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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올로이(완)

레스터 델 레이. 헬렌 올로이

인간 같은 로봇, 로봇 같은 인간

레스터 델 레이, <헬렌 올로이> / 인간다움에 대하여

1.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황당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니.

나는 당연히 인간이다. 인간이니까 이런 수업도 듣는 거지.

고등학교 2학년 방과후 보충시간. 단편소설을 통해서 인문학을 배운다고 했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원이가 이 수업을 신청한 건 문제집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이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대단히는 아니라도 그럭저럭 먹고 살려면 대학은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원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그래서 문제집 수업이 마냥 싫고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 반복 반복은 힘들다.

밥을 먹어야 하루를 산다지만 맨날 밥만 먹고 어떻게 살까. 지루하다. 사람은 배고파도 죽지만, 지루해서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떡볶이도, 쫄면도, 라면에 튀김도, 그래서 필요하다. 반복에서 오는 이 피로를 벗어나기 위해. 떡볶이도, 쫄면도, 라면에 튀김도, 일단은 좀 매워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뭔가 확실히 달라야 하니까. 그래야 반복도 다시 할 수 있는 거니까.

방과후수업 첫 시간의 그 황당한 질문과 함께 선생님이 우리에게 소설 한 편을 건넸다. 사랑이야기이며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로봇이 등장하는 SF 소설이란다. 하하 이거 참... 문학시간에 SF라니, 뭐 좀 유치하지만 나름 신선한데?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 가볍지 않았다. 좀 뻔해 보이는 SF 소설로 시작했다가 당황스런 로맨스로 이어가더니 인간은 왜 로봇을 만드는 걸까 고민하게 하다가 인간과 사랑의 근본을 묻는 대단한 반전으로 소설은 끝이 났다.

소설을 다 읽고, 한동안 멍해져서, 정말 궁금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로봇은 어디까지 로봇인가?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떡볶이와 쫄면, 라면에 튀김도 먹는 로봇이 있다면, 그 로봇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선생님과 열심히 싸웠던 단편소설은 레스터 델 레이의 <헬렌 올로이>이다.

 

2. 로봇의 사랑고백

로봇공학자 데이브와 호르몬-내분비 전문의사 필은 보다 편리한 가정부 로봇을 제작하기 위해 딜리어드 로봇회사의 최고급 가정부 로봇을 함께 개조한다. 쌍둥이 자매들과의 연애도 그만두고 연구에 몰두한 그들은 여성 인간의 모형 안에 기계와 회로를 다듬어 넣고 프로그램 기억 용량을 최대로 늘려 가사노동에 적합하도록 만든다. 오류를 인식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는 로봇과 오류를 발견하면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인간의 차이에 대해 논쟁하던 그들은 호르몬 시스템을 정교하게 설치하여 로봇이 인간에 가까운 표현능력을 갖추도록 했다.

로봇에게 헬렌 올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로봇을 완성하여 구동하기 직전, 필은 자금 마련을 위해 출장을 떠난다. 부유한 고객이었던 반 스타일러 여사가 가정부와 바람난 아들이 제정신을 차리도록 역호르몬 치료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3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두둑한 보수를 받은 데다 로봇 완성에 대한 기대로 집에 돌아온 필은 2층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며 괴로워 하는 데이브와 음식을 마련하고 눈물을 흘리는 로봇-헬렌을 보게 된다. 감정표현까지 가능한 완벽한 가정부 로봇을 완성한 것을 축하해야 할 때에 왜 그렇게 괴로워하느냐고 묻는 필. 그런데 데이브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헬렌이 너무 완벽한 것이 문제였다. 헬렌이 데이브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로봇이 사랑을 고백하다니. 애초에 데이브가 전원을 올린 헬렌을 텔레비전 앞에 남겨두고 작업실에 다녀온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텔레비전에서 낭만적인 연애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거기에 텔레비전과 함께 서재에 놓여있던 로맨스 소설이 진짜 문제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책을 통해 헬렌은 인간의 사랑을 배운 것이다.

