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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도둑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 2/4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지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비밀주머니에 대일밴드와 빨간약을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도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하고 화나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오늘 함께 읽은 소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 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 바지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의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이 아닐까 싶어.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죽인 거나 다름없지.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