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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올로이(완)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수정1

사랑인 듯, ‘사랑아닌, ‘사랑같은...

레스터 델 레이, <헬렌 올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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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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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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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니.

나는 당연히 인간이다. 인간이니까 이런 수업도 듣는 거지.

고등학교 2학년 방과후 보충시간. 단편소설을 통해서 인문학을 배운다고 했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원이가 이 수업을 신청한 건 문제집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이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대단히는 아니라도 그럭저럭 먹고 살려면 대학은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원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그래서 문제집 수업이 마냥 싫고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 반복, 반복은 힘들다.

밥을 먹어야 하루를 산다지만 맨날 밥만 먹고 어떻게 살까. 지루하다. 사람은 배고파도 죽지만, 지루해서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떡볶이도, 쫄면도, 라면에 튀김도, 그래서 필요하다. 반복에서 오는 이 피로를 벗어나기 위해. 떡볶이도, 쫄면도, 라면에 튀김도, 일단은 좀 매워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뭔가 확실히 달라야 하니까. 그래야 반복도 다시 할 수 있는 거니까.

방과후수업 첫 시간의 그 황당한 질문과 함께 선생님이 우리에게 소설 한 편을 건넸다. 사랑이야기이며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로봇이 등장하는 SF 소설이란다. 하하 이거 참... 문학시간에 SF라니, 뭐 좀 유치하지만 나름 신선한데?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 가볍지 않았다. 좀 뻔해 보이는 SF로 시작했다가 당황스런 로맨스로 이어가더니 인간은 왜 로봇을 만드는 걸까 고민하게 하다가 인간과 사랑의 근본을 묻는 대단한 반전으로 소설은 끝이 났다.

소설을 다 읽고, 한동안 멍해져서, 정말 궁금했다. 로봇은 어디까지 로봇인가?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일까?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떡볶이와 쫄면, 라면에 튀김도 먹는 로봇이 있다면, 그 로봇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선생님과 열심히 싸웠던 단편소설은 레스터 델 레이의 <헬렌 올로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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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봇의 사랑고백  or  로봇이랑 썸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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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공학자 데이브와 호르몬-내분비 전문의사 필은 보다 편리한 가정부 로봇을 제작하기 위해 딜리어드 로봇회사의 최고급 가정부 로봇을 함께 개조한다. 쌍둥이 자매들과의 연애도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한 그들은 여성 인간의 모형 안에 기계와 회로를 다듬어 넣고 프로그램 기억 용량을 최대로 늘려 가정부에 적합하도록 만든다. 오류를 인식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는 로봇과 오류를 발견하면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인간의 차이에 대해 논쟁하던 그들은 호르몬 시스템을 정교하게 설치하여 로봇이 인간에 가까운 표현능력을 갖추도록 했다.

