 끼니는 스스로 장만해 먹고 알아서 치워야 했다. 모든 가사노동은 특정한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각자의 필요와 능력에 맞게 분산되어 효율적으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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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이건,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원래부터도 우리집은 그렇게 대화가 많은 집은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로 우리 집은 더 조용해졌다. 아주 간단하고 짧은 말들만이 오갔다. 아빠야 원래 말 없기로 유명한 경상도 출신의 남자라 그렇다 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많이 웃고 했던 엄마까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수정이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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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집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엄마는 우리 아파트를 여기저기 부동산에 내 놓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누가 전화를 하거나 집을 보러 오는 일은 없었다. 그날 아침 엄마가 우리집을 팔겠다고 했을 때, 수정이는 아니 이 좋은 집을 대체 왜? 하며 놀랐지만, 나중에는 이 좋은 집을 사겠다고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게 벌써 1년 전이었다. 이제는 수정이도 좀 조바심이 나서, 예전에는 있는 지도 몰랐던 부동산 사무실들을 눈 여겨 보며 A4 용지로 붙어있는 알림판들을 살폈다. 들여다봐도 그게 무슨 소린지 명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1년 여 동안 지켜보자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집값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우리가 이 집을 산 가격보다도 더 떨어져 있었다. 정리하자면, 손해였다. 그것도 아주 큰 손해. 이건 정말,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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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을 살 때 은행에 빌렸던 돈도 다 갚지 못한 상태였다. 언젠가 엄마를 따라 은행에 갔다가 엄마가 상담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수정이에게 통장정리를 시켰었다. 띠디딕, 띠디딕, 띠디딕 하는 소리가 한참 나고 다시 나온 통장을 무심결에 펴 봤다가 수정이는 백 팔십 구만 사천 이백 오십 삼원이 매달, 은행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큰 돈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큰 돈이었다. 그 큰 돈을 은행에 내고도, 어떻게 별 일 없이 살림을 해 오실까 문득 엄마가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찾은 엄마는 은행원과 상담중이었다. 엄마의 머리 위로 <담보대출>이라는 팻말이 크게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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