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여성,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아유, 스타킹 또 나갔어!”

 “뭐하다 그랬는데?”

 “몰라. 또 어딘가에 긁혔나 보지.”

 “에이그, 여자가 칠칠맞기는.”

 “야, 그럴 수도 있지. 거기서 여자가 왜 나오냐? 그럼 여자가 스타킹 찢어먹지 남자가 찢어먹니?”

 그래. 굳이 거기서 여자가 나올 필요는 없다. 

 여자니까 몸가짐이 단정해야지, 이런 건 후져도 너어무 후진, 이를 테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죽어라고 가족들을 설득해 이제 막 결혼에 골인하려는 찰나 “걔, 니 여동생이다.”와 같은 대사를 듣는 것처럼 김빠지는 일인 것이다. 21세기도 꾸역꾸역, 지루하고 무던하게 흘러가고 있고 세상은 이를 테면 아무 일도 없고, (아니 사실은 일이 너무 많아 어딘가에 빼곡하게 적어놓지 않는 이상 일일이 기억해줄 수가 없고) 또 어딘가에서는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다는데

 

 미지는 오늘 또 스타킹이 나갔고 지원이는 미지의 그 칠칠맞음에 대해 십구세기식 타박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함께 읽어볼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입니다. 많이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책 한권이라서 단편을 읽는다는 취지에 맞게 첫 번째 수기까지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빌려서 더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앞부분이라고는 해도 충분히 완결적이기는 합니다만.”

 

 인간 실격. 제목 참 도발적이다. 실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짤막하고도 단호한. 뭔가 더 매달려보아도 더욱 구차해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짐짓 더 졸아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도대체가 ‘자격’이라는 걸 정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딜 기준으로 선을 긋고 선 밖에 있는 자들을 자격미달로 규정한단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남자의 자격이니 인간의 조건이니 하는 예능프로 제목만큼 오만한 게 또 있을까.

 

 “뭔가 음침해. 그래서 기분 나빠.” 소설에 대한 첫인상을 묻는 리상쌤의 공통질문에 미지가 말했다.

 “왜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쁘니?” 혜민이는 오늘도 팔짱을 낀 채로 반대질을 시작한다.

 “뭐가 그럴 수가 있냐? 자기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딨는데? 순 변태 같잖아!” 수정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열을 올린다.

 “그냥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예민한 거 아닐까?”

 “예민? 예민하면 다 이래?”

 “다 그렇진 않겠지만, 음...이 사람은 뭐랄까, 초식동물 같다고나 할까?”

 “초식동물? 초식동물이 예민해?”

 “그럼! 걔네들 완전 예민해!”

 “맹수나 이런 애들이 감각도, 운동능력도 더 발달한 거 아니야?”

 “아니. 초식동물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거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오오, 뭔가 알듯 말듯 그럴듯한 얘기다! 난 이래서 단비 좋아!” 미지가 밝게 웃으며 내 오른쪽 팔에 매어 달렸다. 기분이 썩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평생의 연기

 

 “그래도 그렇지. 평생을 연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진심은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단 말야?”

 “뭐 소설이니까 뻥이 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심하잖아. 엄청 웃기고 재밌어서 인기도 많은 애가 사실은 괴로운데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니.”

 

 실제 나와, 남들에게 보이는 내가 달라야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자신을 온전히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덤벙대고 주구장창 엉뚱한 듯 하지만 그건 소설 속 요조처럼, 캐릭터일 뿐. 사실 나는 어둡고 조용하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불도 켜지 않고 있을 때가 있다.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있으면 차분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이럴 때 엄마가 방문을 열면 꼭 불을 재빨리 켜며 이 어둔 곳에서 잠도 안자면서 뭘 하냐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면 안되나? 사람은 잠을 자지 않으면 반드시 불을 켜 놓아야해? 그 시간에 꼭 무언가를 해야만 해? 나는 그냥 어둠을 즐기고 있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엄마가 길이길이 일장 연설을 하실 것 같아 말하기를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어두운 게 좋다.

 

 조용한 것도 그렇다. 사실 나는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듣지도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묵언수행. 이런 거 정말정말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없을 것이다. 조용함이 이어지면 그 침묵의 시간 동안에 온갖 상상들이 생겨나 버리고 그것들은, 대개 나쁜 쪽이었다.

 말이 없으면서도 사람 대접 받으려면 지원이처럼 높은 콧대와 늘씬한 기럭지, 안아주고 싶은 여린 몸매 정도는 가진 여자라야 한다. 나처럼 투박한 주먹코에 앉은키 덕분에 더불어 커진 키와 그에 못지않은 골격을 가진 여자는 말이라도 우습게 해줘야 이 험한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오버페이스지만 그렇다고 너무 유난을 떨어도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덤벙’과 ‘엉뚱’은 ‘가끔’이라는 단어를 만나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걸 내 몸은 이미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한 판의 연기가 끝나고 나면 마치 내 성격이 원래 그랬나 하고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나 자신마저 속아 넘어 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의 막이 내리고 혼자가 되면, 늘 10년은 묵은 듯한 피로가 코와 입으로 또 귀와 눈으로, 더불어 몸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기분이 드는 까닭에, 깊은 숨을 한 번 몰아 쉰 뒤 생각하게 된다.

 

 그래 나는 조용한 인간이었지. 어둠이 더 편안했었지 하고.

 

 요조가 너무 심하다구? 아니, 그런 사람은 실제 있어. 나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너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연기를 하잖아? 앞에서는 살살거리고 돌아서서는 뒷담을 일삼는 게 사람이란 걸 알아. 말도 안되는 역겨운 짓을 해놓고서는 자식 앞에 서기 민망하니까 처세니 사회생활이니 하며 변명하는 어른들은 너무 많이 봤어. 변태? 도대체 어디까지가 병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 건데? 99도까지는 끓는 물이 아니다가 100도가 되면 끓는 물인 것처럼 기준을 정하고 나누면 그만인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단비야? 단비야?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해?”

 “아! 아……, 오늘 저녁에 등갈비가 나온다고 해서 몇 개나 집어먹을까 생각 중이었어.”

 “아, 정말 너는! 못 말려어.”

 “어? 근데 리상쌤 어디 가셨어?”

 “수업 끝났어.

 

 

 “네. 벌써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군요. 이렇게 연기로만 점철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진짜 존재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는 일단 접어둡시다. 다른 이야기들도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소설 초반에 나오는 육교나 지하철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어린이의 시각 같았어요. 동심이란 게 살아있다면 이렇게 대답했겠죠.”

 “여러분은 동심이 없는 거죠?”

 “뭐 어찌됐던 이젠 고등학생이잖아요.”

 그럼 그 동심이란 건 언제 없어졌나요?

 

 

쓸모가 있다

 

인간 실격.

 

실용적.

 

실용적이 나쁜 말이야?

 

스타킹이야 말로 가장 비실용적인 제품.

 

다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그것도 은밀하게. 도대체가 왜 그래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물건을 학생들한테 신게 하는 이유가 뭔가.

 

모든 멋이란 쓸모없음에서 나온단 말이죠.

 

넥타이, 자기 목을 조르는 기괴한 장식품

 

이런 것을 남자들한테 매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이를 테면 머리스타일 말이죠. 남자들의 짧은 머리, 불황과 관련이 있다. 사회가 능력있는 남성성을 강조한 결과. 지고

지순한 여성성을 강조한 결과 긴 생머리가 있는 것처럼.

 

짧은 머리.

힐끗힐끗 쳐다보며 킥킥대는 남자애들. 짜증나고 열받는다.

 

한편으론 무섭다.

 

 

 “나처럼 그냥 신지 마. 그럼 되잖아.”

 “그럴까봐. 근데 넌 오늘도 체육복 입고 온 거야?”

 “당연하지.”

 “교문에서 안 걸렸어? 집중단속 한다고 했잖아.”

 “오늘은 걸렸어. 젠장. 그래서 아까 학생부실 내려갔다 왔잖아.”

 “키킥, 젠장이래. 어쩌다 그랬는데?”

 “원래 그 시간엔 아무도 안 지키는데 오늘따라 체육이 떡 하니 있더라구. 체육복 걷어올린 거 딱 걸렸지.”

 “아무튼 너도 참 대단하다. 매일 같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그리구 치마 입기 싫으면 교복바지 하나 사면 되잖아?”

 “엄마가 안 사준단 말이야.”

 “어머니도 참 대단하시고 말야.”

 내가 매일같이 하는 그 대단하다는 일은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다. 치마가 입기 싫다. 단지 그 뿐이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못 입겠다. 그래야 정확하다. 도대체 왜 내 다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애써 보여주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려 하는 대신, 혹은 이해하는 척만 하는 대신 더 쉽고 편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열여덟의 여학생에겐 흔하디 흔한 일이지 않나?

 

 체육복 바지를 입고 그 위에 교복 치마를 입는다. 슈퍼맨이 그랬지. 바지를 입고 팬티를 입는다.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패션을 소화한 그는 선구자다. 나도 이를 테면 그런 거다. 선구자. 모두가 다 다리를 드러내놓고 치마를 입을 때 나는 그렇지 않는다. 슈퍼맨이 그랬던 것처럼, 훗날 누군가가 나 정단비의 슈퍼함에 대해서도 영화를 만들어서 기억해주지 않을까?

 맵고 짜고,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교복치마를 입고 집을 나와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뭔가 잊은 듯 아차차 하며 계단으로 급히 올라가 1.5층 쯤에 멈춰서는 가방에 구겨넣은 체육복 바지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뒤도 안돌아보고 직진하면 된다. 내 슈퍼한 패션을 이해하지 못하는 노멀한 녀석들은 버스 손잡이의 동그라미 사이로 눈빛을 교환하며 킥킥대기 바쁘지만 니네들의 개그 소재가 될 지언정 니네들한테 내 다리를 보여줄 순 없단 말이다. 이 응큼한 녀석들아.

 만원버스의 숨막힘도 일주일만 지나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남학생들의 비웃음 따위 못 견딜 게 아니다. 귀를 쾅쾅 울리는 Nirvana의 스멜을 맡다 보면 밀려밀려 내릴 때가 되곤 하는 것이다.

 교문에 누가 지키고 섰다 싶으면 변신을 해야한다. 공중전화박스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스마트한 시대는 도무지 그런 작은 공간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단 말이지. 명색이 정문이랍시고 만들어놓은 커다란 돌기둥이 내내 이어져온 지루한 담과 만나는 곳에 작은 빈 공간이 있다. 나만의 피팅룸. 그곳에 들어가 입고 온 체육복 바지를 발목부터 두껍게 세 번쯤 접고 그 다음엔 쭈욱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다. 그리고 나서 함께 딸려 올라온 치맛단을 톡톡 쓸어내리듯 쳐주면 얌전히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 되는 것이다. 허벅지 안쪽을 도톰하게 쓸리는 체육복 때문에 본의 아니게 팔자걸음을 걸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지 교문을 지나는 그 시간만이고 건물에 들어서면 다시 손을 집어넣어 말아 올라간 체육복 바지를 내리기만 하면 되니 또한 얼마나 간단한가. 교실에 들어오면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멤버들은 또 있기 마련이니 자연스레 그들에 섞여 치마를 벗으면 내 슈퍼함은 이내 일상 속으로 사라진다.

 가끔 엘베에서 만나는 아랫집 여드름은 매일같이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나를 어지간한 덜렁이쯤으로 생각하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힐끔거리지만 아니, 나는 이렇게나 치밀한 년이다.

 

 그렇게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 지독한 연극 무대를 매일 올라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 때문이다.

 

 대학 카톨릭 모임에서 만난 엄마와 아빠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아빠는 그나마 가부장제의 풍파 속에서도 남자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남아있는 사람인데, 엄마는 외할머니의 고지식함을 이어받고 친할머니의 고루함을 전수받아 참 고루고루 보수적이시다.

 이런 엄마의 바람은 하나뿐인 딸이 예쁜 여성으로 자라나 좋은 남자 만나서 사랑받고 사는 거란다, 내 참. 외모도 그 정도면, 성적도 그 정도면, 성격 또한 그 정도면 모든 것이 적당히 기준 이상인 오빠가 사춘기랄 것도 없이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대학생이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엄마는 나도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다르다.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지. 오빠가 그런다고 해서 나도 꼭 그런다는, 그래야 한다는 것은 폭력이잖아.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해. 나 같으면 그냥 입겠어. 전에 입은 거 보니까 예쁘기만 하던데 뭘.”

 나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엄마랑 같이 백화점에 가서 예쁜 핑크색 주름 치마를 사고 그 자리에서 입고 나왔다. 하지만 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울상이 되고 말았다. 엄마한테 사정하다시피 매달리고 화장실에 가서 바지를 입고서야 내 발로 백화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기만 벌써 다섯 번째. 내 옷장에는 핏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길이와 두께도 다른 치마가 다섯 벌이나 있지만 그걸 입고 외출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쯤되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치마를 입지 않는 내 고집이 대단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치마를 입히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의 의지가 대단한지 길 가는 사람 잡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 되어 솟을 기세다.

 

 한창 반항기가 돋던 중학교 때에는 바지를 입었다. 지금은 짧은 단발이지만 그 때는 머리가 조금 더 짧았다. 멋부리는 남자애들처럼 짧은 머리에 다른 여자애들보다 키는 더 큰 데다가 바지까지 입고 있으니 처음보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남자취급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인기도 좋았다. 도심에서 조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던 여중이었는데, 같은 학년 애들은 물론이고 예쁜 언니들도 종종 나를 찾아와서 맛있는 것을 사주고 가곤 했다. 나는 나대로 그런 언니들이 싫지 않아서, 예쁜 언니를 눈 앞에 앉혀놓고 코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예쁘다는 것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순간순간 황홀한 그 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것에 반대했던 엄마

 

 딸, 여성스러움을 강조.