로봇에게 헬렌 올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로봇을 완성하여 구동하기 직전, 필은 자금 마련을 위해 출장을 떠난다. 부유한 고객이었던 반 스타일러 여사가 가정부와 바람난 아들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역호르몬 치료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3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두둑한 보수를 받은 데다 로봇 완성에 대한 기대로 집에 돌아온 필은 2층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며 괴로워 하는 데이브와 음식을 마련하고 눈물을 흘리는 로봇-헬렌을 보게 된다. 감정표현까지 가능한 완벽한 가정부 로봇을 완성한 것을 축하해야 할 때에 왜 그렇게 괴로워하느냐고 묻는 필. 그런데 데이브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헬렌이 너무 완벽한 것이 문제였다. 헬렌이 데이브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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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러웠다. 로봇이 사랑을 고백하다니. 애초에 데이브가 전원을 올린 헬렌을 텔레비전 앞에 남겨두고 작업실에 다녀온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텔레비전에서 낭만적인 연애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거기에 텔레비전과 함께 서재에 놓여있던 로맨스 소설이 진짜 문제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책을 통해 헬렌은 인간의 사랑을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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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에게 사랑고백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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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상샘이 물었다. 소설을 다 읽고, 모둠별로 토론주제를 선정하는 시간이었다. 지원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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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센치미터의 키에 몸무게 74키로, 장난끼 어린 명랑한 표정이지만 어느 순간에 반짝반짝한 눈으로 우리를 엄숙하게 오래오래 쳐다보는 문학 선생님은, 남자였다. 그게 중요했다. 이 정도 신체 조건에 문학을 가르치는 남자선생님이다보니 리상샘은 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뭔가 꽤나 어려워 보이는 제목임에도 이 강의를 선택한 애들이 많았던 건 분명 리상샘의 외모의 힘이 컸다. 하지만 지원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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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는 왜 그런지 리상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남자는 먼저 키빨이라고 하지만, 단지 키만 중요한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비례다. 얼굴 크고, 허리 길고, 다리 짧은 키다리를 상상해 보라. 비례가 엉망인 키는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비례는 지원이가 보기에... 좀 슬펐다. 슬픈 비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리상샘은 어느 순간에 가끔, 되게 슬픈 눈빛을 한다. 소설을 읽어주다가, 시를 읽어주다가, 수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슬픈 눈으로 책을, 우리를, 지원이를 보는 것이다. 지원이는 그게 싫었다. 부디 학교에서만큼은 즐겁게 있고 싶다. 안그래도 슬픈 일이 지원이에게는 이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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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기조차 힘든 그 슬픈 일들. 그런 일들에 비하면 사랑고백은 간단한 거 아닌가.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기란 물론 쉽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줄까, 어떻게 하면 받아줄까, 되려 나를 외면하지 않을까, 지금의 이 관계만이라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조마조마하고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쉬울까. 하지만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가 건네는 말은 쉽다. 사랑해. 우리집에도 배꼽을 누르기만하면 당장 사랑을 고백하는 곰인형이 있다.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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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하자면, ‘조건에 따른 반응이다. 곰인형이 너무 단순하다면 좀 더 섬세하게 조건을 배치하면 되겠지. 상대방을 센서로 관찰하는 거다. 눈동자의 크기와 눈꼬리의 움직임과 볼이 빨개지는 정도, 입가의 주름을 파악해서 상대방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사랑해요.

