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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완)

머리카락을 기를 '자유'(완결) A4-10매.

머리카락을 기를 "자유"

 

 

  여름방학의 보충수업도 끝을 향해 달려갈 무렵, 학교에서는 또 두발검사를 한단다. 아니 도대체 시대가 어느 시댄데 아직도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고 애먼 친구들에게 화는 냈지만, 정작 날짜가 다가올수록 미지는 고민이 되었다. 지난 6월 검사에서 이 정도의 머리는 통과되었는데 이번 검사에서는 어떨지. 항상 말로는 어깨에 닫기만해도 교칙위반이라며 으름장을 놓지만 정작 검사가 시작되고 나면 훨씬 헐한 기준에서 검사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지레 겁먹은 아이들만 바보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확 자를까?"

"안돼, 어떻게 기른 머린데."

"통과 못하면 부모님 소환!" 

"이번에 자르면 또 몇 달을..."

 

  갈팡질팡하는 미지를 보다못해 얼음공주 지원이가 나선다.

 

"개기지도 못할 거면서 그냥 잘라. 그리고 맘편히 공부나 해."

 

  아니, 같은 말도 좀더 듣기 좋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쟤는 꼭 저런 식이더라. 그러니까 같이 밥 먹을 단짝 한 명이 없지.

 

"머리를 자르면 공부가 잘 돼? 나는 더 신경쓰여서 못할 거 같은데?"

"잘 되지. 깔끔하니 덥지도 않고, 선생님들한테 불려다닐 일도 없고, 거울보고 멋내는 시간만 줄여도 외울 수 있는 단어가 몇 갠데."

 

  하,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를 예쁘게 꾸미는 시간을 영어 단어 몇개와 교환해야한다니. 이것이 여고생의 삶이란 말인가. 리상쌤은 활짝 핀 복숭아꽃을 보여주면서 너희들이 봄이라며 봄은 꽃피어야 하는 시기지 열매맺는 시기가 아니라 하셨는데. 꽃이 활짝 피어야 여름되면 잎파리도 무성히 달리고 그래야 가을되면 열매도 실하게 맺는 거라며 청춘을 즐기라 하셨는데. 

 

  갑자기 리상선생님이 보고 싶어진 미지는 교무실로 한달음에 내려간다. 담임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리상쌤 옆에 앉기 성공! 

 

  "쌤, 머리 자를까요? 말까요?"

  "그거야 니가 알아서 하는 거지. 니 머리잖아."

  "이번엔 분위기가 어때요? 검사 빡세게 한대요?"

  "그런다고 한 것 같은데."

  "선생님이 좀 말려주세요. 이게 뭐에요? 뭐가 봄이고 뭐가 꽃이에요."

  "꽃은 스스로 필 때 꽃이라던가..."

  "아, 선생님 왕실망. 뭐라도 답을 주셔야죠."

  "두발검사라, 그런 건 언제 처음 시작되었을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두발검사의 역사. 아 다음 시간에 배울 소설은 김승옥의 <역사>로구나!"

  "아! 선생님. 그게 그 역사가 아니잖아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이번 시간 배울 소설은 김승옥의 <역사力士>다. 김승옥이 누군가.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의 그 변태같은 작가 아닌가. "안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같은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람. 언제 오글 터지는 대사가 나올까 미간을 잔뜩 찌푸려가며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는 읽을 만했다.

 

  시작은 다소 시시껄렁하다. 이젠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액자식 구성에 천장의 무늬며 벽지 이야기 따위를 하다가 한 페이지를 다 보낸다. 별다른 건 없구나 이젠 리상쌤도 감이 좀 떨어지셨나봐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내 시선을 잡아끄는 문장이 툭 튀어나온다.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

 

  나를 개새끼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낙서를 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 낙서부터 읽고 ‘그래, 맞아. 나는 개새끼였지.’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루를 버텨갈까. 그리고 그 문장을 믿음직스럽게 여기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는 걸까.  

 

  문장이 다소 자극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호기심 촉수는 이 지점부터 격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친구의 호의에 힘입어 양옥집으로 이사오기 전, 나는 창신동이라는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 열 살짜리 딸을 호되게 때리는 절름발이 사내, 이름을 바꾸면 운명도 바뀔 거라고 믿는 순진한 창녀, 영자. 그리고 문제의 역사, 서씨. 이들이 창신동이라는 공간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이다. 매일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술집과 술집 사이에 놓여진 비가 새는 판자촌. 방문이 드륵 열리면 삼일은 머리를 감지 않은 ‘내’가 부스스한 떡진머리와 눈꼽 낀 얼굴로 으응? 하고 반응할 것 같다. 더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다.

