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빨간약, 혹은 대일밴드(완결)

자전거도둑 2014.09.29 11:15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치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주머니에, 나중에 요오드 용액이란 걸 알게 된 소독용의 빨간약과 상처에 붙이는 대일밴드를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책상에 앉기는 했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야자시간을 보내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더 들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가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일 거야.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죄책감이라는 상처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거 맞죠?”

 

, 맞아요. 혜민이가 의외로, 이런 야한 부분을 잘 찾아 내는군요.”

 

리쌍샘이 싱긋 웃으며 혜민이를 보았다. 혜민이가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히며, 같이 싱그레 웃었다.

 

. 혜민이가 말한 부분을 보면, 김승호가 분명 서미혜의 가슴을 만진 것이 맞는 거 같아요. 그 전에 김승호는 서미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그 도톰한 살덩이가 서미혜의 이두근은 아니겠죠. 아니, 이 사람, 에어로빅을 제대로 했는데?, 이런 건 아닐 거에요.”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웃었지만, 교실의 공기가 뭔가 팽팽해 지고 있었다. 잠깐씩 딴짓을 하던 아이들도 얼굴이 발그레 해 져서 다들 리쌍샘에게 완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서미혜는 김승호라는 이 남자가, 이제 만난 지 두 번 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저항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서미혜는 그 긴장된 순간에조차 오빠를 생각한 것이죠. 아니, 어쩌면, 오빠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럼, 대체 오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길래 그러는 걸까요? 이걸 모둠토론으로 하..”

 

죄책감이요.”

 

수정이의 갑작스런 대답에 리쌍샘이 약간 당황해 하며 말했다.

 

우와, 이런, 수정학생. 벌써 찾았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근거를 찾아야죠. 소설에서 어떠..”

 

사진이요. 서미혜는 자신이 오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출도 했고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빠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오빠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수정이의 대답은 시원하다기 보다, 뭔가 점점 당돌해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게 미지만은 아니었다. 리쌍샘도 표정이 심각해 지고 있었다.

 

수정학생. 잘 찾아냈어요.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있어요.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 했죠. 간질 발작을 한 이후에 오빠에게 뒷마당 산책을 시키는 건 서미혜가 할 일이었어요. 그 때도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했죠. 그러다가 그 체력장 사건이 있었죠. 체력장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다가 갑갑해서 깨 보니, 오빠가 서미혜의 몸을 누르고 있었죠. 옷은 다 벗겨진 채로. 알고 있죠?”

 

“...

 

누가 봐도 오빠를 혐오해도 될 만한,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서미혜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거죠?”

 

오빠가 잘못한 건 맞아요. 분명히 오빠는 잘못했죠. 하지만 서미혜는 오빠가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때는 어려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래서 오빠가 죽었지만, 분명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미혜가 가지고 다니는 그 사진도 오빠의 흉칙한 모습이 아니라,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전의 예쁜 사진이라고 했잖아요. 서미혜는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더 죄책감이 커지구요. 자전거도 마찬가지에요. 자전거로 자꾸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방법인 거죠. 자전거로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오빠에게 못해주었던 것을 대신해 주려는 거죠. 말도 안되는 행동이지만, 말도 안되는 행동으로라도 덜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에요. 죄책감 때문이에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을 때, 죄책감이 더 커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면서, 서미혜의 감정이 그렇게 이해가 안되요?”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아무리 평소답지 않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말을 하다가 저 혼자 흥분해서 더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한테, 다구나 리쌍샘한테 이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수정이가 잘못하는 거였다. 미지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상처라는 함정

 

수정 학생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어찌되었건 서미혜는 오빠를 죽였어요. 그것 때문에 서미혜가 얼마나 상처 받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남자를 노골적으로 꼬시고, 그것도 이 남자가 안되니까 다른 남자를 또 꼬시고 그러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뭔가 핑계 같아요.”

 

리쌍샘을 보던 수정이의 눈길이 미지를 향했다. 미지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미혜는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타고 김승호 앞을 쌩 지나가죠. 아는 척도 안하고요. 김승호를 사랑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거에요. 죄책감이건 뭐건 간에, 서미혜는 김승호를 그냥 이용했던 거에요.”

 

미지학생. 발표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명확하지 않은 게 있어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쳤다고 했는데, 근거가 뭐죠? 김승호에게 한 행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있나요?”

 

리쌍샘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지에게 물었다. 수정이의 말을 끊고 수정이의 이야기에 반박할 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평소답지 않은 리쌍샘의 공격적인 질문을 듣고 미지는 당황했다. 리쌍샘, 나는 선생님 편이라고요,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수정학생. 말해 보세요. 서미혜가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그건...김승호가...”