 

 인간으로써 쓸모가 있는 인간, 그렇지 못한 인간의 실격

 여성으로써 쓸모가 있는 여성. 그렇지 못한 여성의 실격

 

 

 남자 고등학생이 싫은 것

 

 긴 머리가 싫은 것

 

 치마에 스타킹이 싫은 것

 

 유치원 때 학예회날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하얀 투피스에 살색 스타킹을 신었던 날

 

 옆집 오빠가 나를 데려간 것

 

 나를 여자로써 쳐다보는 것이 싫다.

 

 오히려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게 된 것.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조심하지 못한 나를 나무란 엄마

 

 

 단풍 구경 나가자.

 으이그 또 넘어졌지?

 아무튼 꽈당 염미지 알아줘야돼.

 좀 조심좀 해라. 뭐냐. 스타킹 다 나갔네.

 미지야?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

 넘어졌을 때, 넘어져서 아플 때, 넘어져서 아파서 울상이 되었을 때 해줄 말은,

 많이 아프지다. 조심했어야지가 아니라.

 

 

무릇 영웅이란 이 정도의 이중생활쯤은 감당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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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트리 최종본 2차

레몬트리 2015.01.09 19:35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 순 없다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될 가능성이 없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장악되어 있는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그 짧은 ‘오키’ 이후에 내가 버틴 시간은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늘 수정이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있어 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야?” 지원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근데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한 거야?” 수정이가 열을 올린다.

  “그니까. 살 빼야 되는데 밤 11시에 티비에서 막 먹방하고 그럴 때 느끼는 처절한 고통 말이지?”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염미지. 멋진데? 그래서?” 단비가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 일 없다는 걸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방금 미지 말 듣고 생각난 건데,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지 않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지금 아무렇지 않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거다?”

  “말 되지 않아?”

 

  고통. 나혼자 감당해야하는 것.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 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라구. 그것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 끊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아니 난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긴데 넌 또 왜 이렇게 열내는 건데?”

  “고통이란 건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것도 아니고, 별 고민도 없이 편하게 사는 너희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얘기할 만한 것도 아니란 얘기를 하는 거야.”

  “야, 너희같은 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러는 너는 도대체 무슨 고통을 느껴봤는데?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애늙은이 같은 게.”

  “니네 또 왜 그러니. 지금 수업시간이야. 어, 리상쌤 오신다.”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저만 빼놓고.”

  또 슬그머니 다가와 눈을 반짝거리는 리상쌤이다.

  “아까 주신 토의 주제 가지고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혜민이랑 수정이가 의견이 달라서 보시다시피…….”

  “쌤, 얜 순 반대쟁이예요. 맨날 태클거는 재미로 살아요. 피곤하지도 않나.”

  “그렇게 얘기하는 건 실례예요. 의견이 다르다는 건 당연하고도 당당한 거죠. 만약 같은 의견만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하겠습니까?”

  “선생님은 혜민이 편이군요. 췟.”

  “선생님, 세상에는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는 거, 아침이 되는 게 조마조마하지도 않고 오늘 마주할 일에 대해 계획할 수 있는, 그런 삶 말이에요.”

  “네. 물론 그렇죠. 저도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삶보다 현재의 불행을 없애는 삶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순 아닌가요? 현재의 불행을 없애는 게 더 안정적이라면서요. 그럼 지금 누군가가 받고 있는 고통을 가지고, 그건 너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신의 선물이야.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이겨내봐. 근데 못 이겨내면요? 그 사람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건 누가 책임져요?”

  “음...”

  “얘가 이런 식이에요. 쌤. 대단하죠?”

  “아닙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도 있고 고통의 크기는 상대적인 거라서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되는 것도 맞고. 듣다보니 설득당하는 데요?”

  “아니, 쌤.”

  “그런데 이런 의문은 드는 군요. 제가 보기엔 혜민 양이 상당히 딴딴해 보이거든요?”

  “네?”

  “평상시에 친구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고,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제시하는 편.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늘 그 반대편을 떠올리고, 그러느라 더 바깥을 겉돌게 되는.”

  “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그럼에도 별 일 없이 살고 계시다는 거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뭐……, 지금은요.”

  “혜민 학생은 어떻게 그렇게 단단해졌을까요?”

  교실의 분위기가 적막해졌다. 나는 그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었다. 수다스러운 누군가가 끼어들어, 나의 참담한 과거가 더 이상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재생되지 않기를. 빨리.

  “갑자기 노래 하나가 생각나네요.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 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리상쌤의 되도 않는 노래로, 침묵은 곧 깨졌다. 다행이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해보려구요. 진지하게 잘 들어 주세요. 뭐 훈계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니 긴장 푸시구요.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꿈이 국어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국어과목이 성적이 잘 나와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사범대에 들어왔고 정말 운이 좋아서, 시험에 빨리 붙었죠. 선생님이 되고 나서 어땠을까요? 기쁜 것은 잠시예요. 그냥 이것도 하나의 일상입니다. 등교하듯 출근하고, 하교하듯 퇴근하고. 근데 정말 무서운 건 10년 넘게 꾸던 꿈을 이루고 나니, 나한테는 꿈이 없는 거에요. 그 때 만나던 여자친구가 가끔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선배는 꿈이 뭐냐고. 대답할 수가 없는 거죠. 내 꿈은 국어선생님이었는데, 나는 꿈을 이뤘는데, 꿈이 뭐냐니.”

  뭔가 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말은 못했다. 선생님이 너무 진지해서.

  “1년차를 정신없이 보내고 제일 방황했던 게 2년, 3년차였던 거 같아요. 근데 그런 방황과는 별개로, 직업을 가지니 생활이 안정되는 거죠.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특히 고3 담임할 때는 돈은 버는데, 쓸 시간이 없더라구요. 그 때는 주5일제도 아니었어서 한 달에 딱 하루 쉬었거든요.”

  “고3 많이 힘들어요?” 단비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 고3때는 그렇게 안 힘들었던 것 같은데, 고3은 몰라도 고3담임은 진짜 힘들어요. 근데 몸이 힘든 거랑은 별개로 신경쓸 일은 별로 없어요, 고3 담임이. 딱히 사고치는 애들도 없고, 업무도 입시 외에는 별 거 없고. 그리고 수업도 여러분 내년에 많이 하시겠지만 EBS 문제집 풀이 하는 거 반복이잖아요. 고3담임 딱 2년째 하고 나니까 드는 생각이 이거더라구요. 이거 너무 편한데?”

  “편해요? 주말이 없잖아요?”

  “주말이 없는 대신, 수능 이후에 시간들이 있죠.”

  “아아…….”

  “아무튼, 그 때 딱 머릿속에 떠오른 소설이 이거에요. 레몬 트리!”

  “아! 선생님. 결국은 수업 얘기!” 아이들이 난리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워워, 진정들 하시고. 소설에서 주인공은,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죠. 생각해보니까 그 때의 생활이 딱 그랬어요. 아무렇지 않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제가 생긴 건 귀공자처럼 생겼어도 어렸을 땐 좀 힘들었거든요, 우리 집이. 대학 다닐 때도 알바하느라 바빴고. 근데 직장을 갖고 나니까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한 거죠. 삶이 윤택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삶 말이죠. 근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든 거죠. 이 안정된 생활을 즐기면 어떻게 될까? 내년에도 고3을 맡고, 더 안정된 입시지도를 하고 EBS 문제풀이는 더 노련하게 해주고, 그러다가 돈 모아서 차 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게 된다면.”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내가 꿈꾸던 삶이,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이, 이런 것이었나 싶었던 거죠.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더 지내고 나면 EBS 문제풀이를 잘 해주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겠다 싶은 무서운 생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고3 안하겠다, 했죠.”

  “주말에 놀고 싶었던 건 아니구요?”

  “아, 쪼끔 그런 것도 있고. 하하하.”

  리상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엽게 웃었다.

  “결국 안정을 버리고 택한 것은 고통입니다. 이 수업 준비하느라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수업시간에 슬슬 돌아다니기나 하고 하는 것 없는 거 같지만 실제 수업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두 배 세 배로 힘들다구요.”

  “선생님 수업하면서 되게 재미있어 하잖아요?”

  “그거야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재미있는 척 하는 거죠. 여러분 읽는 소설들만 해도 그래요. 제가 그냥 쉽게 복사하지 않고 다 일일이 타이핑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기 좋으라고. 저 이래뵈도 독수리거든요. 검지 중지 네 손가락 씁니다. 한참 타자 치다보면 새끼손가락이 굳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럼 그렇게 고통스러운 걸 왜 자꾸 하시는데요?”

  “바로! 그겁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리상쌤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결국, 풉. 저한테 이만큼의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는, 뭐 그런 얘기겠죠. 하하하.”

  “아, 뭐야! 나 이 수업 괜히 들었어. 아, 오그라들어…….” 여기저기서 아주 난리들이 났다.

  “우스꽝스럽게 얘기했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힘들었던 순간들, 그 고통의 시간들이 과연 다 헛된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이 수업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아무렇지 않은 내가 있기 위해서 나한테 그 고통스런 경험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이미 그 때의 고통을 이겨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벌써 이 강좌도 다음 시간이 마지막 소설이네요. 사실 오늘 배운 소설은 좀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내년에 고3 되면 힘들 거에요. 슬럼프에 무기력증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방황이, 무기력이, 여러분을 키울 겁니다. 고통 속에서, 많이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끄읕!”

 

  결국 그 얘기다. 따돌림의 경험이 나를 키웠다. 그건 맞는 말인가? 어느 정도는 맞을 거다. 어지간한 일에는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도 그 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궁금했던 건 나는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는 걸까 하는 문제다. 대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은 쉽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반대편에 있다보면 별 일이 다 생긴다. 다수의 공격을 되받아칠 무언가를 생각해놓지 않으면 안되기에 신경은 늘 곤두서 있고, 그 때문에 피곤한 게 사실이다. 모드전환이 쉽지 않아서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에도 사사건건 따져들고 반대하기가 쉽고 그러다 보면 인간관계는 얼그러지고 나는 어느새 주변을 겉돌고 있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내 일상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걸 놓고 싶진 않다.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 짧은 ‘오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볼 뿐이다. 다른 애들처럼은 할 수 없다. 나는 절대로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진 않겠다. 나 하나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꼭 반대편에 남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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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최종본.

레몬트리 2014.12.22 05:41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었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었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 순 없다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우리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내가 버틴 건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늘 수정이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있어 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야?” 지원이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근데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한 거야?” 수정이가 열을 올린다.

  “그니까. 살 빼야 되는데 밤 11시에 티비에서 막 먹방하고 그럴 때 느끼는 처절한 고통 말이지?”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염미지. 멋진데? 그래서?” 단비가 추임새를 넣는다.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일 없다는 걸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방금 미지 말 듣고 생각난 건데,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지 않아?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지금 아무렇지 않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거다?”

  “말 되지 않아?”

 

  고통. 나혼자 감당해야하는 것.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뭐 꼭 그런 건 아니지…….”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아니 난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긴데 넌 또 왜 이렇게 열내?”

  “고통이란 건…”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저만 빼놓고.”

  또 슬그머니 다가와 눈을 반짝거리는 리상쌤이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해보려구요. 진지하게 잘 들어 주세요. 뭐 훈계같은 걸 하려는 건 아니니 긴장 푸시구요.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꿈이 국어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냥 국어과목이 성적이 잘 나와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서 사범대에 들어왔고 정말 운이 좋아서, 시험에 빨리 붙었죠. 선생님이 되고 나서 어땠을까요? 기쁜 것은 잠시예요. 그냥 이것도 하나의 일상입니다. 등교하듯 출근하고, 하교하듯 퇴근하고. 근데 정말 무서운 건 10년 넘게 꾸던 꿈을 이루고 나니, 나한테는 꿈이 없는 거에요. 그 때 만나던 여자친구가 가끔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선배는 꿈이 뭐냐고. 대답할 수가 없는 거죠. 내 꿈은 국어선생님이었는데, 나는 꿈을 이뤘는데, 꿈이 뭐냐니.”

  뭔가 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말은 못했다. 선생님이 너무 진지해서.

  “1년차를 정신없이 보내고 제일 방황했던 게 2년, 3년차였던 거 같아요. 근데 그런 방황과는 별개로, 직업을 가지니 생활이 안정되는 거죠.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특히 고3 담임할 때는 돈은 버는데, 쓸 시간이 없더라구요. 그 때는 주5일제도 아니었어서 한 달에 딱 하루 쉬었거든요.”

  “고3 많이 힘들어요?” 단비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저 고3때는 그렇게 안 힘들었던 것 같은데, 고3은 몰라도 고3담임은 진짜 힘들어요. 근데 몸이 힘든 거랑은 별개로 신경쓸 일은 별로 없어요, 고3 담임이. 딱히 사고치는 애들도 없고, 업무도 입시 외에는 별 거 없고. 그리고 수업도 여러분 내년에 많이 하시겠지만 EBS 문제집 풀이 하는 거 반복이잖아요. 고3담임 딱 2년째 하고 나니까 드는 생각이 이거더라구요. 이거 너무 편한데?”

  “편해요? 주말이 없잖아요?”

  “주말이 없는 대신, 수능 이후에 시간들이 있죠.”

  “아아…….”

  “아무튼, 그 때 딱 머릿속에 떠오른 소설이 이거에요. 레몬 트리!”

  “아! 선생님. 결국은 수업 얘기!” 아이들이 난리를 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워워, 진정들 하시고. 소설에서 주인공은,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죠. 생각해보니까 그 때의 생활이 딱 그랬어요. 아무렇지 않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제가 생긴 건 귀공자처럼 생겼어도 어렸을 땐 좀 힘들었거든요, 우리 집이. 대학 다닐 때도 알바하느라 바빴고. 근데 직장을 갖고 나니까 너무나 평화롭고 고요한 거죠. 삶이 윤택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정된 삶 말이죠. 근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든 거죠. 이 안정된 생활을 즐기면 어떻게 될까? 내년에도 고3을 맡고, 더 안정된 입시지도를 하고 EBS 문제풀이는 더 노련하게 해주고, 그러다가 돈 모아서 차 사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게 된다면.”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내가 꿈꾸던 삶이,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이, 이런 것이었나 싶었던 거죠.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 년을 더 지내고 나면 EBS 문제풀이를 잘 해주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겠다 싶은 무서운 생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고3 안하겠다, 했죠.”