그건, 사랑고백이 아닌 거 같아. 우리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는 기계가 가능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한가를 따지는 거잖아.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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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많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고, 명랑한 분위기로 리쌍샘과도 친한 미지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래서 더욱, 지원이는 자기가 의기양양하게 전한 이야기가 단칼에 잘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 다시 당황한 지원이는(이 수업은 뭐 이리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란 말이냐..)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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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구.., 그래. 그럼, 그래서...사랑이 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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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말이 없었다. 지원이가 다시 의기양양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원이도 자기가 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정말 사랑이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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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헬렌은 데이브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며 그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려 한다. 그를 안고, 그에게 안기고 싶어서 자신을 외면하는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이 모든 것이 헬렌이라는 로봇에게 설정된 섬세한 조건에 따른 섬세한 반응이라는 건 지원이도 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섬세함이다. 우리는 나의 조건을 섬세하게 파악해서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  (예시) 그래, 그건 사랑이다. 그러니까 데이브와 필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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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내는 것과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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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는 데이브를 보고 필은 헬렌의 전원을 내리고 처음부터 설정을 다시 하자고 한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것이 마치 사람을 죽이는 일인 것만 같아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얼마 후 데이브는 로봇 제작에 회의를 느낀다며 자기 고향의 과수원으로 가 버린다. 홀로 남은 필은 헬렌이 자신을 로봇으로 받아들이게 하도록 애쓰지만, 어느 날 쇼파에 누워 숨죽여 울고 있는 헬렌을 발견하고 데이브에게 전화를 한다. 지금 전원을 내리고 헬렌을 다시 리셋하겠다고 말이다. 놀라운 것은 데이브의 대답이었다. 마침 자기는 다시 돌아오려고 짐을 싸던 중이었단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데이브는 헬렌을 데리고 자신의 과수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이브는 헬렌과 부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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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데이브는 결국, 헬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고 하지 않나. 그 온갖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를 우리는 온갖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에서 늘 보고 듣지 않나. 우리 모둠의 아이들이 여기까지 소설을 읽다가 흐뭇해 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지원이 역시 마음으로 끄덕이며 공감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이 찜찜한 게 뭔가 계속 불편했다. 뭐야, 이거. 이 소설도 무슨무슨 어린이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그런 이야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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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결혼 이후에 시작되는 이야기가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결코 행복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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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좋았는데 이것도 시시하네, 하고 생각할 즈음, 지원이는 이 소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이브와 헬렌의 사랑이야기로 시작한 아이들의 수다가 다른 로맨스 영화나 소설로 이어지다 갑자기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야기로 넘어가는 사이, 지원이는 아이들의 수다를 흘려 들으며 소설의 마지막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소설의 반전에 너무 놀라 지원이는 옆에 앉은 미지의 어깨를 자기도 모르게 찰싹찰싹 때리며 소설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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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세상에..., . 얘들아, 이거 봐봐, 이거 끝까지 읽어 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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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이돌 수다에 한참이던 아이들이 놀라며 지원이를 보았다. 지원이도 안다. 지원이는 그렇게 다른 친구들에게 나서서 이야기를 건넨 적이 없었다. 얼음공주라는 얼마간의 비아냥이 담긴 별명도 그래서 생긴 것이라는 걸 지원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이해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지원이는 같이 확인하고 싶었다. 지원이의 놀랍고도 진지한 눈빛에 아이들의 시선이 소설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들 너무 놀라서,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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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이 노인이 되어버릴 만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헬렌에게서 편지가 온다. 오늘 아침에 데이브가 죽었다는 것을 알린 헬렌은 자신도 염산을 먹고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편지를 한 것은 장례식을 하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로봇인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데이브의 무덤 곁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헬렌은 부탁한다. 놀라웠다. 데이브를 향한 헬렌의 마음이. 헬렌은 정말 데이브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하는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았을 때, 이렇게까지 함께 하려 할 수 있을까? 잠시 아득해 지려는 때에, 지원이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대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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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는 운 좋은 녀석이었고,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고 헬렌은......

글쎄, 아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보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어야 옳았을 듯하다.