 

김승호는 그날 밤, 서미혜로부터 오빠 이야기를 듣고 뭔가 함정인 거 같다는 느낌에 서미혜의 방에서 도망쳐 나오죠. 그리고 보름 만에 그날, 서미혜를 그야말로 잠깐, 스치듯이 만나죠. 김승호도 그 보름 동안 서미혜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김승호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고 이야기 하죠. 그 자전거는 서미혜가 새로 샀을 수도 있고, 빌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옆집 봉구네 자전거를 훔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김승호의 주관적인 판단이에요. 이 주관적인 판단 이외에 서미혜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있나요?”

 

조용히, 침착하게 말했지만, 리쌍샘의 목소리에는 어떤 날카로운 근엄함이 있었다. 뭔가 더 냉정해 주기를, 뭔가 더 치밀하고 책임감 있게 소설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미지는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이도,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약간은 다들,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상처 받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상처 받은 사람은 대개 너무 아파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도망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마음이 어떠한지도 잘 모르게 되지요.”

 

아이들이 조용했다. 잠시 토론을 따라 격하게 오고갔던 감정 때문인지, 아까처럼 아이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뭔가 진중한 분위기였다. 리쌍샘이 말을 이어갔다.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상처는 어떻게 함정이 되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수정이와 미지 학생 덕분에 우리가 순식간에 이 소설의 핵심으로 쑤욱, 들어올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그럼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 아니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 보세요. 이 소설에서 그 사람을 찾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둠별로 토의해 주기 바랍니다.”

 

리쌍샘을 보기 위해 칠판을 향했던 미지와 수정이는, 다시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민이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미지와 수정이의 얼굴만 계속 살폈고, 지원이는 수정이를 먼 눈길로 지켜보았다. 수정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리해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김승호야.”

 

그래, 맞아, 그런 거 같지? 뭐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김승..”

 

당연하지.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서미혜랑 김승호 밖에 없잖아. 서미혜가 아니면 김승호겠지. 당연한 거 아냐? 문제는 이유잖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는 혜민이의 말을 끊고, 미지가 차갑게 말을 던졌다. 그 때는 미지도 분명히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틀어져서 노골적으로 수정이에게 시비를 거는 투였다. 수정이가 가까스로 참는다는 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미지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야.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서미혜의 이야기를 빼고는, 나머지 서미혜에 대한 모든 판단은 김승호가 자기 멋대로 한 거야. 그러니까..”

 

그거 누가 몰라? 김승호가 왜 그런 거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미혜가 자전거 타는 걸 보고 남의 자전거니 다른 남자 꼬시니 그러고 있냐고? 어렸을 때 상처가 뭐?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어? 다들 다치고 낫고 그런 거잖아. 뭐가 얼마나 무서워서 그렇게 맨날 도망가냐고, 배배 꼬여서. 누구처럼.”

 

정말 위험했다. 이러다가는 뭔가 일이 단단히 날 것 같았다. 혜민이가 어떻게든 둘의 이야기를 끊어 보려고 나섰다.

 

...저기...얘들아? 저기 소설을 보면, 김승호가 무서워 하는 게 딱 하나 나와. 저기, 아빠가 실수로 수도상회에서 소주 2병을 안가져와서 속상해서 막 울다가, 다음에 소주 2병 훔친 거 기억나지? 그 때 저기... 혹부리 할아버지한테 걸려가지구 김승호 아빠가 당황하니까, 김승호가 자기가 했다고 그러잖아. 그리고는 자기 아빠한테 뺨 막 맞고. 그 때 죽는 한이 있어도 에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하잖아. 그러니..”

 

그래. 김승호가 정말 두려워 하는 건 아빠가 되는 거야.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다구.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거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것일 수 있는지 김승호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도망갔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서미혜를 돌봐 주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그게 말이 되냐?”

 

미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마구 쏘아 붙였다. 아까까지 서미혜를 비난하다가 이제는 김승호를 마구 비난하고 있는 자신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어디부터 꼬였는지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외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수정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꽁한 표정을 짓고는, 내내 미지에게 무언가 감정이 있는 거 같았다. 그 때부터 꼬였다. 왠지 이러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지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운함과 속상함을 어떻게 참을 방법이 없었다. 원래 미지는 이런 애가 아니었다. 미지는 명랑하고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뭔가 원래 자기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에 미지는 더 짜증이 났다.

 

자기랑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더 이해하고 감싸주고 그래야지. , 무슨 드라마나 연애소설 봐도 다 그래. 그런 사람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그러는 게 더 당연한 거야. 자기랑 비슷한 상처를 가진, 정말 예쁜 사람, 그것도 자신의 품에 안기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을 그렇게 보냈다고? 무슨 그런 한심한 사람이 어디 있냐?”