  “주말에 놀고 싶었던 건 아니구요?”

  “아, 쪼끔 그런 것도 있고. 하하하.”

  리상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귀엽게 웃었다.

  “결국 안정을 버리고 택한 것은 고통입니다. 이 수업 준비하느라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세요? 수업시간에 슬슬 돌아다니기나 하고 하는 것 없는 거 같지만 실제 수업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두 배 세 배로 힘들다구요.”

  “선생님 수업하면서 되게 재미있어 하잖아요?”

  “그거야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재미있는 척 하는 거죠. 여러분 읽는 소설들만 해도 그래요. 제가 그냥 쉽게 복사하지 않고 다 일일이 타이핑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보기 좋으라고. 저 이래뵈도 독수리거든요. 검지 중지 네 손가락 씁니다. 한참 타자 치다보면 새끼손가락이 굳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럼 그렇게 고통스러운 걸 왜 자꾸 하시는데요?”

  “바로! 그겁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리상쌤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결국, 풉. 저한테 이만큼의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있다는, 뭐 그런 얘기겠죠. 하하하.”

  “아, 뭐야! 나 이 수업 괜히 들었어. 아, 오그라들어…….” 여기저기서 아주 난리들이 났다.

  “우스꽝스럽게 얘기했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시길 바래요. 여러분들이 힘들었던 순간들, 그 고통의 시간들이 과연 다 헛된 것인가. 여러분은 지금 아무렇지 않게 이 수업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아무렇지 않은 내가 있기 위해서 나한테 그 고통스런 경험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이미 그 때의 고통을 이겨내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가.”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대략 열 시간 가량이어서, 꼬박 지새울 각오만 한다면야 모든 면모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 깊도록 해변에 주저앉아, 수평선 어두운 사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과 때로는 되레 내 쪽에서 크게 앓고 말았던 여러 얼굴들, 우리 악수한 손에서 전해지던 운명선의 차가운 느낌이라든가, 방금 한 결별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떤 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두는, 서른번째 여름마저 무료하게 지나가버리고 만 것에 불과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벌써 이 강좌도 다음 시간이 마지막 소설이네요. 사실 오늘 배운 소설은 좀 어려웠을 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습니다. 내년에 고3 되면 힘들 거에요. 슬럼프에 무기력증에 다 때려치우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방황이, 여러분을 키울 겁니다. 고통 속에서 많이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끄읕!”

 

  내 꿈은 심리상담사다. 그래서 더 고민이 되는 것 같다. 피상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마다 예전의 나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하지만 예전의 내가 있었기에 나는 심리상담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내가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 또한 나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일일 거다. 이 수업, 잘 들었다.

10.31. 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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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3차본

레몬트리 2014.12.21 15:33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우리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내가 버틴 건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대략 열 시간 가량이어서, 꼬박 지새울 각오만 한다면야 모든 면모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 깊도록 해변에 주저앉아, 수평선 어두운 사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과 때로는 되레 내 쪽에서 크게 앓고 말았던 여러 얼굴들, 우리 악수한 손에서 전해지던 운명선의 차가운 느낌이라든가, 방금 한 결별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떤 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두는, 서른번째 여름마저 무료하게 지나가버리고 만 것에 불과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진짜 그렇네. 근데 참 멋있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지?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했나?”

  “아니야, 미지야. 보통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반대쟁이. 멋진데? 그래서?”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일 없다는 것은 좋은 거 같은데,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혜민이 말처럼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라고 봐.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거다?”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 나는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고통은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제 주변에 저렇게 반대를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을 겁니다.

별일 없이 산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괴롭고 흉한 무늬와 빛깔일지라도, 그건 한 땀 한 땀 힘들게 새겨놓은 시간의 자수, 엄연한 너의 지난날이라는 것을. 더욱이 내겐, 너를 그토록 함부로 대할 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닐 순 없다

 

 아니,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절대 오케이 되는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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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2차본

레몬트리 2014.12.19 15:48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영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영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냐?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이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격하게 흔들리며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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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완성판

병섭4 2014.12.03 21:42

스마트폰 어벤져스

배명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름의 뜻부터 뭔가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보다 4배나 커다란 크기에 겨울이면 눈이 오기도 하고, 고이는 물은 대부분 사람이 먹을 수 없어 더 위험한 사막. 그러나 이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로 이어진 오아시스를 따라 아랍, 인도, 티벳, 중국, 러시아의 땅들이 붙어 있어 예부터 비단길로 유명했다.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신임장을 받고 출발해서 17년 동안이나 중국에 머물며, 그 동안의 기록을 동방견문록으로 정리한 마르코 폴로가 둘러간 곳도 바로 이곳 - 타클라마칸 사막이었다.

 

미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검색하자 스마트폰에 떠오른 이야기였다. ‘위키 백과라는 사이트였는데, 화면을 밑으로 내리는 대로 타클라마칸의 지형과 기후, 인물, 민족, 분쟁 등등 온갖 이야기들이 밀려 나왔다.

 

다른 블로그에 링크된 3D 지도 사이트 - 구글 어스에서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는 화면에서 시작해 카메라가 줌인하듯 지정된 타클라마칸의 지역으로 쭈우우욱 확대해 들어가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단비야, 이거 봐봐! 오오, 이거 신기한데!”

 

미지는 지구 밖에서부터 시작해 지구의 어느 지역까지 쭈우욱 떨어져 내리는 화면을 보는 게, 이게 생각보다 엄청 신기하고 짜릿했다.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는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으아악!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재밌어서, 인제 다른 것 좀 보자는 단비의 걸걸한 한 마디가 나올 때까지 미지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화면을 다시 봤다. 그렇게 확대해서 본 타클라마칸은 정말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누렇게 말라붙은 바다 같았다.

 

다른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타클라마칸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곳도 있었다. 놀랐던 것은 모래언덕이 바람을 따라 진짜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과학이나 지리시간에 몇 번 듣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영상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람이 심한 날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높은 바위산에서 캠코더로 찍어서 빨리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마치 모래로 된 파도가 서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나르면 수 천 대의 트럭으로도 수 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를 그 거대한 작업을 모래바람은 단 몇 일만에 해 내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그 작은 화면만으로도 그 영상은 진짜 대단했다. 미지는 정말 자연의 신비나 어떤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듯해서 놀라웠다.

 

 

스마트폰 논쟁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짝꿍과 함께 소설을 읽으면서 잘 모르는 것들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주기 바랍니다. , 소설에 관련된 것만 검색하는 겁니다. 소설과 관련 없는 웹서핑이나 게임, 페북질은 엄격히 금지합니다. 특히, 문자나 카톡을 하지는 말아 주세요. 우리 수업에 집중하게요. 만일 문자나 카톡을 하다 걸리면, 전송된 문자를 우리 모두 앞에서 큰 소리로 읽는 벌을 받겠습니다. 우아..무지 창피하겠죠? 그러니, 이 규칙을 꼭 지켜주세요. 부탁합니다.”

 

뭐래니? 리상샘이 뭐라뭐라 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미지는 스마트폰에 달려 들었다. 지난 시간에 리상샘은 다음에 할 소설로 배명훈 작가의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를 소개하면서 스마트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소설에 대해 검색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오오~~ 하는 웅성거림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무언가 금지된 것이 다시 허락될 때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아이들의 표정 속에 있었다.

 

미지네 학교는 핸드폰을 아침에 걷어서 종례시간에야 나눠 주었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서, 걸리기만 하면 그날 하루 압수에, 벌점 중에서도 최고 벌점인 ‘5을 받아야 했다. 무단지각이 벌점 2점이었고 흉기소지가 벌점 3점인 것에 비하면 진짜 대단한 벌점이었다.

 

하지만 미지는 모든 아이들의 핸드폰이 다 스마트폰인 듯이 너무도 당연스레 말하는 리상샘이 좀 거슬려서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스마트폰 없는 사람들은 뭐 하나요?”

 

미지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아직 2G폰을 벗어나지 못한 미지였다. 새로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비싼데다가 액정도 쉽게 깨지는 거 같고, 뭐 좀 할려고 하면 그놈의 까똑. 까똑.’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는 게 공부를 할려면 없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개뿔!!

 

미지는 사실 스마트폰이 정말정말 갖고 싶었다. 미지네 학교와 반의 온갖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그 단톡방도 언제 어디서든 바로 들어가고 싶었고, 오늘 학교 급식의 점심메뉴가 뭔지 클릭만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그 간편함도 즐기고 싶었고, 멋지게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당장 프사에 올리고도 싶었다.

 

또 멋진 글과 사진과 영상을 올려서 미지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며 재치가 있는지 친구들에게, 아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고도 싶었다. 미지가 무슨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기 보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일이 정말 간단하니까 말이다. 페이스북에 사진 몇 장, 동영상 몇 개로 단번에 수십만의 좋아요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우리 반 영주는 무슨 결심을 했는지, 매주 월요일에 우리 학교 5, 전망이 좋은 서쪽 창문에서 학교의 풍경사진을 찍었다. 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공원에는 작은 연못과 조그만 언덕과 아담한 숲이 있고 잘 정돈된 산책로에 저녁이면 조명도 은은해서, 우리 학교는 꽤 예쁜 학교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영주는,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빼먹기도 했지만, 한 해 동안 우리 학교의 그 이쁜 풍경을 스물 몇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가 2학년에 올라오는 2월에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 학교에서 1년을 보낸 짧은 감상을 덧붙여서 말이다.

 

영주의 사진은 순식간에 퍼져 놀랍게도 불과 열흘만에 좋아요3천이 넘었다. 댓글에는 우리 학교 애들이 써 놓은 응원과 공감의 말도 있었지만, 졸업생 언니들의 추억 돋는 댓글도 있었고, 이제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는 중3 아이들의 감탄과 기대에 찬 댓글도 있었다. 근처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댓글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외국어로 된 댓글도 있었다. 내 손 안에서 간단한 조작 몇 번이면 내가 만든 무언가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간단하고 대단한 일도 먼저 스마트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에효, 작은 한숨이 미지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청소년 요금제로 한 달에 이 삼만원 정도면, 웬만한 스마트폰은 가질 수 있었다. 그 정도 돈은 미지의 용돈으로도 해결될 만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빠였다. 다른 것에는 그리 엄하지 않은 아빠가 유독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에는 엄격하게 반대했다. 스마트폰은 바보상자이고,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뜨리는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위험한 걸 아빠는 왜 샀으며, 고작 10만원 어치 사 놓은 걸로 무슨 대단한 투자인양 왜 맨날 주식시세는 들여다 보고, 주말마다 몇 시간 넘게 야구에, 드라마에, 예능에 빠져서 밥 먹다가도 맨날 엄마한테 혼나는 아빠는 뭐냐고 미지가 따져 물어도 아빠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는, 정말이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그런 일은 스마트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반복되었는데, 얼마 전에 아빠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지가 씩씩 거리며 거의 소리를 지를 듯이 아빠에게 마구 따져 묻었을 때, 대답은 않고 내내 듣기만 하던 아빠가 말했다.

 

“..., 염미지.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하자.”

 

아빠는, 일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웃음기 하나 없이 아주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뭔가 뜨겁고 날카롭고 빨간 경고등이 윙윙 대는 듯한 아빠의 표정에 미지는 일단 멈춰 섰다. 뭔가 더 말을 하면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아빠가 성큼성큼 미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려도, 아빠를 쫓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거의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무서웠다. 이 쯤 되면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아빠를 쫓아 가야 하나? 한 번 더?

 

미지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화를 내는 아빠를 보는 것도 물론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아빠랑 그렇게 진짜 싸우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그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뭔가 깝깝하고 답답하고 어색해서, 뭔가 윤기라고는 없이 바싹 말라버린 듯한 그 시간이 미지는 정말정말 불편했다. 거기까지 가야 하나? 스마트폰 때문에? 아빠에 대해 미지의 화가 풀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빠의 말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이다. 서로 진짜로 화를 내고 싸워서 그 메마른 시간이 얼마나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더 아빠에게 말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스멀스멀, 그 때 풀리지 않은 화가 뜨끈하게 속에 차올랐다. 그것 때문인지 미지는 괜히 가슴까지 두근댔다. 리상샘에게 질문을 가장해 그렇게 쏘아 붙인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대답이 또 기가 찼다.

 

... 미지학생. 스마트폰을 갖는 능력보다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게 더 큰 능력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짝꿍으로 데려오세요.”

 

아니 폰을 가져오라면서, 폰이 없다는데, 그 시간에 사람을 데려오라니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이냐? 꼭 질문을 하면 대답은 안하고 맨날 능력이 어쩌고 하는 그런 이상한 쫄리는 말같은 걸 던져서, 순간 우리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냥 스윽 빠져 나가는 게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특기란 걸 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당했다. 순간 또 뭔가 알쏭달쏭해서 미지가 더 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리상샘은 미지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고는 스윽, 교실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아놔, 진짜 이 남자인간들을 그냥...

 

벌써 몇 번이나 수업에 빠지고 딴 데로 새 버렸던 단비가 오늘만큼은 이 수업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미지는 아침부터 자리까지 몰래 바꿔가며, 단비 옆을 내내 지키다가 단비를 방과후수업 교실로 끌고 왔다. 단비에게는 스마트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신형에다, 예쁜 폰트에다가, 토끼양 케이스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단비의 핸드폰은 스마트폰이긴 했다. 하지만 완전 구형에다가 액정은 다 깨져서 전화나 될까 싶은 거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부터 단비는 이렇게 예쁜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으이그, 기집애, 뭔 일인지는 몰라도 단비, 너의 이 이쁜 아가는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었던 거야. 오늘은 이 언니가 네 스마트폰 좀 써 주실께.

 

미지가 무슨 말을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는 단비를 옆에 두고, 미지는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이야기 속에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스마트폰은 할 수 없는...