  이런 공간을 내버리고 근사한 양옥집으로 이사를 갔으면 깔끔하게 잘 살면 될 텐데,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양옥집은 어떤 면에서는 창신동보다 더하다. 그곳은 오후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곡명은 언제나 ‘엘리제를 위하여’. 도무지 어긋남이라고는 모르는 학교의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답답함이 턱밑까지 차오를 지경이다. 내가 너무 감정이입을 했나.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살 난 아이까지도 일어나야 하고, 열 시에 미싱 소리, 열두 시에 라디오, 네 시에는 엘리제를 위하여. 늦어도 오후 여섯시 반까지는 모든 가족이 집에 와 있어야 하고 밤 열 시에는 보리차를 한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마치 노력파 모범생의 방학생활계획표 같지 않은가? 근사할 것만 같았던 양옥집의 삶은 한 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생활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할아버지는 또 어떤가?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 담임선생님의 향기를 느겼다. 잠깐 동안의 일탈조차 없었을 것 같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모습의 모범 공무원 아니신가. 덕분에 우리반은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다른 반 아이들과는 다르게 눈썹 휘날리게 뛰어야 하지만, 또 그때문에 5교시 수업 때마다 들어오시는 선생님들께 무한 칭찬을 받고 있지 않은가. 1학기 말에는 전교에서 출결이 가장 좋은 반으로 뽑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도 받았다. 배가 좀 아파도 참다보면 참을만 하더라는 것은 작년에는 몰랐던 깨달음이었다.

  그럼에도 고개가 갸우뚱 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담임선생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자이시고 다방면으로 모범적인, 예부터 전해오는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스승님. 글자 그대로다. 학급 내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자들을 교무실로 불러 한명한명 면담을 하는, 그런 선생님이 요즘 어디있단 말인가. 물론 긴 면담의 결과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높은 인격과 바른 인성에 감화되어 고개 푹 숙이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오기 일쑤지만 말이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가끔 선생님의 두 딸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이런 분을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어떨까.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엄마'가 아닌 "어머님"이라고 호칭하진 않았을까? 투정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공부도 곧잘 할 테고. 그 아이들의 삶은 행복할까? 엄마를 얼마나 사랑할까?

  그에 비하면 리상쌤은 깃털처럼 가벼우신 분이다. 좋게 말해서 가볍다고 했지, 경박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가끔씩 멋진 말을 진지하게 하려고 분위기를 잡을 때에도 그다지 어른같지는 않다. 반장을 '반장님'으로 주번을 '주번님'으로 호칭하는 선생님이니 뭐 말 다 했다. 그 반장님의 아이스버킷챌린지 지목에 당황하시거나 화내실 법도 한데, 당장 교무실 얼음을 다 털어와 뒤짚어 쓰는 모습이라니. 2년을 지켜보면서 권위적인 모습이라곤 본 적이 없다. 덕분에 리상쌤네 반 애들은 매일매일 자유를 만끽하며 우리 반의 부러움을 산다.

  그럼에도 문제는 있다. 호강에 초친 것인지 리상쌤네 반인 지원이는 자신을 둘러싼 온갖 자유에도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다. 지원이의 불만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일사불란 하지 못하다는 것. 학급에서 뭔가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는 탓에 아이들이 혼선을 빚는다는 것이다.

  지난 봄소풍 때의 일이었다. 학년 전체가 일괄적으로 소풍을 갔던 1학년 때와는 달리 2학년 때에는 학급 별로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반의 경우에는 너희도 이제 세련된 문화생활을 즐길 때가 되었다는 담임선생님의 고언 아래 대학로로 뮤지컬을 보러 가게 된 것이었다. 막상 지하철을 타보니 우리 반 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도 여럿 와 있어서 우리만 세련된 경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좀 씁쓸하였지만 그럼에도 오명가명 다른 반에 친한 친구들과도 즐겁게 떠들었고 처음 관람하게 된 뮤지컬이라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지원이네 반 같은 경우에는 소풍 가기 한달도 더 전부터 들썩들썩 시끄럽기만 했다는 거다. 