 

, 염미지. 네가 뭘 알아? 네가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지 알기나 해?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는데도, 그게 안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고, 억울하고, 열받고 그런 걸 니가 이해할 수 있어? ”

 

이해해.”

 

, 뭐라구? 이해한다구?”

 

그 때까지, 그래도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수정이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졌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수정이는 미지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자신의 말을 조용히 씹어 뱉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대일밴드, 혹은 빨간약

 

어떻게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교실에 돌아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미지는 정신이 없었다. 곧 종이 울려서 자리에 앉아 야자시간이라고 수학책을 펴 놓기는 했는데, 그냥 눈만 문제집을 향하고 있을 뿐 머릿속에서는 내내 아까 전의 상황이 재연되고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 그걸 이해하냐고? 그러니까 그게...

 

사실 미지는 이제까지, 무슨 대단한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시청 공무원이셨다. 뭐가 좀 아쉬울 때는 있어도 부족한 것은 없는 살림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걱정과는 달리, 미지의 생활에 대해 그리 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그럭저럭 공부를 해 내는 탓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부터, 엄마는 약간 거리를 두고 미지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는 편이었다. 아빠는 시청일로 이래저래 바쁘고 몇 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얼굴을 자주 보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에는 곧잘 여행도 같이 다니고 때로는 엄마를 빼 놓고 아빠하고만 쇼핑을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중년에 수트를 멋지게 입은 아저씨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하고 예쁜 딸과 함께 거리를 걷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며 말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덤벙한 등산 잠바를 입은 키 작은 아저씨와 하체 두꺼운 청바지 여고생의 조합이란 게 함정이었지만, 미지는 즐거웠다.

 

그래서 미지는, 이 방과후수업을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넘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미지의 성격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 대는지 좀 불쌍하긴 한데 이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갑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자고 내가 어디 가서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숫자 하나를 그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리쌍샘이 미지를 불러냈다. 두 사람은 복도 한 쪽 구석, 계단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미지야, 아까 수업할 때, 좀 서운했니?”

 

?.. 아니요.”

 

그래... 암튼, 미안하구나. 선생님이 오늘은, 수정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미지한테 좀 거칠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말야.”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저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그랬어요.”

 

, 그래... 그랬구나.”

 

“ ... 선생님?”

 

?”

 

“...인문학이란 게... 사람들 이렇게 마음 아픈 거 공부하는 거에요?”

 

하하......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인문학이니까.”

 

그렇구나...그럼 전...”

 

미지는 잠시 숨을 멈췄다. 왠지 목소리가 떨리는 거 같았다.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리쌍샘 앞에서는, 더구나 오늘같은 날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미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선생님, 그런 전, 이젠 인문학 안배울래요.”

 

으응? 아니 왜? 미지같은 인문학 영재가.”

 

아니에요. ... 전 별로 상처 받은 게 없어서요. 다른 사람 아픈 걸 이해하는 게 잘 안되나 봐요. 수정이도 그렇고, 지원이도 그렇고. 사실, 저 걔네들 무슨 일 있는 지 대강 알거든요. 그거 알았을 때, 이 깍쟁이들이랑 떡볶이 먹고 순대 먹고 같이 오밤중에 놀이터에서 이런 저런 얘기 하다가 그 때서야 듣고, 저 막 펑펑 울고, 같이 울고 그랬거든요. 근데, 너무 미안한 거에요. 저는 그런 상처가 없어서요.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가서 상처를 받고 올 수는 없잖아요.”

 

미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쌍샘은 미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왠지, 그걸 아는 체 하면 안될 거 같아 리쌍샘은 계단 한편의 창문으로 멀리 펼쳐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거면 돼. 미지야, 그거면 돼. 같이 옆에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면 돼. 미지는 상처가 없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미지같은 사람이 더 필요한 거야. 미지는 튼튼하니까, 누군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곁에 있어주고, 일어나자고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르잖아, 라고 누가 그러면, 응 맞아요, 그래요,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길 바래요.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같이 걷고 싶어요, 그러면 돼. 우리는 그걸 연습하는 공부를 하는 거야.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정말 잘 사랑하기 위해서.”

 

...밤이 깊었다. 미지는 누운 채로 리쌍샘의 말을 떠올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글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다 미지는 옆에 같이 벌렁 누워 있는 가방을 뒤졌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대일밴드와 빨간약이 아마 이 가방에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찌져지거나 하는 그런 큰 상처가 아니라면, 이거 두 개만 있으면 별 탈 없이 까진 데가 아물었다. , 여기. 찾았다.