 

“...미지학생? 대답해 보세요.”

 

으잉? 이게 무슨 소리지?

 

내내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미지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오늘 미지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교실의 맨 뒷줄에 앉아서, 책상에 코를 박을 듯이 몸을 숙이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상샘과 아이들의 시선이 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완전 위기였다.

 

미지는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슬쩍 폰의 전원을 끄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옆눈으로 단비를 쳐다 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무슨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비는 미지의 당황해 하는 눈길은 전혀 모른 채, 소설 학습지에다 노란색 색연필로 박박 낙서나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기집애. 으이그, 이걸 짝꿍이라고... , 짝꿍!

 

그제서야 미지는 리상샘이 짝꿍끼리 얘기해서 소설에 대한 토론주제를 정하고 같이 이야기 해 보자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때도 리상샘의 말을 귀로만 듣고는,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 이런...

 

이건 사고였다. 이건 정말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순전한 사고였다. 미지는 정말 이 소설수업에 열심히 참여할 생각이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이 특이해서 미지는 점심시간에 이 소설을 한 번 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으면 대강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상샘과 아이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학생, 빈스토크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죠?”

 

리상샘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가벼운 연기가 더 필요했다. 10여년 학교 생활에, 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연마했던 필살의 연기력으로, 미지는 벌써부터 같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며, 미지도 굉장히 답답하다는 목소리로 리상샘에게 질문을 다시 정리해 달라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민소는 폭격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격추되어 죽을 위기에 있지요. 그런데 빈스토크 방위군은 민소를 구하러 가지 않아요. 민소가 수행한 임무는 선제공격을 금지한 국제법을 어기는 불법적인 비밀임무였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를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펼치면 빈스토크가 불법적인 공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겠지요. 이 부분을 근거로 많은 학생들이 빈스토크를 비난했어요.”

 

, 그래, 민소, 기억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추락했지. 그래, 국제법, 아까 그걸로 검색도 했었어. 그거라면 대답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래서, 질문이 뭐지?’

 

미지는 리상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검색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 되려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리상샘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하는 자신을 상상하기까지 하면서, 미지는 리상샘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혜민이는,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밀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병사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빈스토크군은 민소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빈스토크군이 민소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민소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중에서, 미지학생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 ... 선택하라구요?

 

순간, 미지는 머리 속이 하얘졌다. 분명 한 번 읽은 소설이라 대충 무슨 이야기인가 알기는 하겠는데, 입장을 선택하라니,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라니. 그런 걸 생각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며 검색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까 잠시나마 솟았던 자신감은 쨍그랑 부서지고,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불쌍한 여고생만 남았다.

 

“..., 저기... 그게...”

 

리상샘은 그런 미지를 보다 빙긋이 웃고는 말했다.

 

미지학생, 스마트폰이 참 대단하긴 해도, 결국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하는 그 힘까지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걸 잊지 말고, 잠시, 서 있는 채로, 스스로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주길 바래요. 먼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미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께요.”

 

리상샘의 말은 차분했지만, 미지는 전혀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런 쪽팔림이라니...

 

미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괜히 옆에 앉은 단비를 흘겨 보았다.

 

어느 새 단비는 아까 그 박박 낙서하던 학습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놓고는 뭔가 열심히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기집애가 의리 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하지만 단비한테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비는 원래 이런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하는 애였다. 단비한테 오늘 그냥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것도 미지였다. 이건 분명 미지의 책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미지는 선 채로, 다시 소설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빈스토크라는 도시가 있다. 가로가 2키로, 세로가 3키로에 높이가 674층이란다. 엄청 거대하고 화려한 이 건물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이 도시 안에는 군대도 있고, 의회도 있고, 인공위성 제작과 서비스라는 주요 산업도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라 할 만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곳이어서, 이 건물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돈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돈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빈스토크는 그게 유난히 심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 소설의 남주인 민소였다.

 

사랑하는 연인 은수가 빈스토크에 있는 인공위성 회사에 입사하면서 연락을 끊자, 민소는 군대에 들어가 해군 파일럿을 지원한다. 빈스토크는 시민권이 없으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빈스토크 방위군의 경력이 있으면 빈스토크 영주권을 얻는데 아주 유리했다. 민소는 은수와 다시 만나 함께 살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민소가 빈스토크군의 정규군이 아니라 빈스토크 해군에 고용된 방위업체의 비정규직 파일럿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필 제대하기 6개월 전에 민소가 폭격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소설의 내용을 정리하자, 미지의 머리 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 ... 그런데 가만있어 봐. 비정규직이라고? 빈스토크 해군은 이런 어렵고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왜 비정규직 파일럿에게 맡긴 거지?’

 

 

타클라마칸과 배달사고

 

선생님, 이건 정말 국가가 비겁해요. 민소는 비정규직 파일럿이었어요. 어찌 됐든 정규직보다 불안한 자리이고 언제든 짤릴 수 있는 자리라고요. 혜민이 말대로 그게 정말 중요한 임무고 필요한 임무라면 정규직 파일럿에게 시켜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수정학생의 말도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겠다고 한 것은 민소잖아요. 그럼 둘 다 합의했으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그건 비겁해요. 합의라는 게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해야 합의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까지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을 하게 하는 건 합의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정규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써먹고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 지지 않는 걸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수정이였다. 미지가 찾아낸 질문이 미지만 찾아낸 질문은 아니었나 보다. 때마침 비정규직이라는 민소의 신분에 대해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정이는 간결하고 명확한 정리로 선생님의 논리를 차근차근 반박하고 있었다. 다들 수정이의 발표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지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뭔가 말이 안된다는 느낌은 드는데, 뭐라 딱 말할 수는 없어서 미지는 좀 갑갑하기도 했다. 리상샘이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정학생은 빈스토크군의 결정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애초에 계약이, 그러니까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 걸로 봐야 한다는 것이군요. 또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 거기, 손 들은 학생. 3반 연미학생 맞죠? , 이야기해 주세요

 

저기... 저희는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빈스토크 헌법에는 입주자와 방문자를 모두 보호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사실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만 보호하고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민소도 일단은 빈스토크의 방문자라고 할 수 있는데,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나 자기들 입주한 기업의 이익만 보호하려고 하지 방문자도 보호하려고는 안한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헌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거죠.”

 

맞아요... 어머!”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순간 다들 좀 놀라서, 리상샘과 친구들의 시선이 한번에 미지를 향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미지의 모습을 보자 다들 하하하 하며 웃고 말았다. 다시 또 얼굴이 빨개지다가, 미지도 자기가 한 행동이 좀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는 같이 웃었다. 리상샘이 말했다.

 

아고, 미지 학생, 미안해요. 이렇게 존재감이 확실한 미지학생을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우리 수업이 더 명랑해 졌네요. 좋아요, 미지학생. 할 말이 있는 거죠? 발표해 주세요.”

 

미지는 이 우스꽝스런 상황에 계속 웃음이 나서 마음을 고르지 못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리상샘을 보며 말했다.

 

하하, 흠흠. . , . 발표하겠습니다. ... 저는 빈스토크군이 민소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애초에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가 아닌 거 같아요. 오로지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 소설에 나오는 병수와 아내도 그래요. 병수의 아내는 남편과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병수에게 화목한 아내의 모습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완벽하게 화목한 부부를 연기하고, 그게 끝나면 다시 집을 나가버리잖아요. 화목한 부부라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어떤 이익을 얻는 거겠죠. 안정된 수입일 수도 있고, 대단한 명예일 수도 있고요.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구요. 빈스토크는 행복해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만 신경쓰는 껍데기 도시 같아요.”

 

미지의 발표가 끝나자, ~~하는 소리가 교실에 울리더니 다시 까르르 하는 웃음이 아이들 사이에 번졌다. 막 당황한 모습으로 웃겨 주다가 미지가 차분하게 정리된 발표를 하자, 그 의외의 모습이 그 자체로 아이들을 좀 웃겼던 것이다.

 

미지도 뭔가 좀 쑥스럽기도 하면서, 또 뭔가 해 낸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같이 웃었다. 그렇게 다같이 웃고 나서 다시 고요함이 찾아올 때 쯤, 리상샘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하, 미지학생. 고마워요.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제 앉아도 좋아요. ... 하지만 빈스토크에는 파란 우편함이 있잖아요. 이 우편함은 순전히 돈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죠.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파란 우편함에 자기 층의 주소가 적힌 편지가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갖다 주잖아요. 이건 이익과 상관 없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소설 속에서 병수도 이걸 근거로, 빈스토크가 그래도 인간적인 도시라고 홍보하기도 하고요. 배송 성공률이 94%나 된다고 했죠. 그렇다고 하면 빈스토크를 그냥 껍데기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 연미학생?”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파란 우편함도 개인에게 책임을 맡긴 것이지 빈스토크가 책임을 지지는 않죠. 거기 경고문에도 써 있잖아요. 빈스토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요. 민소의 편지가 은수에게 배달되지 못한 것도 병수라는 한 사람이 편지를 가져갔다가 잊어버려서 였잖아요. 물론 병수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느껴서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결국 은수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인만 책임을 느낄 뿐, 빈스토크라는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죠.”

 

2반 선경이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이 소설에서 자꾸 닳아 없어진다’, 혹은 풍화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걸 이야기했는데요, 이 표현들이 왜 이렇게 자꾸 반복되는 건지 저희끼리 이야기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지금 발표를 들으니까 좀 이해가 된 거 같아요. 민소가 은수를 보낼 때, 병수가 아내의 빈 방에서 아내의 흔적을 떠올릴 때, 이 말들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게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거 같아요. 빈스토크는 사람들이 완전히 개인화 되어서 사람들의 관계가 다 메말라 버린 거죠. 그래서 빈스토크는 사막처럼 되 버린 거에요.”

 

타클라마칸처럼?”

 

순간, 미지의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 . 타클라... ? 어머, 맞아요, 그래요. 어머머, 타클라마칸 사막처럼요! , 그러니까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이 제목에서 타클라마칸은 빈스토크를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우와! 선생님,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선경이의 외침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어머, 어머, 어머머머를 연발하면서,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소름을 확인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미지는 그렇게 같이 웃으며 법석을 떨 수도 없이, 팔에서 그치지 않고 등줄기까지 뻗어나가는 소름에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미지의 머리 속에서, 친구들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이어져서, 뭔가 퍼즐이 다다닥 맞춰져 들어가는 느낌에 온 몸이 찌릿했던 것이다.

 

타클라마칸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배달사고도 있었다.

 

민소가 추락한 곳은 타클라마칸이었다. 그런데 민소는 폭탄을 떨어뜨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하다 사고가 난 것이므로, 일종의 배달사고라 할 수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다. 병수가 민소의 편지를 은수에게 제 때 배달하지 못한 것은 배달사고였다. 그런데 병수는, 또 은수와 민소는, 방금 애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인간적인 관계가 메말라 버린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다들 외롭고, 그립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그 가득한 마음의 배달사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타클라마칸에서, ‘배달사고를 겪고 있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을 압축하고 있었다. 세상에... 아놔, 정말... 이런 변태같은 소설가들 같으니라구...

 

 

우리를 구하는 것

 

선경학생, 고마워요. 다른 발표한 친구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 그렇지요. 빈스토크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점점 더 깊어지고 풍부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의 관찰력과 논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명확해진 것도 참 좋아요. 이젠 여러분들이 얼굴이나 몸매만이 아니라 뇌까지도 섹쉬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정말 좋아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근원은 저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겠지만요. 하하.”

 

아이고... 잘 나가다가 뜬금 없이 또 시작된, 저 근본도 논리도 없는 리상샘의 외모 개그에 아이들이 정말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온갖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듯한 표정들을 보였지만 물론, 진심으로 불쾌해 하는 아이는 없었다. 사실은 다들, 리상샘이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름, 뿌듯해 하고 있었다.

 

우아.. 이 열렬한 환호,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인데요,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무슨 어려운 해석이 필요하거나 그런 부분이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좌아~발적으로 하도록 하죠. , 그럼 혜민학생부터 시작해 보죠. 하하.”

 

리상샘이 웃으며 좌아~발적으로, 자기 왼편에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혜민이를 불렀다. 혜민이는 이게 뭐야~ 싶은 표정이긴 했지만, 역시 같이 웃고 있었다. 혜민이가 말했다.

 

.... 다들 그랬을 거 같은데, 일단 되게 감동적이었어요. 국가가 구조를 포기한 사람을 수 십 만의 사람들이 함께 구했다는 게요. , 물론, 그 사람들이 다 같이 타클라마칸에 간 것은 아니지만, 20만 개로 나눠진 타클라마칸의 실시간 인공위성 사진을 그 사람들이 다 같이 인터넷으로 찾아본 거잖아요. 그게 뭔가, 좀 감동적이었어요.”

 

맞아요. 특히나 마지막에 그... 얼마더라?”

 

, 연미학생, 이백칠십칠만 사천팔백육십칠, 이지요.”

 

, 맞아요 선생님. 그 이백칠십만.. , 그게 넘는 그 접속자 수가 나왔을 때, 완전 감동 먹었어요.”

 

, 좋습니다. 그랬군요. 그럼 다음은 지원학생? 이야기해 주세요.”

 

... ... 저는, 은수의 편지가 좋았어요. 민소는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이고, 은수는 지금 결혼할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자기 때문에 민소가 그렇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래서 그 사람을 구하려고 편지를 쓴 게, 그 내용이, 좀 안쓰럽기도 하고, 괜히 고맙기도 하고 그랬어요. 어쨌든 그 편지가 파란우편함으로든, 인터넷으로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게 사람들을 움직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편지를 잘 써야겠구나.”

 

와하하... 순간, 지원이의 말에 아이들이 한번에 웃었다. 미지도 내내 조용히 듣다가 편지를 잘 써야겠구나하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좀 엉뚱하게 들린 지원이의 말에 같이 웃었다. 하여간 이 엉성한 얼음공주,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미지는 밝은 분위기에 용기가 나서 손을 들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좋았어요. 어쨌든 결국 민소를 구한 거잖아요. 민소가 막 몸도 못 움직이고, 의식도 잃고, 점점 죽을 거 같다가 마지막에 헬기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와서 진짜 다행이었어요. 진짜 그렇다니까요. 인터넷으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구요.”