  리상쌤은 우선 반 아이들에게 소풍장소를 추천해보라고 했단다. 학급회의 시간 한 시간 동안 난상토의가 벌어진 결과 놀이동산 가기, 대학로 공연 관람, 한강고수부지, 해돋이공원 방문같은 놀기 좋은 장소부터 서울 지역 대학탐방, 역사박물관 견학, 미술관 관람 같은 학습 친화적인 장소를 거쳐 청량산 및 문학산 등반, 1박 2일 캠핑카체험, 해병대 캠프 참여 같은 극기코스를 지나  찜질방 투어, 인천지역 맛집 탐방에 이르기까지 등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의 숫자 만큼이나 다양한 의견들이 튀어나왔단다. 보통은 이 지점에서 멈춰지기 마련인데, 웬걸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다양한 코스가 나온 것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던 리상쌤은 각 코스별로 희망자들을 두 명씩 받아 사전조사를 하라고 하신 거다. 그 말에 겁을 먹은 놀이동산과 한강고수부지, 캠핑카체험과 해병대 캠프가 떨어져나갔다. 남은 장소들 중 네 곳이 정해진 시간 안에 보고서를 내지 못하였고 처음 두 명씩이었던 사전조사원은 네 명씩으로 늘어나 해돋이공원팀과 대학탐방팀, 청량산 팀과 찜질방 팀 등 4팀으로 분배되었다. 소풍 가기 2주 전 학급회의 날, 총 4팀이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파워포인트까지 만들어와서 발표를 하던 아이들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으며 그 진지함 만큼 1차 투표가 끝난 뒤의 허무함은 컸다고 한다. 과반을 얻은 장소는 없어서 결선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 팀은 학교생활기록부에 쓸 거리가 생긴다는 점을 부각시킨 대학탐방 팀이었고, 두 번째 팀은 그냥 눈 딱 감고 올라가기만 하면 일찍 끝마치고 많은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등산 팀이었다. 팀장들의 치열한 코스 홍보가 이어지고 이루어진 2차 투표의 결과 조기퇴근을 명분으로 내세운 등산 팀이 승리한 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주말을 이용해 사전답사까지 다녀왔다던 대학탐방 팀의 팀장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리상쌤이 그 아이를 따로 불러 다독이면서 갈등은 봉합되었으나 대학탐방 팀을 지지했던 학급 내 우등생 그룹은 등산 내내 울상이었단다.

  자신이 대학탐방을 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학급의 모든 일이 이런 식이라는 지원이의 푸념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담임선생님의 카리스마에 눌려 정작 상담하러 가서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오는 나로써는 리상쌤네 반이 상당히 부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딱 한 달 정도만 지원이와 내가 반을 바꿔보면 어떨까.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나는 다시 카리스마 넘치는 담임선생님을 원할까? 지원이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그리워하게 될까?  

  자장면이냐 짬뽕이냐의 쉽지 않은 선택처럼 어느 한쪽을 차지하면 나머지 한쪽이 그리도 커보이는 것에 불과할까? 짬짜면처럼 효율적인 절충은 일어날 수 없는 걸까?

 

 

자유에서 자율로

 

  소설 <역사> 속 나도 정해진 결론을 내놓지는 못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기타를 칠 수 있고 그 기타 소리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드는 창신동,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안정된 미래와는 그 거리가 꽤 멀다. 그렇다고 안정된 내일을 위해 오늘 하고 싶은 것들을 내일로 미루는 삶이 행복할까? 내일이 오면 어제 못다한 것들을 할 수 있을까?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학원숙제처럼, 내일에는 또 내일의 과제가 내 앞에 던져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 나는 이 집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이내 그것이 처음 보는 경치에 보내는 감탄과 같은 성질의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알았다. 이해와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이 가족의 계획성 있는 움직임, 약간의 균열쯤은 금방 땜질해 버릴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는 전진적 태도, 무엇인가 창조해 내고 있다는 듯한 자부심이 만들어 준 그늘 없는 표정-문화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희구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사람들은 매일매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느 지점과의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이것은 나의 그들에 대한 이해였다.