하지만 세상에 헬렌 올로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랬다. 필도 역시 헬렌을 사랑했던 것이다. 데이브와의 우정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었지만, 필도 역시 헬렌을 사랑했던 것이다. 한 평생을 다 보내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내는 그 마음이라니. 지원이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원이는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원이가 더 아프게 아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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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의 아빠가 엄마를 만난 것은 17살이었다. 교회에서 만난 한 살 아래 동생이었단다. 아빠가 중3이던 해 겨울,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문학의 밤 행사를 준비하던 밤에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엄마를 아빠는 처음 보았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그리 대단할 만큼 예쁜 외모는 아니었는데, 엄마는 아빠에게, 정말 신기하게도 그 날만큼은, 잠시 천사가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뻤다고 했다. 아빠는 무슨 50대 아줌마들처럼,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첫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이 이야기를 처음 한다는 듯이 지원이에게 다시 들려주고는 했다. 이미 백 번은 넘게 들었다고 해도 아니, 이건 너한테 말 안한 건데하면서 꺼내놓는 아빠의 그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도, 매번 재밌었던 부분은 아빠의 정말 바보천치라 할 만큼 천진난만한 태도였다. 그 날 이후로 아빠는 엄마를 만날 때면 가슴이 두근대고, 얼굴이 빨개지고, 괜히 몸이 둥실 뜨고 그랬는데, 대체 자기가 왜 그런가 내내 궁금하기만 했단다. 그렇게 궁금해 하면서 2년을 보냈단다. 무려 2년이나!! 내 참.. 사람이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몸으로 그렇게 반응이 오는데도 자기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다. 그래, 그렇게 순진하니까, 결국엔 엄마한테 그렇게 당했겠지. 그래도 바보천치같은 아빠의 그 천진난만함이 지원이는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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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에, 아빠는 엄마와 이혼했다. 결혼한 지 7년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를 따라 대형 화물트럭 일을 배운 아빠는 곧 자격증을 따고 화물트럭을 몰았다. 주로 전자제품이나 기계부품을 나르는 일이었는데, 하루에 18시간 오래 운전을 해도 피곤한 줄 몰랐단다. 엄마랑 함께 사는 게 행복해서, 이 예쁜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고마워서 아빠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지원이와 한 살 아래 동생 지연이가 태어났다. 행복했던 것 같다.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웃었던 기억이 꽤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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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 일이 터졌다. 정리해고였다. 아빠는 대우자동차에 부품을 운반하는 일을 돕는 하청업체 소속이었는데, IMF 이후에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결국 아빠를 해고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은 엄마였다. 엄마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지원이네 집 근처에 있는 제과 공방의 아저씨였다. 어려워진 살림에 용돈이라도 벌자고 과자와 쿠키 만드는 기술을 배우던 엄마는 꽤 유명한 제과점의 파티쉐였던 그 아저씨와 눈이 맞았다. 그 다음은 뻔한 이야기. 얼마간의 긴장과 의심과 주저함의 시간을 넘어, 터질 듯한 고성과 분노와 절망과 체념을 거쳐 아빠는 엄마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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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원이에게 정말 가슴 아팠던 일은 그로부터 3년 후의 일이었다. 3년 동안 한 달에 한 두 번, 잘 참던 나와 내 동생이 엄마를 몹시 찾으며 우는 때에만 아빠의 호출로 우리를 보러 왔던 엄마가, 어느 날 동생을 데려갔다. 새벽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생의 빈자리를 보고 영문을 몰라 하는 지원이에게 아빠는 무언가, 내뱉는 말보다 더 많은 걸 꿀꺽 삼키는 듯이 말했다. 어서 학교에 가라. 그리고 그날 밤, 지원이가 좋아했던 생크림케익을 차려 놓고, 술에 잔뜩 취해 눈까지 빨개진 아빠가, 뭔가 더 많은 말을 가슴에 꾹꾹 눌러 놓듯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어. 이제 아빠는 지원이랑만 사는 거야. 재밌겠지? 그래, 그렇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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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지원이는, 그 큰 케익을 다 먹었다. 딸기가 반으로 잘라져 여섯 방향으로 누워있고, 오렌지와 포도가 그 사이를 채웠으며, 하얀 생크림이 발라진 면의 아래쪽에 사랑해요라는 쵸콜릿 팻말이 있던 그 케익을 지원이는 천천히, 다 먹었다. 다 먹고, 지원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지원이가 자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아빠가 방으로 돌아갈 만큼 충분히 시간이 흐른 뒤에, 아빠의 방문이 닫히고 낮게 흐느끼는 소리 뒤에 아빠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후에, 방 안이 고요함으로 가득 차 오르는 것을 다 지켜본 후에, 지원이는 울었다. 턱이 아프도록 이를 악물고, 부릅 뜬 두 눈을 감지도 못하고, 울었다.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울고 싶지 않았으나 계속 울음이 났다. 그게 분해서, ,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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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지원이에게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고, 아빠도 여전히 아빠였다. 지원이는 두 사람을 모두 사랑했다. 물론 동생 지연이도, 지원이는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했다. 엄마는 이제 아빠와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거 아닌가? 그럼 보내줘야지, 사랑하니까. 그래, 그래야 하는 거야. 그 날 이후 오늘까지, 문득 엄마와 동생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마다, 마음 저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가득가득 차오르려고 할 때마다, 지원이는 그런 말들로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말들의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미웠다. 왜 나는 데려가지 않은 거야.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은 걸까? 지원이는 엄마를 보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원이가 엄마를 보내기 전에, 엄마는 지원이를 버렸다. 엄마가 지원이를 버렸다는 그것이, 매번 가까스로 버텨냈던 지원이의 마음을 결국 무너지게 했다. 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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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은 어땠을까? 소설에서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지만, 필에게도 마음이 무너지는 날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밀어닥친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을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일이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오늘 지원이처럼, 사람들의 한 복판에서, 문득 그 아픈 것이 마음에서 시작되어 버렸을 때, 필은 어떻게 이걸 조용히 보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떠나 보내고, 필은 그 긴 세월을 대체 어떻게 지낼 수 있었을까? 