 

순간, 리상샘의 눈빛이 고요해 졌다.

 

다들 미지에게 공감하는 듯한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고, 뭔가 차갑고, 뭔가 더 날카로워진 느낌으로, 리상샘이 고요하게 미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 미지학생. 민소가 정말, 구조가 되었나요?”

 

아니,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하는데 그게 왜 당연하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 그래, 이거. 미지는 소설의 뒷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잖아요. ‘멀리서 하느님의 사자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 사자가 내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어쩐지 HH-60G의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분명히 민소는 헬기 소리를 들었다고요. 그럼 구조된 거 아닌가요?”

 

두 개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민소는 지금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 민소는 엔진 소리처럼들렸다고 했지요. 환청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요. 둘째, 설령 그것이 헬기라고 해도, HH-60G가 빈스토크군의 헬기이거나 민소를 구하기 위한 빈스토크의 민간헬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헬기는 적국인 코스모마피아의 것일 수도 있지요.”

 

아니 이 사람은 대체, 뭐가 그렇게 베베 꼬여서, 도대체가 해피엔딩이란 걸 배겨내지 못하는 무슨 심각한 상처라도 있는 건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일도 왜 들춰내서 괜히 사람 기분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건지, 그것도 하필 미지가 기분 좋게 발표할 때 이렇게 찬물, 아니, 찬물로는 부족해, 완전 딴딴한 얼음덩이를 면상에 대놓고 날리는 이런 시츄에이션을 만드는 건지, 미지는 속으로 괜히 마음이 상해서 궁시렁 궁시렁 대고 있었지만, 사실은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면 그건,

할 말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위기의 상황. 뜨거운 사막에서 아무도 없이, 누군가 구하러 와 줄 거라는 간절한 바람만큼이나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 싸여, 점점 죽음으로 가라앉는 그 절박하고 고독한 민소의 상황을, 정말이지 절박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그가 살아남기를 끝까지 절박하게 바랬다면, 우리는 끝까지 치밀해야 했다. 치밀하게, 그의 구조를 확인해야 했다. 확인해서, 그의 생존과 귀환과 다시 시작한 그의 삶을 확인해야 했다. 그걸 할 수 없다면, 그럴 가능성이라도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성급하게 해피엔딩을 말할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의 생존을 바랬다면... 그냥 소설 한 편에 너무 지나친 반응일까? 아니다...

 

물론 소설일 뿐이지만, 그냥 소설일 뿐이라면,

우리가 같이 이렇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지가 말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도,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한껏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볼까지 발그레해져서, 한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에, 다들 뭐라도 하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리상샘은 그 고요함을 충분히 견딘 뒤에, 말을 이었다.

 

이백칠십칠만 사천팔백육십칠. 이 숫자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일이란 물론, 쉽지 않지요.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모인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바로 해결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였다 해도, 그들 중 누군가는, 우리들 중 누군가는 끝까지, 치밀하게, 그의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쓰러진 그를 안고, 호흡을 확인하고, 들것에 실어서 구조헬기에 그를 싣는 일을 우리가 하면 좋겠지만, 만일 그럴 수 없다면, 끝까지, 지켜보는 일은 우리가 해야지요. 소리 지르는 일은 우리가 해야지요.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기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이...”

 

까똑!”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들, 이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온 것인지 당황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까똑, 까똑!”

 

이런 세상에... 다시 또 그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미지도 좀 기분이 나빠져서, 이 카톡 알림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 하고 돌아봤다가 순간, 깜짝 놀라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그 방향과 거리를 종잡을 수 없었는데, 알고보니 그 카톡 소리는 바로 미지 옆, 단비의 핸드폰에서 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미지만큼이나 단비도 놀랐는지, 뭘 어떻게 꾸며도 선머슴아 같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단비가 이 때 만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은 똥그래져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 단비학생. 단비학생인가요?”

 

리상샘의 부름에도, 단비는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냥 굳어버렸다.

 

단비학생. 제가 카톡은 안된다고 했지요?”

 

리상샘은 수업을 시작할 때 말했던 그 규칙을 다시 확인했다.

 

벌입니다. 그 카톡 메시지, 이곳에서, 모두에게, 읽으세요. 큰소리로.”

 

리상샘은 비교적 부드럽게 말했지만, 말하는 마디마디마다 어떤 서운함과 적지 않은 분노가 스며 있었다. 미지는 이 모든 일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단비만큼이나 몸이 굳어버린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드르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단비가 일어섰다. 단비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더니 읽기 시작했다.

 

... 세월호 유가족, .. 후원 청소년 모임 노랑나비의 회원님들께 알립니다.”

 

단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비의 목소리만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

미지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말을 듣자마자,

뉴스에서, 라디오에서, 포털에서, 페북에서, 내내 보고 들어서 익숙하던 그 말이,

그 순간만큼은 뭔가, 이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듯이 너무도 낯설어서,

미지는 온 몸의 신경이 곤두 선 채로 몸이 떨렸다.

미지는 조용히 리상샘을 보았다. 리상샘도 무척 놀란 듯했다.

리상샘의 눈빛도, 떨리고 있었다.

 

“...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67일이 지났습니다. 오늘은 930일이지만, 167번째 416일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세월호 유가족 분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분들에게 시간은, 416일에서 멈춰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월호의 아이들을,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 세월호의 유가족 분들은 구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바라는 서명운동을 내일 오후 6, 시청 앞 광장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회원님들은... ”

 

단비의 목소리가 고요한 교실을 채우고 있었다.

 

미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교실을 돌아 보았다. 아이들은 다들, 약간은 좀 멍해진 채로, 단비가 읽어내려가는 메시지를 같이 듣고 있었다. 리상샘도, 무슨 일이 일어나던 반짝반짝 빛내던 평소의 그 눈빛은 내지 못하고, 멍하니 교탁 어디를 바라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뭔가 좀 슬프고, 뭔가 좀 아프고, 뭔가 좀 부끄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때라면 그게 고소해 보일 텐데, 미지도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무심코 단비의 책상을 내려다 본 단비는 잠깐, 놀랐다. 그리고 단비에게 좀 미안하고, 좀 부끄럽고, 그리고 그냥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았다.

 

그곳에는,

반으로 접혀 있던 학습지가 살며시 펼쳐져,

수 십 개의 작은 노란 리본이 모여,

커다란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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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배달사고

병섭4 2014.11.30 22:41

스마트폰 어벤져스

배명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름부터 뭔가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보다 4배나 커다란 크기에 겨울이면 눈이 오기도 하고 고이는 물은 대부분 사람이 먹을 수 없어 더 위험한 사막. 그러나 이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로 이어진 오아시스를 따라 아랍, 인도, 티벳, 중국, 러시아의 땅들이 붙어 있어 예부터 비단길로 유명했다.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신임장을 받고 출발해서 17년 동안이나 중국에 머물며, 그 동안의 기록을 동방견문록으로 정리한 마르코 폴로가 둘러간 곳도 바로 이곳 - 타클라마칸 사막이었다.

 

미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검색하자 스마트폰에 떠오른 이야기였다. ‘위키 백과라는 사이트였는데, 화면을 밑으로 내리는 대로 타클라마칸의 지형과 기후, 인물, 민족, 분쟁 등등 온갖 이야기들이 밀려 나왔다.

 

다른 블로그에 링크된 3D 지도 사이트 - 구글 어스에서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는 화면에서 시작해 카메라가 줌인하듯 지정된 타클라마칸의 지역으로 쭈우우욱 확대해 들어가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단비야, 이거 봐봐! 오오, 이거 신기한데!”

 

미지는 지구 밖에서부터 시작해 지구의 어느 지역까지 쭈우욱 떨어져 내리는 화면을 보는 게, 이게 생각보다 엄청 신기하고 짜릿했다.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는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으아악!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재밌어서 인제 다른 것 좀 보자는 단비의 걸걸한 한 마디가 나올 때까지 미지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화면을 다시 봤다. 그렇게 확대해서 본 타클라마칸은 정말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누렇게 말라붙은 바다 같았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타클라마칸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볼 수도 있었다. 놀랐던 것은 모래언덕이 바람을 따라 진짜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과학이나 지리시간에 몇 번 듣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영상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람이 심한 날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높은 바위산에서 캠코더로 찍어서 빨리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마치 모래로 된 파도가 서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나르면 수 천 대의 트럭으로도 수 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를 그 거대한 작업을 모래바람은 단 하룻밤에 해 내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그 작은 화면만으로도 그 영상은 진짜 대단했다. 미지는 정말 자연의 신비나 어떤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듯해서 놀라웠다.

 

 

스마트폰 논쟁

 

미지는 단비와 함께 리상샘이 내 준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지난 시간에 리상샘은 다음 시간에 할 소설로 배명훈 작가의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를 소개하면서 스마트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소설에 대해 검색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오오~~ 하는 웅성거림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무언가 금지된 것이 다시 허락될 때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아이들의 표정 속에 있었다. 하지만 미지는 모든 아이들의 핸드폰이 다 스마트폰인 듯이 너무도 당연스레 말하는 리상샘이 좀 거슬려서 좀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스마트폰 없는 사람들은 뭐 하나요?”

 

미지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아직 2G폰을 벗어나지 못한 미지였다. 새로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비싼데다가 액정도 쉽게 깨지는 거 같고, 뭐 좀 할려고 하면 그놈의 까똑. 까똑.’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는 게 공부를 할려면 없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개뿔!!

 

미지는 사실 스마트폰이 정말정말 갖고 싶었다. 미지네 학교와 반의 온갖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그 단톡방도 언제 어디서든 바로 들어가고 싶었고, 오늘 학교 급식의 점심메뉴가 뭔지 클릭만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그 간편함도 즐기고 싶었고, 멋지게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당장 프사에 올리고도 싶었다.

 

또 멋진 글과 사진과 영상을 올려서 미지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며 재치가 있는지 친구들에게, 아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고도 싶었다. 미지가 무슨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기 보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일이 정말 간단하니까 말이다. 페이스북에 사진 몇 장, 동영상 몇 개로 단번에 수십만의 좋아요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었다. 사진작가가 꿈인 우리 반 영주는 매주 월요일에 우리 학교 5, 전망이 좋은 서쪽 창문에서 학교의 풍경사진을 찍었다. 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공원에 작은 연못과 조그만 언덕과 숲을 끼고 잘 정돈된 산책로에 저녁이면 조명도 은은해서 우리 학교는 꽤 예쁜 학교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영주는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빼먹기도 했지만, 우리 학교의 그 이쁜 풍경을 스물 몇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가 2학년에 올라오는 2월에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 학교에서 1년을 보낸 짧은 감상을 덧붙여서 말이다.

 

영주의 사진은 순식간에 퍼져 놀랍게도 불과 열흘만에 좋아요3천이 넘었다. 댓글에는 우리 학교 애들이 써 놓은 응원과 공감의 말도 있었지만, 졸업생 언니들의 추억 돋는 댓글도 있었고 이제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는 중3 아이들의 감탄과 기대에 찬 댓글도 있었다. 근처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댓글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외국어로 된 댓글도 있었다. 내 손 안에서 간단한 조작 몇 번이면 내가 만든 무언가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간단하고 대단한 일도 먼저 스마트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에효, 작은 한숨이 미지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청소년 요금제로 한 달에 이 삼만원 정도면, 왠만한 스마트폰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정도 돈은 미지의 용돈으로도 해결될 만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빠였다. 다른 것에는 그리 엄하지 않은 아빠가 유독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에는 엄격하게 반대했다. 스마트폰은 바보상자이고,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뜨리는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위험한 걸 아빠는 왜 샀으며, 고작 10만원 어치 사 놓은 걸로 무슨 대단한 투자인양 왜 맨날 주식시세는 들여다 보고, 주말마다 몇 시간 넘게 야구에, 드라마에, 예능에 빠져서 밥 먹다가도 맨날 엄마한테 혼나는 아빠는 뭐냐고 미지가 따져 물어도 아빠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는, 정말이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그런 일은 스마트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반복되었는데, 얼마 전에 아빠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지가 씩씩 거리며 거의 소리를 지를 듯이 아빠에게 마구 따져 묻었을 때, 대답은 않고 내내 듣기만 하던 아빠가 말했다.

 

“..., 염미지.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하자.”

 

아빠는, 일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웃음기 하나 없이 아주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뭔가 뜨겁고 날카롭고 빨간 경고등이 윙윙 대는 듯한 아빠의 표정에 미지는 일단 멈춰 섰다. 뭔가 더 말을 하면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아빠가 성큼성큼 미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려도, 아빠를 쫓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거의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무서웠다. 이 쯤 되면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아빠를 쫓아 가야 하나? 한 번 더?

 

미지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화를 내는 아빠를 보는 것도 물론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아빠랑 그렇게 진짜 싸우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그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뭔가 깝깝하고 답답하고 어색한 그 시간이 미지는 정말정말 불편했다. 거기까지 가야 하나? 스마트폰 때문에? 아빠에 대해 미지의 화가 풀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빠의 말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이다. 서로 진짜로 화를 내고 싸워서 그 메마른 시간이 얼마나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더 아빠에게 말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스멀스멀, 그 때 풀리지 않은 화가 뜨끈하게 속에 차올라서 미지는 가슴이 두근댔다. 괜히 리상샘에게 질문을 가장해 그렇게 쏘아 붙인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대답이 또 기가 찼다.

 

... 미지학생. 스마트폰을 갖는 능력보다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게 더 큰 능력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짝꿍으로 데려오세요.”