  그러나 그 어느 지점이 무한하게 먼 곳에 있을 때도 우리는 그들이 거리를 단축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나로 하여금 기타 켜는 시간의 제약까지를 주어 가면서 말이다. 차라리 이 사람들의 태도야말로 자신들은 걷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매일매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그 끝없는 공전(空轉)같아 뵈던 생활이 이곳보다는 오히려 더 알찬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나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어느 쪽인가 한편이 틀려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몹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본질적으로는 두 쪽이 같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의 내부 한쪽에서 솟아나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고 가는 ‘어느 쪽인가 한편이 틀려 있다.’ 라는 집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발전하여, 미리 그러기로 되어 있었다는 듯이, 나는 이 양옥의 식구들 생활을 빈껍데기에 비유하고 있었다. 빈껍데기의 생활, 아니라면 적어도 방향이 틀린 생활, 습관적인 생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나를 끌고 갔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잘라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없던 반항심도 생겨나는 느낌이다. 머리길이와 성적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이후 벌어진 자유토의 시간에서 나는 또 한번 고민에 빠져야 했다.

  "그렇다고 두발을 완전 자유화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학생으로서 지켜야할 선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퍼머나 염색 같은 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튀고 싶어하는 애들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삭발머리라든지, 스킨헤드 같은 헤어스타일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어요."

  따지기 좋아하는 혜민이의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완전삭발을 한 애가 나와 같은 학교에 있다는 건 좀 끔찍하다. 더군다나 스킨헤드라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도 가야하는데 그런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왠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리상쌤이 나선다.

  "네. 아주 좋아요. 여러분 혜민이의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여러분은 모두 자유를 원하죠? 저도 그렇구요.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인간은 통제받는 걸 즐깁니다. 두발자유를 외치면서 혓바닥에 피어싱을 한 날라리들이 우리 학교에 오는 건 반대예요. 좀 모순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조금 단순화시켜서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중3이고, 고등학교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다. A학교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요. 펑퍼짐한 치마에 뿔테안경,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단발머리 여학생들이죠. 그곳에 입학하는 순간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건 당연한 이치예요. 빡빡한 교칙에 무시무시한 학주에, 그러나 그 학교는 대학입학 성적이 좋습니다. 그냥 3 년간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야하는 거죠. 그게 아니라면 B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당연히 남녀공학이고요. 멋진 남학생들도 많습니다. 언니들도 깔끔하고 세련되게 멋을 부리고요. 스킨헤드까지는 몰라도 퍼머나 염색을 한 언니들도 곧잘 보입니다. 적당한 핏의 교복은 너무 예뻐요. 문제는 그 학교의 대입성적은 그닥 좋지 못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중3이라면 어느 학교를 선택하실 겁니까?"

 

  뭔가 해결을 해줄까 싶었는데 역시 고민만 깊어지게 만드는 리상쌤이다. 저렇게 고민거리를 던져놓고 즐거워하는 표정이라니...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자. 나는 자유를 원하는가, 통제를 원하는가.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단어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 다시 써보자. 나는 안정된 미래를 원하는가, 불투명한 미래를 원하는가. 이것 역시 한 쪽만 이야기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유롭지만 미래가 다소 불안할 수 있는 사회, 안정되지만 끔찍한 통제를 받아야하는 사회. 뭐가 정답일까? 둘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제3의 선택일 뿐이다. 나라면 A학교를 가게 될까, B학교를 가게 될까?

 

  A학교에 간다고 해서 성적이 다 올라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냥 지치는 삶이다. 물론 나는 지금 우리 담임선생님을 존경하지만 그 분의 삶이 존경스럽다고 해서 나도 꼭 그렇게 살아야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내가 선생님의 삶을 존중하듯, 선생님도 내 삶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이야 입시라는 특별한 상황을 앞두고 경험많은 선생님의 결정을 믿고 대부분 순응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12년 내내, 혹은 직장에 가서라도 선생님같은 상사를 모셔야한다면 나는 분명 그곳에서 도망칠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 내가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것은 담임선생님이라는 '나의 발전을 위한 통제'와 리상쌤이라는 '자유로운 일탈'을 함께 맛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B학교에 간다고 해서 모두 좋은 대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통제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조절할 수 있다면 B학교는 훨씬 이상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 방학 때마다 짰던 생활계획표를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접하게 된 학습플래너는 나름 유용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시간을 내 스스로 계획에 맞춰 운영한다는 기쁨이 컸다. 실제로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플래너에 매달린 시간이 길기도 했지만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을 수정하며 진행도를 표시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즐거움. 그건 왜 즐거웠을까?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었을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낸다. 자율이다. 자율. 자율. 자율하면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야간자율학습이 떠오르지만 야간자율학습도 하고 싶을 때만 할 수 있다면 나름 즐겁지 않을까?