지원이의 얼굴이 다시 차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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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간과 로봇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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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이 인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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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몰입하는 사이, 우리 뒤편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쌍샘이 갑자기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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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이 인간인가요? 로봇이 아니고? 어떤 주장을 해도 좋은데, 단 소설에서 근거를 찾아서 이야기해야 해요.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삐리비리비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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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가만히 질문을 듣다가 난데없이 이어진 리쌍샘의 로봇 흉내를 보고는, 이건 손가락 오그라듬이 경련 수준이라는 둥, 주먹을 부르는 개인기라는 둥 장난 섞인 말들을 건네며 함께 웃었다. 하지만 지원이는 심각했다. 뭔가 리쌍샘이 헬렌을 끌어 내리는 거 같아서, 당연히 알지도 못하겠지만, 왠지 지원이의 마음에 뭐라고 하는 거 같아서 발끈했다. 지원이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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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은 로봇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헬렌은 기계로 만들어져 있죠. 회로에, 기억장치에, 호르몬 역할을 하는 무슨 용액에, 아무튼 사람이 만든 기계인 건 맞아요. 하지만 헬렌은 데이브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의 곁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애썼고, 함께 살았고, 죽음까지도 함께 했잖아요. 그렇게 섬세하게,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건 인간도 잘 못하는 거잖아요. 헬렌은 물론 기계이고 로봇이지만,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랑할 줄 아는, 인간다운 기계라고 생각해요. 아니, 인간보다 더 인간다워요. 그러니까 그냥 로봇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로봇같은 인간이 세상에 널렸잖아요. 그럼 인간다운 로봇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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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원이의 논리 때문이 아니었다. 지원이의 감정 때문이었다. 지원이의 이야기에 서려 있는 날선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미지와 다른 친구들이 당황하며 지원이와 리쌍샘의 얼굴을 살피고 있는 사이, 혜민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 저도, 인간이 로봇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에서 보면 필이 스타일러 여사의 부탁을 받아서 가정부와 바람이 난 아들에게 역호르몬 치료를 하잖아요. 그 말은 호르몬을 조정하면 그 아들의 사랑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사랑이란 게 호르몬으로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럼 결국 인간도 기계랑 똑같은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도 다 그냥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하고 로봇같은 인간이 있겠죠. 로봇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인간다운 로봇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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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볼께요. ...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기준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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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복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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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는 크게 소리치며 말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마음속으로 답했다. 왠지 지금 입을 떼었다가는 지원이가 마음 안에 담아두었던 뜨것운 것이 울컥 하고 쏟아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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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하는 게 로봇이잖아요. 그게 기계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은 누가 시키는 대로 안할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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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이는 갑자기 머릿속이 핑~하며 하얗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질문이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이다. 혹시 헬렌은 마지막까지, 시키는 대로 한 것은 아닐까? 헬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이 있었나? 만약 그것까지도 프로그램에서 설정한 섬세한 반응이라면? 헬렌은 정말, 데이브를 사랑했을까? 세상에 만들어져서 스스로 기능을 정지할 때까지 처음에 주입된 프로그램대로, 헬렌은 그저 자연스럽게 명령을 따른 것은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나의 조건을 섬세하게 파악해서 섬세하게 반응하도록 설정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순간, 지원이는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자기가 했던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자기를 아프게 했던 기억들이,

그날부터 내내 자기 안에 남겨져 있던 감정들이 그 순간,

갑자기, 함께,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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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하지 않음에서 온다. 사랑의 놀라움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온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한 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나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살펴 진심으로 나에게 반응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한 사랑이란, 이 세상에 없다. 아니 적어도, 그것은 인간의 사랑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다. 이 세상에 사는 70억의 사람 중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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