 

아니 폰을 가져오라면서, 폰이 없다는데, 그 시간에 사람을 데려오라니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이냐? 꼭 질문을 하면 대답은 안하고 맨날 능력이 어쩌고 하는 그런 이상한 쫄리는 말같은 걸 던져서, 순간 우리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냥 스윽 빠져 나가는 게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특기란 걸 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당했다. 순간 뭔가 알쏭달쏭해서 미지가 더 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리상샘은 미지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고는 스윽, 교실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아놔, 진짜 이 남자인간들을 그냥...

 

벌써 몇 번이나 수업에 빠지고 딴 데로 새 버렸던 단비가 오늘만큼은 이 수업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미지는 아침부터, 자리까지 몰래 바꿔가며 단비 옆을 내내 지키다가 단비를 방과후교실로 끌고 왔다. 단비에게는 스마트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신형에다, 예쁜 폰트에다가, 토끼양 케이스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단비의 핸드폰은 스마트폰이긴 했지만 완전 구형에다가 액정은 다 깨져서 전화나 될까 싶은 걸 들고 다니다가, 얼마 전부터 단비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렇게 예쁜 아이를 들고 나타났다. 으이그, 기집애, 뭔 일인지는 몰라도 단비, 너의 이 이쁜 아가는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었던 거야. 오늘은 이 언니가 네 스마트폰 좀 써 주실께. 미지가 무슨 말을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는 단비를 옆에 두고, 미지는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이야기 속에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스마트폰은 할 수 없는...

 

“...미지학생? 대답해 보세요.”

 

으잉? 이게 무슨 소리지?

 

내내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미지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오늘 미지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교실의 맨 뒷줄에 앉아서, 책상에 코를 박을 듯이 몸을 숙이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지는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슬쩍 폰의 전원을 끄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옆눈으로 단비를 쳐다 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무슨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비는 미지의 당황해 하는 눈길은 전혀 모른 채 소설 학습지에다 노란색 색연필로 박박 낙서를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기집애. 으이그, 이걸 짝꿍이라고... , 짝꿍!

 

그제서야 미지는 리상샘이 짝꿍끼리 얘기해서 소설에 대한 토론주제를 정하고 같이 이야기 해 보자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때도 리상샘의 말을 귀로만 듣고는,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 이런... 이건 사고였다. 이건 정말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순전한 사고였다. 미지는 정말 이 소설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제목이 특이해서 무심코 넘겼다가 재밌어서, 점심시간에 미지는 이 소설을 한 번 다 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으면 대강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상샘과 아이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학생, 빈스토크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죠?”

 

리상샘의 질문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가벼운 연기가 더 필요했다. 10여년 학교 생활에, 졸고 있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연마했던 필살의 연기력을 발휘해서, 미지는 벌써부터 같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을 만들고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며 진지한 목소리로 리상샘에게 질문을 다시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은수는 폭격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격추되어 죽을 위기에 있지요. 그런데 빈스토크 방위군은 은수를 구하러 가지 않아요. 은수가 수행한 임무는 선제공격을 금지한 국제법을 어기는 불법적인 비밀임무였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를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펼치면 빈스토크가 불법적인 공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겠지요. 이 부분을 근거로 많은 학생들이 빈스토크를 비난했어요.”

 

, 그래, 은수, 기억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추락했지. 그래, 국제법, 아까 그걸로 검색도 했었어. 그거라면 대답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래서, 질문이 뭐지?’

 

미지는 리상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검색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 되려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리상샘의 질문에 또박또박하게 답하는 자신을 상상하기까지 하면서, 미지는 리상샘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혜민이는,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밀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병사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빈스토크군은 은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빈스토크군이 은수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은수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중에서, 미지학생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 ... 선택하라구요?

 

순간, 미지는 머리 속이 하얘졌다. 분명 읽은 소설이라 대충 무슨 이야기인가 알기는 하겠는데, 입장을 선택하라니,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라니. 그런 걸 생각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며 검색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까 잠시나마 솟았던 자신감 넘치는 미지는 쨍그랑 부서지고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초라한 여고생만 남았다.

 

“..., 저기... 그게...”

 

리상샘은 그런 미지를 보다 빙긋이 웃고는 말했다.

 

미지학생, 스마트폰이 참 대단하긴 해도, 결국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하는 그 힘까지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걸 잊지 말고, 잠시, 서 있는 채로, 생각을 정리해 주길 바래요. 먼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미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께요.”

 

리상샘의 말은 차분했지만, 미지는 전혀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런 쪽팔림이라니...

 

미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괜히 옆에 앉은 단비를 흘겨 보았다.

 

어느 새 단비는 아까 그 박박 낙서하던 학습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놓고는 뭔가 열심히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기집애가 의리 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하지만 단비한테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비는 원래 이런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하는 애였다. 단비한테 오늘 그냥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것도 미지였다. 이건 분명 미지의 책임이었다. 미지는 선 채로, 다시 소설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빈스토크라는 도시가 있다. 가로가 2키로, 세로가 3키로에 최고 높이가 674층인 엄청 거대하고 화려한 이 건물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이 도시 안에는 군대도 있고, 의회도 있고, 인공위성 제작과 서비스라는 주요 산업도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라 할 만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곳이어서, 이 건물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돈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돈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빈스토크는 그게 유난히 심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 소설의 남주인 은수였다.

 

사랑하는 연인 민소가 빈스토크에 있는 인공위성 제작회사인 이엔케이에 입사하면서 연락을 끊자, 은수는 군대에 들어가 해군 파일럿을 지원한다. 빈스토크는 시민권이 없으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빈스토크 방위군의 경력이 있으면 빈스토크 영주권을 얻는데 아주 유리했다. 문제는 은수가 빈스토크군의 정규군이 아니라 빈스토크 해군에 고용된 방위업체의 비정규직 파일럿이라는 것이었고, 하필 제대하기 6개월 전에 은수가 폭격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있어 봐, 비정규직이라고 했지? 빈스토크 해군은 왜 이런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비정규직 파일럿에게 맡긴 거지?’

 

 

타클라마칸과 배달사고

 

국가가 비겁해요. 은수는 비정규직 파일럿이었어요. 어찌 됐든 정규직보다 불안한 자리이고 언제든 짤릴 수 있는 자리라고요. 혜민학생의 말대로 그게 정말 중요한 임무고 필요한 임무라면 정규직 파일럿에게 시켜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수정학생의 말도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겠다고 한 것은 은수잖아요. 그럼 둘 다 합의했으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그건 비겁해요. 합의라는 게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해야 합의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까지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을 하게 하는 건 합의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정규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써먹고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지지 않는 걸로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수정이였다. 수정이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해서 선생님의 논리를 차근차근 반박하고 있었다. 다들 수정이의 발표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정학생은 빈스토크군의 결정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애초에 계약이, 그러니까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 걸로 봐야 한다는 것이군요. 또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 거기, 손 들은 학생. 3반 연미학생 맞죠? , 이야기해 주세요

 

저기... 저희는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빈스토크 헌법에는 입주자와 방문자를 모두 보호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사실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만 보호하고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은수도 일단은 빈스토크의 방문자라고 할 수 있는데,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나 자기들 입주한 기업의 이익만 보호하려고 하지 방문자도 보호하려고는 안한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헌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거죠.”

 

맞아요... 어머!”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순간 다들 좀 놀라서, 리상샘과 친구들의 시선이 한번에 미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미지의 모습을 보자 다들 하하하 하며 웃고 말았다. 다시 얼굴이 또 빨개지다가 미지도 자기가 한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었다. 리상샘이 말했다.

 

아고, 미지 학생, 미안해요. 이렇게 존재감이 확실한 미지학생을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우리 수업이 더 명랑해 졌네요. 좋아요, 미지학생. 할 말이 있는 거죠? 발표해 주세요.”

 

미지는 이 우스꽝스런 상황에 계속 웃음이 나서 마음을 고르지 못하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리상샘을 보며 말했다.

 

하하, 흠흠. . , . 발표하겠습니다. ... 저는 빈스토크군이 은수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애초에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가 아닌 거 같아요. 오로지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 소설에 또 나오는 병수와 아내도 그래요. 병수의 아내는 남편과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병수에게 화목한 아내의 모습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는 완벽하게 연기를 하고 다시 나가버리잖아요. 화목한 부부라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얻는 어떤 이익이 있는 거겠죠.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구요. 빈스토크는 행복해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만 신경쓰는 껍데기 도시 같아요.”

 

오오~~하는 소리가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더니 다시 까르르 하는 웃음이 아이들 사이에 번졌다. 막 당황한 모습으로 웃겨 주다가 미지가 차분하게 근거를 들어서 정리된 발표를 하자 그 의외의 모습이 그 자체로 아이들을 좀 웃겼던 것이다. 뭔가 좀 쑥스럽기도 하면서 뭔가를 또 해 낸 거 같은 만족감이 들어서 나중에는 미지도 같이 웃었다. 그렇게 다같이 웃고 나서 다시 고요함이 찾아올 때 쯤, 리상샘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하, 미지학생. 고마워요.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제 앉아도 좋아요. ... 하지만 빈스토크에는 파란 우편함이 있잖아요. 이 우편함은 순전히 돈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죠.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자기 층의 주소가 적힌 편지가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갖다 주잖아요. 이건 이익과 상관 없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배송 성공률이 94%나 된다고 했죠. 그렇다고 하면 빈스토크를 그냥 껍데기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 연미학생?”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파란 우편함도 개인에게 책임을 맡긴 것이지 빈스토크가 책임을 지지는 않죠. 거기 경고문에도 써 있잖아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요. 은수의 편지가 민소에게 배달되지 못한 것도 병수라는 한 사람이 편지를 가져갔다가 잊어버려서 였잖아요. 물론 병수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느껴서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결국 은수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인만 책임을 느낄 뿐, 빈스토크라는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죠.”

 

2반 선경이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이 소설에서 자꾸 닳아 없어진다’, 혹은 풍화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걸 이야기했는데요, 왠지 사막을 연상시키는 거 같다는 거만 이야기하고, 이 표현들이 왜 이렇게 자꾸 반복되는 건지 저희끼리 이야기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지금 발표를 들으니까 좀 이해가 된 거 같아요. 은수가 민소를 보낼 때, 병수가 아내의 빈 방에서 아내의 흔적을 떠올릴 때, 이 말들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게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거 같아요. 빈스토크는 사람들이 완전히 개인화 되어서 사람들의 관계가 다 메말라 버린 거죠. 그래서 빈스토크는 사막처럼 되 버린 거에요.”

 

타클라마칸처럼?”

 

순간, 미지의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 . 타클라... ? 어머, 맞아요, 그래요. 어머머, 타클라마칸 사막처럼요! , 그러니까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이 제목에서 타클라마칸은 빈스토크를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우와! 선생님,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선경이의 외침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어머어머, 어머머머를 연발하면서,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소름을 확인하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미지는 그렇게 같이 웃으며 법석을 떨 수도 없이, 팔에서 그치지 않고 등줄기까지 뻗어나가는 소름에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지의 머릿 속으로 뭔가 퍼즐이 다다닥 맞춰져 들어가는 느낌에 온 몸이 찌릿했던 것이다.

 

그건 타클라마칸만이 아니었다. ‘배달사고도 있었다. 은수가 추락한 곳은 타클라마칸이었다. 그런데 은수는 폭탄을 떨어뜨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하다 사고가 난 것이므로 일종의 배달사고라 할 수 있었다. 병수가 은수의 편지를 민소에게 제 때 배달하지 못한 것은 배달사고였다. 그런데 병수는, 또 은수와 민소는, 방금 애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인간적인 관계가 메말라 버린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외롭고, 그립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들이 다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그 가득한 마음의 배달사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타클라마칸에 있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을 압축하고 있었다. 아놔, 정말, 이런 변태같은 소설가들 같으니라구...

 

 

우리를 구하는 것

 

선경학생, 고마워요. 다른 발표한 친구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 그렇지요. 빈스토크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점점 더 깊어지고 풍부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의 관찰력과 논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명확해진 것도 참 좋아요. 이젠 여러분들이 얼굴이나 몸매만이 아니라 뇌까지도 섹쉬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정말 좋아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이 모든 좋은 일의 근원은 저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겠지만요. .”

 

아이고... 잘 나가다가 근본도 논리도 없이 또 시작된 저 뜬금 없는 외모 개그에 아이들이 정말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온갖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듯한 표정들을 보였지만 물론, 진심으로 불쾌해 하는 아이도 없었다. 다들 리상샘이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름, 뿌듯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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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빨간약, 혹은 대일밴드(완결)

자전거도둑 2014.09.29 11:15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치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주머니에, 나중에 요오드 용액이란 걸 알게 된 소독용의 빨간약과 상처에 붙이는 대일밴드를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책상에 앉기는 했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야자시간을 보내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더 들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가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일 거야.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죄책감이라는 상처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거 맞죠?”

 

, 맞아요. 혜민이가 의외로, 이런 야한 부분을 잘 찾아 내는군요.”

 

리쌍샘이 싱긋 웃으며 혜민이를 보았다. 혜민이가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히며, 같이 싱그레 웃었다.

 

. 혜민이가 말한 부분을 보면, 김승호가 분명 서미혜의 가슴을 만진 것이 맞는 거 같아요. 그 전에 김승호는 서미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그 도톰한 살덩이가 서미혜의 이두근은 아니겠죠. 아니, 이 사람, 에어로빅을 제대로 했는데?, 이런 건 아닐 거에요.”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웃었지만, 교실의 공기가 뭔가 팽팽해 지고 있었다. 잠깐씩 딴짓을 하던 아이들도 얼굴이 발그레 해 져서 다들 리쌍샘에게 완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서미혜는 김승호라는 이 남자가, 이제 만난 지 두 번 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저항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서미혜는 그 긴장된 순간에조차 오빠를 생각한 것이죠. 아니, 어쩌면, 오빠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럼, 대체 오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길래 그러는 걸까요? 이걸 모둠토론으로 하..”

 

죄책감이요.”

 

수정이의 갑작스런 대답에 리쌍샘이 약간 당황해 하며 말했다.

 

우와, 이런, 수정학생. 벌써 찾았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근거를 찾아야죠. 소설에서 어떠..”