  결국 선택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인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제재를 받아야만 성장할 수 있는 수동적인 인간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능동적인 인간인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할아버지와 오빠의 말다툼

 

  할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다 지도자를 잘 만나서 그런 거라고. 방향만 잘 잡아주면 부지런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들 말 잘듣고 열심히들 하기 때문에, 지도자란 사람은 사소한 거에 신경쓰기보다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그렇게 그 사람 따라 모두 앞만 보고 달려서 우리는 지금처럼 먹고 살만해진 거 아니겠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어느샌가 나타나서 눈을 총총거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우리 오빠다. 할아버지 말씀을 내내 경청하던 오빠는 슬그머니 반론을 편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할아버지께서도 젊었을 때 엄청 힘들게 사셨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그렇게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열심히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한 사람 덕으로 가능한 거냐고.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론은 나지 않는다. 마치 서로 다른 주제를 얘기하는 사람들처럼 자꾸 동문서답만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 동문서답의 끝에는 할아버지의 흥분이 있고, 그 흥분을 뒤로 하고 오빠는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확 휘어잡는 담임을 만나서 성적이 오르면 그게 다 담임 덕이니? 그 담임 밑에서 네가 열심히 했기 때문인 거지."

  내 생각엔 이렇다. 할아버지가 살아온 길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빠가 한 얘기도 따지고 보면 다 맞는 말이다. 이래서 할아버지와 오빠의 실랑이는 오빠가 군대에 가기 전날까지도 계속됐었드랬지.

 

  문득 정치수업 시간도 생각이 난다. 정치쌤의 말로 대한민국은 세계역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나라란다. 남들은 수백년에 걸쳐 엎치락뒤치락 해가며 이룩한 것들을 50년도 안되어서 다 해버렸다고. 이렇게 눈부신 경제성장을 한 나라는 드물고, 이렇게 빠르게 민주화를 완성시킨 나라도 드문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사실 그 두 가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건데 우리는 서로 싸움만 하고 있다고. 경제성장은 민주화를 공격하고, 또 민주화는 경제성장을 공격하고. 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공을 치하하며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건지. 느끼한 자장면과 얼큰한 짬뽕국물은 함께 있을 때 완벽한 건데!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이 어려운 선택을 두고 짬짜면을 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개스럽지만, 그래도 선택은 해야하지 않겠나.

 

 

  이렇게까지 생각이 퍼지다보니 문득 이 소설의 제목이 <역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어찌보면 사람들의 역사(歷史)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성적을 올리고 싶은 마음과, 너그러운 선생님 밑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마음. 그 두 마음은 분명 내 안에도 공존하고, 엎치락 뒤치락 서로 힘겨루기를 한다. 나는 리상쌤네 반인 지원이를 부러워하지만 정작 지원이는 그런 선생님이 못마땅하다. 내가 리상쌤 반이 된다면, 지금처럼 선생님을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소설 <역사> 속 나는 창신동의 생기넘침을 그리워하면서도 끝끝내 양옥집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결국 자유보다 빵을 선택하기가 쉬운 걸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도 고민은 끊이지 않는데 하나의 집단, 이를 테면 국가 같은 거대한 집단이라면 어떨까? 한 편에는 좀 더 많은 자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고, 반대 편에는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성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입장은 마치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처럼 밀고 당기며 싸움을 하겠지. 그 싸움의 기록을 '역사'라고 이름붙일 수 있지 않을까? 좀더 많은 자유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의 생각, 자유를 다소 제한하더라도 일단 발전하고 보자는 사람들의 생각. 그 두 생각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움직여 온 것이야말로 인간의, 아니 인류의 역사가 아닐까? 

 

  이 소설, 무시무시하다. 아까부터 팔짱을 끼고는 혼자 피식피식 웃고 있는 리상쌤의 속마음도 훤히 보이는 것 같다. 빨리 결론을 내리라고 독촉하는 듯한 저 가늘게 뜬 눈! 아~ 정말! 이럴 때는 얄미워 죽겠다!!!