로봇에게 사랑고백은 가능할까요?”

리상샘이 물었다. 소설을 다 읽고, 모둠별로 토론주제를 선정하는 시간이었다. 지원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187센치미터의 키에 몸무게 84키로, 장난끼 어린 명랑한 표정이지만 어느 순간에 반짝반짝한 눈으로 우리를 엄숙하게 오래오래 쳐다보는 문학 선생님은, 남자였다. 그게 중요했다. 이 정도 신체 조건에 문학을 가르치는 남자선생님이다보니 리상샘은 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뭔가 꽤나 어려워 보이는 제목임에도 이 강의를 선택한 애들이 많았던 건 분명 리상샘의 외모의 힘이 컸다. 하지만 지원이는 아니다.

지원이는 왜 그런지 리상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남자는 먼저 키빨이라고 하지만, 단지 키만 중요한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비례다. 얼굴 크고, 허리 길고, 다리 짧은 키다리를 상상해 보라. 비례가 엉망인 키는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비례는 지원이가 보기에... 좀 슬펐다. 슬픈 비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리상샘은 어느 순간에 가끔, 되게 슬픈 눈빛을 한다. 소설을 읽어주다가, 시를 읽어주다가, 수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슬픈 눈으로 책을, 우리를, 지원이를 보는 것이다. 지원이는 그게 싫었다. 부디 학교에서만큼은 즐겁게 있고 싶다. 안그래도 슬픈 일이 지원이에게는 이미 많다.

고백하기조차 힘든 그 슬픈 일들. 그런 일들에 비하면 사랑고백은 간단한 거 아닌가 싶었다.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을 하기란 물론 쉽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줄까, 어떻게 하면 받아줄까, 되려 나를 외면하지 않을까, 지금의 이 관계만이라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조마조마하고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게 쉬울까. 하지만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가 건네는 말은 쉽다. 사랑해. 우리집에도 배꼽을 누르기만하면 당장 사랑을 고백하는 곰인형이 있다. I LOVE YOU.

소설에 나온 표현대로 하자면, ‘조건에 따른 반응이다. 곰인형이 너무 단순하다면 좀 더 섬세하게 조건을 배치하면 되겠지. 상대방을 센서로 관찰하는 거다. 눈동자의 크기와 눈꼬리의 움직임과 볼이 빨개지는 정도, 입가의 주름을 파악해서 상대방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사랑해요.

그건, 사랑고백이 아닌 거 같아. 우리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는 기계가 가능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한가를 따지는 거잖아.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웃음이 많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고, 명랑한 분위기로 리쌍샘과도 친한 미지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래서 더욱, 지원이는 자기가 의기양양하게 전한 이야기가 단칼에 잘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 다시 당황한 지원이는(이 수업은 뭐 이리 당황스러움의 연속이란 말이냐..)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물었다.

“.., 뭐라구.., 그래. 그럼, 그래서...사랑이 뭔데?”

“?......”

미지가 말이 없었다. 지원이가 다시 의기양양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원이도 자기가 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정말 사랑이란 뭘까?

소설 속에서 헬렌은 데이브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며 그가 좋아하는 것을 만들려 한다. 그를 안고, 그에게 안기고 싶어서 자신을 외면하는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이 모든 것이 헬렌이라는 로봇에게 설정된 섬세한 조건에 따른 섬세한 반응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섬세함이다. 우리는 나의 조건을 섬세하게 파악해서 섬세하게 반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그래, 그건 사랑이다. 그러니까 데이브와 필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겠지.