 

사진이요. 서미혜는 자신이 오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출도 했고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빠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오빠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수정이의 대답은 시원하다기 보다, 뭔가 점점 당돌해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게 미지만은 아니었다. 리쌍샘도 표정이 심각해 지고 있었다.

 

수정학생. 잘 찾아냈어요.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있어요.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 했죠. 간질 발작을 한 이후에 오빠에게 뒷마당 산책을 시키는 건 서미혜가 할 일이었어요. 그 때도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했죠. 그러다가 그 체력장 사건이 있었죠. 체력장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다가 갑갑해서 깨 보니, 오빠가 서미혜의 몸을 누르고 있었죠. 옷은 다 벗겨진 채로. 알고 있죠?”

 

“...

 

누가 봐도 오빠를 혐오해도 될 만한,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서미혜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거죠?”

 

오빠가 잘못한 건 맞아요. 분명히 오빠는 잘못했죠. 하지만 서미혜는 오빠가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때는 어려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래서 오빠가 죽었지만, 분명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미혜가 가지고 다니는 그 사진도 오빠의 흉칙한 모습이 아니라,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전의 예쁜 사진이라고 했잖아요. 서미혜는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더 죄책감이 커지구요. 자전거도 마찬가지에요. 자전거로 자꾸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방법인 거죠. 자전거로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오빠에게 못해주었던 것을 대신해 주려는 거죠. 말도 안되는 행동이지만, 말도 안되는 행동으로라도 덜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에요. 죄책감 때문이에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을 때, 죄책감이 더 커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면서, 서미혜의 감정이 그렇게 이해가 안되요?”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아무리 평소답지 않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말을 하다가 저 혼자 흥분해서 더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한테, 다구나 리쌍샘한테 이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수정이가 잘못하는 거였다. 미지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상처라는 함정

 

수정 학생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어찌되었건 서미혜는 오빠를 죽였어요. 그것 때문에 서미혜가 얼마나 상처 받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남자를 노골적으로 꼬시고, 그것도 이 남자가 안되니까 다른 남자를 또 꼬시고 그러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뭔가 핑계 같아요.”

 

리쌍샘을 보던 수정이의 눈길이 미지를 향했다. 미지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미혜는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타고 김승호 앞을 쌩 지나가죠. 아는 척도 안하고요. 김승호를 사랑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거에요. 죄책감이건 뭐건 간에, 서미혜는 김승호를 그냥 이용했던 거에요.”

 

미지학생. 발표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명확하지 않은 게 있어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쳤다고 했는데, 근거가 뭐죠? 김승호에게 한 행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있나요?”

 

리쌍샘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지에게 물었다. 수정이의 말을 끊고 수정이의 이야기에 반박할 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평소답지 않은 리쌍샘의 공격적인 질문을 듣고 미지는 당황했다. 리쌍샘, 나는 선생님 편이라고요,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수정학생. 말해 보세요. 서미혜가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그건...김승호가...”

 

김승호는 그날 밤, 서미혜로부터 오빠 이야기를 듣고 뭔가 함정인 거 같다는 느낌에 서미혜의 방에서 도망쳐 나오죠. 그리고 보름 만에 그날, 서미혜를 그야말로 잠깐, 스치듯이 만나죠. 김승호도 그 보름 동안 서미혜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김승호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고 이야기 하죠. 그 자전거는 서미혜가 새로 샀을 수도 있고, 빌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옆집 봉구네 자전거를 훔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김승호의 주관적인 판단이에요. 이 주관적인 판단 이외에 서미혜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있나요?”

 

조용히, 침착하게 말했지만, 리쌍샘의 목소리에는 어떤 날카로운 근엄함이 있었다. 뭔가 더 냉정해 주기를, 뭔가 더 치밀하고 책임감 있게 소설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미지는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이도,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약간은 다들,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상처 받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상처 받은 사람은 대개 너무 아파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도망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마음이 어떠한지도 잘 모르게 되지요.”

 

아이들이 조용했다. 잠시 토론을 따라 격하게 오고갔던 감정 때문인지, 아까처럼 아이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뭔가 진중한 분위기였다. 리쌍샘이 말을 이어갔다.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상처는 어떻게 함정이 되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수정이와 미지 학생 덕분에 우리가 순식간에 이 소설의 핵심으로 쑤욱, 들어올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그럼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 아니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 보세요. 이 소설에서 그 사람을 찾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둠별로 토의해 주기 바랍니다.”

 

리쌍샘을 보기 위해 칠판을 향했던 미지와 수정이는, 다시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민이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미지와 수정이의 얼굴만 계속 살폈고, 지원이는 수정이를 먼 눈길로 지켜보았다. 수정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리해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김승호야.”

 

그래, 맞아, 그런 거 같지? 뭐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김승..”

 

당연하지.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서미혜랑 김승호 밖에 없잖아. 서미혜가 아니면 김승호겠지. 당연한 거 아냐? 문제는 이유잖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는 혜민이의 말을 끊고, 미지가 차갑게 말을 던졌다. 그 때는 미지도 분명히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틀어져서 노골적으로 수정이에게 시비를 거는 투였다. 수정이가 가까스로 참는다는 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미지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야.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서미혜의 이야기를 빼고는, 나머지 서미혜에 대한 모든 판단은 김승호가 자기 멋대로 한 거야. 그러니까..”

 

그거 누가 몰라? 김승호가 왜 그런 거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미혜가 자전거 타는 걸 보고 남의 자전거니 다른 남자 꼬시니 그러고 있냐고? 어렸을 때 상처가 뭐?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어? 다들 다치고 낫고 그런 거잖아. 뭐가 얼마나 무서워서 그렇게 맨날 도망가냐고, 배배 꼬여서. 누구처럼.”

 

정말 위험했다. 이러다가는 뭔가 일이 단단히 날 것 같았다. 혜민이가 어떻게든 둘의 이야기를 끊어 보려고 나섰다.

 

...저기...얘들아? 저기 소설을 보면, 김승호가 무서워 하는 게 딱 하나 나와. 저기, 아빠가 실수로 수도상회에서 소주 2병을 안가져와서 속상해서 막 울다가, 다음에 소주 2병 훔친 거 기억나지? 그 때 저기... 혹부리 할아버지한테 걸려가지구 김승호 아빠가 당황하니까, 김승호가 자기가 했다고 그러잖아. 그리고는 자기 아빠한테 뺨 막 맞고. 그 때 죽는 한이 있어도 에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하잖아. 그러니..”

 

그래. 김승호가 정말 두려워 하는 건 아빠가 되는 거야.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다구.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거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것일 수 있는지 김승호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도망갔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서미혜를 돌봐 주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그게 말이 되냐?”

 

미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마구 쏘아 붙였다. 아까까지 서미혜를 비난하다가 이제는 김승호를 마구 비난하고 있는 자신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어디부터 꼬였는지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외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수정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꽁한 표정을 짓고는, 내내 미지에게 무언가 감정이 있는 거 같았다. 그 때부터 꼬였다. 왠지 이러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지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운함과 속상함을 어떻게 참을 방법이 없었다. 원래 미지는 이런 애가 아니었다. 미지는 명랑하고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뭔가 원래 자기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에 미지는 더 짜증이 났다.

 

자기랑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더 이해하고 감싸주고 그래야지. , 무슨 드라마나 연애소설 봐도 다 그래. 그런 사람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그러는 게 더 당연한 거야. 자기랑 비슷한 상처를 가진, 정말 예쁜 사람, 그것도 자신의 품에 안기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을 그렇게 보냈다고? 무슨 그런 한심한 사람이 어디 있냐?”

 

, 염미지. 네가 뭘 알아? 네가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지 알기나 해?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는데도, 그게 안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고, 억울하고, 열받고 그런 걸 니가 이해할 수 있어? ”

 

이해해.”

 

, 뭐라구? 이해한다구?”

 

그 때까지, 그래도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수정이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졌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수정이는 미지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자신의 말을 조용히 씹어 뱉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대일밴드, 혹은 빨간약

 

어떻게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교실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미지는 정신이 없었다. 곧 종이 울려서 자리에 앉아 야자시간이라고 수학책을 펴 놓기는 했는데, 그냥 눈만 문제집을 향하고 있을 뿐 머릿속에서는 내내 아까 전의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 그걸 이해하냐고? 그러니까 그게...

 

사실 미지는 이제까지, 무슨 대단한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시청 공무원이셨다. 뭐가 좀 아쉬울 때는 있어도 부족한 것은 없는 살림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걱정과는 달리, 미지의 생활에 대해 그리 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그럭저럭 공부를 해 내는 탓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부터, 엄마는 약간 거리를 두고 미지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는 편이었다. 아빠는 시청일로 이래저래 바쁘고 몇 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얼굴을 자주 보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에는 곧잘 여행도 같이 다니고 때로는 엄마를 빼 놓고 아빠하고만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중년에 수트를 멋지게 입은 아저씨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하고 예쁜 딸과 함께 거리를 걷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며 말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덤벙한 등산 잠바를 입은 키 작은 아저씨와 하체 두꺼운 청바지 여고생의 조합이란 게 함정이었지만, 미지는 즐거웠다.

 

그래서 미지는, 이 방과후수업을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넘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미지의 성격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 대는지 좀 불쌍하긴 한데 이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갑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자고 내가 어디 가서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숫자 하나를 그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리쌍샘이 미지를 불러냈다. 두 사람은 복도 한 쪽 구석, 계단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미지야, 아까 수업할 때, 좀 서운했니?”

 

?.. 아니요.”

 

그래... 암튼, 미안하구나. 선생님이 오늘은, 수정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미지한테 좀 거칠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말야.”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저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그랬어요.”

 

, 그래... 그랬구나.”

 

“ ... 선생님?”

 

?”

 

“...인문학이란 게... 사람들 이렇게 마음 아픈 거 공부하는 거에요?”

 

하하......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인문학이니까.”

 

그렇구나...그럼 전...”

 

미지는 잠시 숨을 멈췄다. 왠지 목소리가 떨리는 거 같았다.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리쌍샘 앞에서는, 더구나 오늘같은 날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미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런 전, 이젠 인문학 안배울래요.”

 

으응? 아니 왜? 미지같은 인문학 영재가.”

 

아니에요. ... 전 별로 상처 받은 게 없어서요. 다른 사람 아픈 걸 이해하는 게 잘 안되나 봐요. 수정이도 그렇고, 지원이도 그렇고. 사실, 저 걔네들 무슨 일 있는 지 대강 알거든요. 그거 알았을 때, 이 깍쟁이들이랑 떡볶이 먹고 순대 먹고 같이 오밤중에 놀이터에서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그 때서야 듣고, 저 막 펑펑 울고, 같이 울고 그랬거든요. 근데, 너무 미안한 거에요. 저는 그런 상처가 없어서요.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가서 상처를 받고 올 수는 없잖아요.”

 

미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쌍샘은 미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왠지, 그걸 아는 체 하면 안될 거 같아 리쌍샘은 계단 한편의 창문으로 멀리 펼쳐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거면 돼. 미지야, 그거면 돼. 같이 옆에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면 돼. 미지는 상처가 없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미지같은 사람이 더 필요한 거야. 미지는 튼튼하니까, 누군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곁에 있어주고, 일어나자고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르잖아, 라고 누가 그러면, 응 맞아요, 그래요,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길 바래요.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같이 걷고 싶어요, 그러면 돼. 우리는 그걸 연습하는 공부를 하는 거야.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정말 잘 사랑하기 위해서.”

 

...밤이 깊었다. 미지는 누운 채로 리쌍샘의 말을 떠올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글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다 미지는 옆에 같이 벌렁 누워 있는 가방을 뒤졌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대일밴드와 빨간약이 아마 이 가방에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찌져지거나 하는 그런 큰 상처가 아니라면, 이거 두 개만 있으면 별 탈 없이 까진 데가 아물었다. , 여기. 찾았다.

 

미지는 일어나 가로등불이 잘 보이는 스텐드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오른쪽 무릎이 또 여지없이 깨졌다. 다른 데는 약간 쓸렸을 뿐, 피가 베어나오지는 않았다. 이젠 팔꿈치에도 굳은 살이 베긴 것일까? 쓴 웃음을 지으며 미지가 물티슈를 꺼내 상처를 닦았다. 아팠다. 잠깐이지만, 미지의 모든 감각이 한 순간 무릎에 다 쏠리는 듯했다. 미지는 빨간약을 바르려고 뚜껑을 돌리다가 문득, 멈췄다.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났다.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의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획기적으로 막아준 의학의 발전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게 빨간약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종기로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부분이 종기를 짜고 난 후 항생제를 제대로 쓰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었단다. 그래, 빨간약.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나는 나다. 미지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치료해 주지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곁의 사람들 몸에 난 작은 상처는 내가 감싸줄 수 있지. 빨간 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줄 수는 있지. 안아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일어나면, 일어나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런 내 맘을 알아준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나는 빨간약이다. 그것만이라도 괜찮아.

 

상처 난 미지의 무릎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또 상처가 쓰라렸다. 하지만 어디가 진짜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미지는, 다시 상처를 닦고 빨간약을 바르고, 호호 불어서 말린 다음 대일밴드를 붙였다. 두 개를 붙였다. 그래, 이거면 됐어. 미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언덕배기에 지어진 학교 스텐드에서는 온 시내와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미지는 오늘만큼은 왠지 그 불빛들이 별빛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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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 혹은 대일밴드 완성판

자전거도둑 2014.09.28 21:11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치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주머니에 나중에 요오드 용액이란 걸 알게 된 소독용의 빨간약과 상처에 붙이는 대일밴드를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오늘 함께 읽은 소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책상에 앉기는 했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야자시간을 보내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더 들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가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일 거야.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죄책감이라는 상처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거 맞죠?”

 

, 맞아요. 혜민이가 의외로, 이런 야한 부분을 잘 찾아 내는군요.”

 

리쌍샘이 싱긋 웃으며 혜민이를 보았다. 혜민이가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히며, 같이 싱그레 웃었다.