 

  소설에서 '역사'인 서씨는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다. 서씨의 반대편에는 누가 있을까? 할아버지? 아니다. 서씨의 상대는 며느리다. 남들은 갖지 못한 재주? or 능력? 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하지만 능력을 대하는 두 사회의 태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서씨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돈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돈에 팔고 싶은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서씨는 그 능력을 자기 안에 가둔다. 그리고는 모두가 잠든 통행금지 시간에 찬란한 조명이 비치는 동대문 위에서 마음껏, 힘을 뽐낸다. 이 은밀한 일을 행할 때 서씨의 눈에서는 총총한 빛이 났다. 서씨는 이것을 '즐기고' 있다. 왜냐고? 서씨는 이 비밀스러운 일을 스스로 계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옥집에서는 어떤가. 며느리가 가지고 있는 피아노 실력은 예술 감각이다. 예술이란 걸 하려면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액체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 떨어지는 포도당이 아니다. 평소에는 바짝 말라버렸다가도 어느 순간 왈칵 쏟아져버리곤 하는 게 감정 아닌가? 오후 네 시만 되면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고, 곡이 끝나갈 즈음에는 어느 정도의 감정도 담겨있을 법한 허밍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어김없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매번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 어떻게 매번 일정한 양의 감정을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양옥집에서는 감정의 오르내림조차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듯한 느낌이다.

  포식자들에게 둘러싸여 위태로울 순 있지만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는 하늘을 가진 새가 서씨라면 매일매일 같은 모이를 받아먹고 주인에게 예쁜 소리만을 들려주어야하는 새장 속에 갇힌 관상용 새가 며느리였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가고 싶으냐고? 아직도 그걸 몰라서 묻는 거예요?

 

 

  왜 하얀 벽지일까

 

  "네. 여러분의 생각이 다 옳습니다. A학교에 가서 성적을 올리겠다는 사람을 비난할 수도 없고 B학교에 가서 자유를 누리겠다는 사람을 만류할 수도 없습니다. 선택은 결국 본인의 몫이니까요. 어느 하나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어요. 소설에서 그런 것처럼요. 무책임하다구요? 뭐, 어쩔 수 없죠. 문학은 답을 내리는 게 아니라고 또 한번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지겹겠지만, 사실이 그런데요, 뭐."

  "대신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이 소설은 잠에서 깬 내가 하얀 벽지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벽지이야기, 천장의 무늬 이야기, 낙서 이야기. 왜 김승옥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소설을 시작했을까요? 좀 더 거창하고 규모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모둠 내에서 토의해보세요.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이, 환영합니다."

 

  또 시작이다. 저 얄미운 미소. 리상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 제일 생기넘친다. 생기? 결국 선생님도 자유를 누리고 계신 건가? 그럼 우리도 자율적으로 토의를 한번 해볼까? 어떻게들 생각하니?

 

  "그럼 정리를 한번 해보자. 한쪽은 자유롭지만 다소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고, 한쪽은 안정되었지만 자유가 통제되는 사회야. 우리 모둠 내에서는 의견이 2:2로 갈렸어. 단비랑 미지는 자유를 택했고 나랑 지원이는 안정을 택했지. 이 소설은 단순하게 한 남자의 하숙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회, 혹은 국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해석까지 나왔어. 이쯤에서 생각해볼 질문이 그거야. 왜 김승옥이 벽지나 천장, 낙서 같은 것으로 소설을 시작했을까 하는 거. 의견들을 내봐."

  정리왕 수정이가 역시 정리질이다. 이젠 수정이의 정리멘트가 없으면 수업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하, 인간의 적응력이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작할 때 가볍게 시작하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않을까? 시작부터 어려운 이야기가 막 나오면 읽기 싫어지거든." 단비의 의견이다.

  "좀 단순하지 않니? 그래도 뭔가 더 있을 거 같애. 우리 담임 표정봐라." 지원이가 특유의 썩소를 날리며 말했다. 

  "나는 국가 이야기를 좀더 해보고 싶어.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70년대에 눈부신 성장을 했어.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국가가 나서서 성장을 주도했지. 한편에서는 독재라고 비판도 많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장시킨 건 인정해줘야하지 않을까? 지금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엔 같은 이야기야. 왜 중국엔 아직도 사형제도가 있잖아. 강력한 통치가 발전엔 도움이 된다고." 수정이의 의견이다. 