괴로워 하는 데이브를 보고 필은 헬렌의 전원을 내리고 처음부터 설정을 다시 하자고 한다. 그러나 데이브는 그것이 마치 사람을 죽이는 일인 것만 같아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얼마 후 데이브는 로봇 제작에 회의를 느낀다며 자기 고향의 과수원으로 가 버린다. 홀로 남은 필은 헬렌이 자신을 로봇으로 받아들이게 하도록 애쓰지만, 어느 날 쇼파에 누워 숨죽여 울고 있는 헬렌을 발견하고 데이브에게 전화를 한다. 지금 전원을 내리고 헬렌을 다시 리셋하겠다고 말이다. 놀라운 것은 데이브의 대답이었다. 마침 자기는 다시 돌아오려고 짐을 싸던 중이었단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데이브는 헬렌을 데리고 자신의 과수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이브는 헬렌과 부부로 살았다.

그랬다. 데이브는 헬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럴 수도 있지.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고 하지 않나. 그 온갖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서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를 우리는 온갖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에서 늘 보고 듣지 않나. 우리 모둠의 아이들이 여기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흐뭇해 하는 것을 보며 지원이 역시 마음으로 끄덕이며 공감했지만,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지원이는 뭔가 찜찜했다. 뭐야, 이거. 이 소설도 무슨무슨 어린이 동화처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그런 이야기였나?

지원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결혼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결혼 이후에 시작되는 이야기가 진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결코 행복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시작은 좋았는데 이것도 시시하네, 하고 생각할 즈음, 지원이는 이 소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이브와 헬렌의 사랑으로 시작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로맨스 영화나 소설로 이어지다 갑자기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야기로 넘어가는 사이, 지원이는 아이들의 수다를 흘려 들으며 소설의 마지막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소설의 충격적인 반전을 발견했다.

필이 노인이 되어버릴 만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헬렌에게서 편지가 온다. 오늘 아침에 데이브가 죽었다는 것을 알린 헬렌은 자신도 염산을 먹고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편지를 한 것은 장례식을 하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로봇인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데이브의 무덤 곁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헬렌은 부탁한다. 놀라웠다. 데이브를 향한 헬렌의 마음이. 헬렌은 정말 데이브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구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았을 때, 이렇게까지 함께 하려 할 수 있을까? 잠시 아득해 지려는 때에, 지원이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대사 때문이었다.

데이브는 운 좋은 녀석이었고,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고 헬렌은......

글쎄, 아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보다 이성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얻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나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어야 옳았을 듯하다.

하지만 세상에 헬렌 올로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머..세상에..., . 얘들아, 이거 봐봐, 이거 끝까지 읽어 봐봐.”

지원이는 흥분해서 옆에 앉은 미지의 어깨를 자기도 모르게 찰싹찰싹 때리며 소설을 내밀었다. 아직도 아이돌 수다에 한참이던 아이들이 놀라며 지원이를 보았다. 지원이도 안다. 지원이는 그렇게 다른 친구들에게 나서서 이야기를 건넨 적이 없었다. 얼음공주라는 얼마간의 비아냥이 담긴 별명도 그래서 생긴 것이라는 걸 지원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이해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지 지원이는 같이 확인하고 싶었다. 지원이의 놀랍고도 진지한 눈빛에 아이들의 시선이 소설을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들 너무 놀라서,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세상에...

그랬다. 필도 역시 헬렌을 사랑했던 것이다. 데이브와의 우정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었지만, 필도 역시 헬렌을 사랑했던 것이다. 뭐라고 더 말을 이을 수 없던 때에, 갑자기 미지가 더 놀랍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쌍둥이!!”

? 쌍둥이? 얘가 갑자기 무슨 요플레 떠 먹다가 머리카락 씹는 소리야...하려다 문득, 지원이도 놀라 소리쳤다. 쌍둥이!! 그랬다. 데이브와 필은 헬렌이라는 로봇을 만들기 전에 쌍둥이 자매와 연애를 했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들의 이상형은 아마도 같았던 것이다. 또 그들은 헬렌을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었으니까 헬렌은 데이브에게는 물론 필에게도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레스터 델 레이.. 이 작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어떻게 이런 배치를 할 수 있을까.

 

3. 헬렌은 로봇인가?