 

. 혜민이가 말한 부분을 보면, 김승호가 분명 서미혜의 가슴을 만진 것이 맞는 거 같아요. 그 전에 김승호는 서미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그 도톰한 살덩이가 서미혜의 이두근은 아니겠죠. 아니, 이 사람, 에어로빅을 제대로 했는데?, 이런 건 아닐 거에요.”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웃었지만, 교실의 공기가 뭔가 팽팽해 지고 있었다. 잠깐씩 딴짓을 하던 아이들도 얼굴이 발그레 해 져서 다들 리쌍샘에게 완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서미혜는 김승호라는 이 남자가, 이제 만난 지 두 번 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저항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서미혜는 그 긴장된 순간에조차 오빠를 생각한 것이죠. 아니, 어쩌면, 오빠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럼, 대체 오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길래 그러는 걸까요? 이걸 모둠토론으로 하..”

 

죄책감이요.”

 

수정이의 갑작스런 대답에 리쌍샘이 약간 당황해 하며 말했다.

 

우와, 이런, 수정학생. 벌써 찾았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근거를 찾아야죠. 소설에서 어떠..”

 

사진이요. 서미혜는 자신이 오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출도 했고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빠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오빠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수정이의 대답은 이젠, 시원하다기 보다, 점점 당돌해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게 미지만은 아니었다. 리쌍샘도 표정이 심각해 지고 있었다.

 

수정학생. 잘 찾아냈어요.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있어요.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 했죠. 간질 발작을 한 이후에 오빠에게 뒷마당 산책을 시키는 건 서미혜가 할 일이었어요. 그 때도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했죠. 그러다가 그 체력장 사건이 있었죠. 체력장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다가 갑갑해서 깨 보니, 오빠가 서미혜의 몸을 누르고 있었죠. 옷은 다 벗겨진 채로. 알고 있죠?”

 

“...

 

누가 봐도 오빠를 혐오해도 될 만한,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서미혜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거죠?”

 

오빠가 잘못한 건 맞아요. 분명히 오빠는 잘못했죠. 하지만 서미혜는 오빠가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때는 어려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래서 오빠가 죽었지만, 분명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미혜가 가지고 다니는 그 사진도 오빠의 흉측한 모습이 아니라,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전의 예쁜 사진이라고 했잖아요. 서미혜는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더 죄책감이 커지구요. 자전거도 마찬가지에요. 자전거로 자꾸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방법인 거죠. 자전거로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오빠에게 못해주었던 것을 대신해 주려는 거죠. 말도 안되는 행동이지만, 말도 안되는 행동으로라도 덜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에요. 죄책감 때문이에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을 때, 죄책감이 더 커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면서, 서미혜의 감정이 그렇게 이해가 안되요?”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아무리 평소답지 않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말을 하다가 저 혼자 흥분해서 더 격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한테, 다구나 리쌍샘한테 이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수정이가 잘못하는 거였다. 미지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상처라는 함정

 

수정 학생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어찌되었건 서미혜는 오빠를 죽였어요. 그것 때문에 서미혜가 얼마나 상처 받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남자를 노골적으로 꼬시고, 그것도 이 남자가 안되니까 다른 남자를 또 꼬시고 그러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뭔가 핑계 같아요.”

 

리쌍샘을 보던 수정이의 눈길이 미지를 향했다. 미지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미혜는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타고 김승호 앞을 쌩 지나가죠. 아는 척도 안하고요. 김승호를 사랑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거에요. 죄책감이건 뭐건 간에, 서미혜는 김승호를 그냥 이용했던 거에요.”

 

미지학생. 발표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명확하지 않은 게 있어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쳤다고 했는데, 근거가 뭐죠? 김승호에게 한 행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있나요?”

 

리쌍샘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지에게 물었다. 수정이의 말을 끊고 수정이의 이야기에 반박할 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평소답지 않은 리쌍샘의 공격적인 질문을 듣고 미지는 당황했다. 리쌍샘, 나는 선생님 편이라고요,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수정학생. 말해 보세요. 서미혜가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그건...김승호가...”

 

김승호는 그날 밤, 서미혜로부터 오빠 이야기를 듣고 뭔가 함정인 거 같다는 느낌에 서미혜의 방에서 도망쳐 나오죠. 그리고 보름 만에 그날, 서미혜를 그야말로 잠깐, 스치듯이 만나죠. 김승호도 그 보름 동안 서미혜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김승호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고 이야기 하죠. 그 자전거는 서미혜가 새로 샀을 수도 있고, 빌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옆집 봉구네 자전거를 훔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김승호의 주관적인 판단이에요. 이 주관적인 판단 이외에 서미혜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있나요?”

 

조용히, 침착하게 말했지만, 리쌍샘의 목소리에는 어떤 날카로운 근엄함이 있었다. 뭔가 더 냉정해 주기를, 뭔가 더 치밀하고 책임감 있게 소설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미지는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이도,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약간은 다들,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상처 받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상처 받은 사람은 대개 너무 아파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도망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마음이 어떠한지도 잘 모르게 되지요.”

 

아이들이 조용했다. 잠시 토론을 따라 격하게 오고갔던 감정 때문인지, 아까처럼 아이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뭔가 진중한 분위기였다. 리쌍샘이 말을 이어갔다.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상처는 어떻게 함정이 되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수정이와 미지 학생 덕분에 우리가 순식간에 이 소설의 핵심으로 쑤욱, 들어올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그럼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 아니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 보세요. 이 소설에서 그 사람을 찾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둠별로 토의해 주기 바랍니다.”

 

리쌍샘을 보기 위해 칠판을 향했던 미지와 수정이는, 다시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민이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미지와 수정이의 얼굴만 계속 살폈고, 지원이는 수정이를 먼 눈길로 지켜보았다. 수정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리해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김승호야.”

 

그래, 맞아, 그런 거 같지? 뭐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김승..”

 

당연하지.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서미혜랑 김승호 밖에 없잖아. 서미혜가 아니면 김승호겠지. 당연한 거 아냐? 문제는 이유잖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는 혜민이의 말을 끊고, 미지가 차갑게 말을 던졌다. 그 때는 미지도 분명히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틀어져서 노골적으로 수정이에게 시비를 거는 투였다. 수정이가 가까스로 참는다는 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미지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야.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서미혜의 이야기를 빼고는, 나머지 서미혜에 대한 모든 판단은 김승호가 자기 멋대로 한 거야. 그러니까..”

 

그거 누가 몰라? 김승호가 왜 그런 거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미혜가 자전거 타는 걸 보고 남의 자전거니 다른 남자 꼬시니 그러고 있냐고? 어렸을 때 상처가 뭐?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어? 다들 다치고 낫고 그런 거잖아. 뭐가 얼마나 무서워서 그렇게 맨날 도망가냐고, 배배 꼬여서. 누구처럼.”

 

정말 위험했다. 이러다가는 뭔가 일이 단단히 날 것 같았다. 혜민이가 어떻게든 둘의 이야기를 끊어 보려고 나섰다.

 

...저기...얘들아? 저기 소설을 보면, 김승호가 무서워 하는 게 딱 하나 나와. 저기, 아빠가 실수로 수도상회에서 소주 2병을 안가져와서 속상해서 막 울다가, 다음에 소주 2병 훔친 거 기억나지? 그 때 저기... 혹부리 할아버지한테 걸려가지구 김승호 아빠가 당황하니까, 김승호가 자기가 했다고 그러잖아. 그리고는 자기 아빠한테 뺨 막 맞고. 그 때 죽는 한이 있어도 에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하잖아. 그러니..”

 

그래. 김승호가 정말 두려워 하는 건 아빠가 되는 거야.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다구.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거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것일 수 있는지 김승호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도망갔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서미혜를 돌봐 주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그게 말이 되냐?”

 

미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마구 쏘아 붙였다. 아까까지 서미혜를 비난하다가 이제는 김승호를 마구 비난하고 있는 자신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어디부터 꼬였는지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외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수정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꽁한 표정을 짓고는, 내내 미지에게 무언가 감정이 있는 거 같았다. 그 때부터 꼬였다. 왠지 이러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지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운함과 속상함을 어떻게 참을 방법이 없었다. 원래 미지는 이런 애가 아니었다. 미지는 명랑하고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뭔가 원래 자기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에 미지는 더 짜증이 났다.

 

자기랑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더 이해하고 감싸주고 그래야지. , 무슨 드라마나 연애소설 봐도 다 그래. 그런 사람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그러는 게 더 당연한 거야. 자기랑 비슷한 상처를 가진, 정말 예쁜 사람, 그것도 자신의 품에 안기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을 그렇게 보냈다고? 무슨 그런 한심한 사람이 어디 있냐?”

 

, 염미지. 네가 뭘 알아? 네가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지 알기나 해?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는데도, 그게 안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고, 억울하고, 열받고 그런 걸 니가 이해할 수 있어? ”

 

이해해.”

 

, 뭐라구? 이해한다구?”

 

그 때까지, 그래도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수정이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졌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수정이는 미지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자신의 말을 조용히 씹어 뱉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대일밴드, 혹은 빨간약

 

사실 미지는 이제까지, 무슨 대단한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 엄마는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시청 공무원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뭐가 아쉬울 때는 있어도 부족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걱정과는 달리, 미지의 생활에 대해 그리 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그럭저럭 공부를 해 내는 탓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부터, 엄마는 약간 거리를 두고 미지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는 편이었다. 아빠는 시청일로 이래저래 바쁘고 몇 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얼굴을 자주 보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에는 곧잘 여행도 같이 다니고 때로는 엄마를 빼 놓고 우리 딸하고만 데이트 하자면 둘이서 쇼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아빠는 중년에 수트를 멋지게 입은 아저씨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하고 예쁜 딸과 함께 거리를 걷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며 말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덤벙한 등산 잠바를 입은 키 작은 아저씨와 하체 두꺼운 청바지 여고생의 조합이란 게 함정이었지만, 미지는 즐거웠다.

 

그래서 미지는, 이 방과후수업을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넘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미지의 성격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 대는지 좀 불쌍하긴 한데 이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갑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자고 내가 어디 가서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교실에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미지는 정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학책을 펴 놓고는, 숫자 한 자 쓰지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야자를 그렇게 보내고 있을 때, 리쌍샘이 미지를 불러냈다. 두 사람은 학교 옆 연못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미지야, 아까 수업할 때, 좀 서운했니?”

 

?.. 아니요.”

 

그래... 미안하다. 선생님이 오늘은, 수정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미지한테 좀 거칠게 이야기 한 거 같구나.”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저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그랬어요. ... 선생님?”

 

?”

 

“...인문학이란 게... 사람들 이렇게 마음 아픈 거 공부하는 거에요?”

 

하하......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인문학이니까.”

 

그렇구나...그럼 전, 이젠 안배울래요.”

 

미지는 눈가에 눈물이 슬쩍 고이는 것을 애써 참았다. 리쌍샘 앞에서는, 더구나 오늘같은 날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으응? 아니 왜? 미지같은 인문학 영재가.”

 

아니에요. ... 전 별로 상처 받은 게 없어서요. 다른 사람 아픈 걸 이해하는 게 잘 안되나 봐요. 수정이도 그렇고, 지원이도 그렇고. 사실, 저 걔네들 무슨 일 있는 지 대강 알거든요. 그거 알았을 때, 이 깍쟁이들이랑 떡볶이 먹고 순대 먹고 같이 오밤중에 놀이터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할 때 그 때서야 듣고, 저 막 펑펑 울고, 같이 울고 그랬거든요. 근데, 너무 미안한 거에요. 저는 그런 상처가 없어서요.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가서 상처를 받고 올 수는 없잖아요.”

 

미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쌍샘은 미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왠지, 그걸 아는 체 하면 안될 거 같아 리쌍샘은 멀리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거면 돼. 미지야, 그거면 돼. 같이 옆에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면 돼. 미지는 상처가 없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미지같은 사람이 더 필요한 거야. 미지는 튼튼하니까, 누군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곁에 있어주고, 일어나자고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르잖아, 라고 누가 그러면, 응 맞아요, 그래요,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길 바래요.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같이 걷고 싶어요, 그러면 돼. 우리는 그걸 연습하는 공부를 하는 거야.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정말 잘 사랑하기 위해서.”

 

...미지는 누운 채로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다, 옆에 같이 벌렁 누워 있는 가방을 뒤졌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아마 대일밴드와 빨간약이 이 가방에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찌져지거나 하는 그런 큰 상처가 아니라면, 이거 두 개만 있으면 별 탈 없이 까진 데가 아물었다. , 여기. 찾았다. 미지는 일어나 가로등불이 잘 보이는 스텐드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오른쪽 무릎이 또 여지없이 깨졌다. 다른 데는 약간 쓸렸을 뿐, 피가 베어나오지는 않았다. 이젠 팔꿈치에도 굳은 살이 베긴 것일까? 쓴 웃음을 지으며 미지가 물티슈를 꺼내 상처를 닦았다. 아팠다. 잠깐이지만, 미지의 모든 감각이 한 순간 무릎에 다 쏠리는 듯했다. 미지는 빨간약을 바르려고 윗 뚜껑을 돌리다가 문득, 멈췄다.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났다.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의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획기적으로 막아준 의학의 발전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게 빨간약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종기로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부분이 종기를 짜고 난 후 항생제를 제대로 쓰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었단다. 그래, 빨간약.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나는 나다. 미지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치유해 주지도 못하지만, 적어도 내 곁의 사람들 몸에 난 작은 상처는 내가 감싸줄 수 있지. 빨간 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줄 수는 있지. 안아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살아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런 내 맘을 알아준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나는 빨간약이다. 그것만이라도 괜찮아.

 

상처 난 미지의 무릎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또 상처가 쓰라렸다. 하지만 어디가 진짜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미지는, 다시 상처를 닦고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였다. 두 개를 붙였다. 그래, 이거면 됐어. 미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언덕배기에 지어져서 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학교 스텐드에서, 온 시내와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미지는 오늘만큼은 왠지 그 불빛이 별빛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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