  "근데 그건 좀 이상해. 어느 나라나 성장하고 싶을 텐데 독재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왜 다들 독재를 하지 않는거야? 그리고 독재하면 북한이 제일 유명하잖아. 근데 북한은 왜 그렇게 못살아?"

  "음... 그건..."

  미지의 질문에 수정이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곤 잠시 침묵. 이 어색한 침묵의 뒤에는 슬그머니 나타나는 사람이 꼭 있다.

 

  "아주 재밌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네요. 왜 그럴까요? 왜 다들 독재를 하지 않을까요? 발전을 하기에는 기막히게 좋은 조건인데."

  "독재는 나쁜 거잖아요. 막 탄압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나쁘죠. 하지만 의견을 통일하기 어려울 때는 누가 끌어가주는 게 좋잖아요. 당장 배가고파 죽겠는데 뭘 시켜 먹을까. 미지는 중국음식이 먹고 싶고, 수정이는 떡볶이가 먹고 싶고, 지원이는 피자가 땡겨요. 그런데 단비는 다이어트를 해야한단 말이죠. 각자 1표를 가지고 무엇을 먹을 지 토론을 시작한다면 여러분들은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요? 결국엔 누군가가 양보를 해야할텐데 양보한 사람은 마음이 좋을까, 그것도 생각해봐야죠."

  "정리하자면 독재는 이런거네요. 나는 떡볶이가 먹고 싶으니까 그냥 오늘은 떡볶이 먹자. 매운 걸 싫어해도 어쩔 수 없어. 다이어트? 먹기 싫으면 돈만 내고 안 먹어도 돼.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주문 먼저 하는 거. 맞죠?"

  "아, 역시 정리왕 답습니다!"

 

  나는 창신동 빈민가에서 양옥집으로 이사를 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창신동은 지원이네 반이고 양옥집은 우리반이다. 리상쌤 밑에서 방만한 자유를 누려왔던 지원이가 우리반으로 왔다. 그후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반에서 맨 처음 만나게 된 게 하얀 벽지. 아, 기억이 난다.

 

  개학 첫날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는 한 시간 가까이 훈화를 하셨었다. 대학은 왜 가야하고, 꿈은 왜 가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을 어떻게 바꿔야 하고.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신 뒤에 맨 처음 하신 일이 칠판 옆 게시판에 너덜너덜 붙어 있던 동아리 모집 전단지들을 직접 치우신 것이었다. 그 이후로 그 게시판에는 너덜너덜한 무언가는 절대 붙어있을 수 없었다. A4용 하드보드지가 세 개 붙고, 그곳에 대입 관련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여갔을 뿐이다. 저녁 시간에 지원이를 보러 리상쌤네 반에 가면 칠판에 달라붙어 온갖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친구들이 보인다. 리상쌤을 웃기게 묘사한 그림들부터 친구들을 놀리는 낙서, 노래 가사를 빼곡히 적고 있는 애. 리상쌤네 반은 그게 허용되는데 우리반은 왜 안될까? 나는 그림그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단비 같은 경우에는 그림을 잘 그리니까 칠판에다 그림을 그리면 다들 좋아할 텐데. 연습장에 그리는 것보다 칠판에다 그리면 단비도 훨씬 즐거워 할텐데. 단비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지원이는 음악듣기를 좋아하고 수정이는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만, 나는 뭘 좋아하지?

  번뜩 생각나는 게 없다. 나는 원래 좋아하는 게 없었나? 내가 뭘 좋아했었지? 아니, 질문이 너무 이상하다. '내가 뭘 좋아했었지?' 라니. 뭘 좋아하는지는 지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쉽게 떠오르는 게 없지? 혹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잊어버리게 된 건가?

  무섭다. 소름이 돋는다. 만약 내가 독재자의 자리에 앉는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거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그 사람은 누구인지. 이런 것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린다. 앞을 향해 달리자. 어차피 자신이 누구인지는 다 지워졌을 테니 그들은 내 말을 잘 듣는다.

 

  지상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들 중에서 내가 나의 방을 구별해낼 수가 있다면 그 낙서로써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나만이 가진 것. 이것들을 뺏기면 안되겠구나. 미지는 문득 지난 주말에 잘라버린 까닭에 끝이 까실까실한 머리카락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 만지작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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