그렇게 놀라 떠드는 사이 어느 새 모둠토론 시간이 다 지나가 버렸다. 서둘러 우리는 리쌍샘이 말했던 대로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질문 2개와 그 대답을 만들었다. 그리고 리쌍샘의 안내를 따라 우리 모둠에서 이끔이 역할을 맡은 미지가 우리가 만든 질문을 선생님에게 전했다. 우리의 질문이 선생님의 노트북과 빔프로젝터를 통해 칠판 화면에 나타났다. 왠지 뿌듯했다. 아마도 다른 애들은 모를 듯한 저 질문의 해답을 우리만 알고 있다는 게 뭔가 싱글싱글 재밌었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이야기를 좀 더 놀랍게 전할 수 있을까? 수업 시작 전 모둠역할을 나눌 때, 지원이는 발표를 맡았다. 아이들 앞에 나선다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모둠 애들이 정리해 준 것을 그냥 읽으면 되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지금도 말을 길게 친절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내가 느낀 그 놀라움을 전해주고는 싶었다.

그런데 리쌍샘은 우리의 질문과 함께 다른 모둠에서 나온 질문을 정리하더니 다른 모둠에서 만든 질문을 가져가서 대답을 만들어 보라고 하신다. 이런...이건 뭔가 오류다. 지원이의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지원이는 내색은 안했지만 마음 한 편이 좀 불쾌했다. 괜히 혼자 들뜨다가 외면당한 거 같아서 싫었다. 그런데 또 리쌍샘에게는 유난히 고분고분한 미지가 웃으며 질문을 골랐다. 마음이 상해서 살짝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질문 하나가 내 귀에 들어왔다.

헬렌은 로봇인가?

당연히 로봇이지. 온 몸이 기계로 만들어져 있잖아. 회로에, 기억장치에, 호르몬 역할을 하는 무슨 용액에, 아무튼 사람이 만든 기계잖아. 그럼 당연히 로봇이지.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아닌데...이건 아닌데...’

그래, 맞아. 물론 인간처럼 보이기도 하지. 외모가 그렇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감정표현도 하니까. 하지만 그건 모두 설정된 거야. 이미 정해진 거라고.”

아니...아니야...그건 아닌데...’

.. 지원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미지가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에 속으로 반문을 하고 있던 지원이에게 물었다. 잠시 말하기를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지원이가 말했다.

아니야. 헬렌은 로봇이 아니야. 물론 헬렌은 기계로 만들어져 있지. 하지만 헬렌은 데이브를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의 곁에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애썼고, 함께 살았고, 죽음까지도 함께 했잖아. 그렇게 섬세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키려는 건 사람도 잘 못하는 거야. 헬렌은 물론 기계이고 로봇이지만, 사랑이 뭔지 아는, 사랑할 줄 아는, 인간다운 기계야. 아니,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기계이지. 그러니까 그냥 로봇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로봇같은 인간이 있는 것처럼 인간다운 로봇도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기준이 뭐죠? 소설에서 근거를 찾아서 이야기 해 보세요

어머나, 깜짝이야. 이야기에 몰입하는 사이, 우리 뒤편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쌍샘이 갑자기 우리 사이에 끼어들며 물었다. 아이들은 가볍게 웃으며 리쌍샘의 질문을 들었지만 지원이는 심각했다. 뭔가 리쌍샘이 자기 이야기를 가로막는 거 같아서 발끈하기도 했다. 지원이가 답했다.

제 말은 인간도 로봇일 수 있다는 거에요. 소설에서 보면 필이 스타일러 여사의 부탁을 받아서 가정부와 바람이 난 아들에게 역호르몬 치료를 하잖아요. 그 말은 호르몬을 조정하면 그 아들의 사랑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럼 결국 인간도 기계랑 똑같은 거잖아요.”

지원이는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뭔가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뭔가 마음에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듯 모아지는 것이 한편으로 신기하면서도 뭔가 자신감이 더 생겼다. 지원이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데이브와 필이 헬렌을 만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