 

미지는 일어나 가로등불이 잘 보이는 스텐드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오른쪽 무릎이 또 여지없이 깨졌다. 다른 데는 약간 쓸렸을 뿐, 피가 베어나오지는 않았다. 이젠 팔꿈치에도 굳은 살이 베긴 것일까? 쓴 웃음을 지으며 미지가 물티슈를 꺼내 상처를 닦았다. 아팠다. 잠깐이지만, 미지의 모든 감각이 한 순간 무릎에 다 쏠리는 듯했다. 미지는 빨간약을 바르려고 뚜껑을 돌리다가 문득, 멈췄다.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났다.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의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획기적으로 막아준 의학의 발전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게 빨간약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종기로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부분이 종기를 짜고 난 후 항생제를 제대로 쓰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었단다. 그래, 빨간약.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나는 나다. 미지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치료해 주지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곁의 사람들 몸에 난 작은 상처는 내가 감싸줄 수 있지. 빨간 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줄 수는 있지. 안아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일어나면, 일어나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런 내 맘을 알아준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나는 빨간약이다. 그것만이라도 괜찮아.

 

상처 난 미지의 무릎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또 상처가 쓰라렸다. 하지만 어디가 진짜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미지는, 다시 상처를 닦고 빨간약을 바르고, 호호 불어서 말린 다음 대일밴드를 붙였다. 두 개를 붙였다. 그래, 이거면 됐어. 미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언덕배기에 지어진 학교 스텐드에서는 온 시내와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미지는 오늘만큼은 왠지 그 불빛들이 별빛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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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약, 혹은 대일밴드 완성판

자전거도둑 2014.09.28 21:11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치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주머니에 나중에 요오드 용액이란 걸 알게 된 소독용의 빨간약과 상처에 붙이는 대일밴드를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한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오늘 함께 읽은 소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책상에 앉기는 했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야자시간을 보내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더 들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가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일 거야.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죄책감이라는 상처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거 맞죠?”

 

, 맞아요. 혜민이가 의외로, 이런 야한 부분을 잘 찾아 내는군요.”

 

리쌍샘이 싱긋 웃으며 혜민이를 보았다. 혜민이가 아까보다 얼굴을 더 붉히며, 같이 싱그레 웃었다.

 

. 혜민이가 말한 부분을 보면, 김승호가 분명 서미혜의 가슴을 만진 것이 맞는 거 같아요. 그 전에 김승호는 서미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그 도톰한 살덩이가 서미혜의 이두근은 아니겠죠. 아니, 이 사람, 에어로빅을 제대로 했는데?, 이런 건 아닐 거에요.”

 

아이들이 다시 한 번 웃었지만, 교실의 공기가 뭔가 팽팽해 지고 있었다. 잠깐씩 딴짓을 하던 아이들도 얼굴이 발그레 해 져서 다들 리쌍샘에게 완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에요. 서미혜는 김승호라는 이 남자가, 이제 만난 지 두 번 밖에 되지 않은 이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저항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서미혜는 그 긴장된 순간에조차 오빠를 생각한 것이죠. 아니, 어쩌면, 오빠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럼, 대체 오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길래 그러는 걸까요? 이걸 모둠토론으로 하..”

 

죄책감이요.”

 

수정이의 갑작스런 대답에 리쌍샘이 약간 당황해 하며 말했다.

 

우와, 이런, 수정학생. 벌써 찾았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근거를 찾아야죠. 소설에서 어떠..”

 

사진이요. 서미혜는 자신이 오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그것 때문에 가출도 했고요.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빠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오빠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수정이의 대답은 이젠, 시원하다기 보다, 점점 당돌해지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게 미지만은 아니었다. 리쌍샘도 표정이 심각해 지고 있었다.

 

수정학생. 잘 찾아냈어요.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있어요.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 했죠. 간질 발작을 한 이후에 오빠에게 뒷마당 산책을 시키는 건 서미혜가 할 일이었어요. 그 때도 서미혜는 오빠를 혐오스러워했죠. 그러다가 그 체력장 사건이 있었죠. 체력장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었다가 갑갑해서 깨 보니, 오빠가 서미혜의 몸을 누르고 있었죠. 옷은 다 벗겨진 채로. 알고 있죠?”

 

“...

 

누가 봐도 오빠를 혐오해도 될 만한, 충분히 충격적인 사건이에요. 그런데 서미혜가 왜 죄책감을 갖는 거죠?”

 

오빠가 잘못한 건 맞아요. 분명히 오빠는 잘못했죠. 하지만 서미혜는 오빠가 잘못은 했지만, 죽을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때는 어려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그래서 오빠가 죽었지만, 분명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미혜가 가지고 다니는 그 사진도 오빠의 흉측한 모습이 아니라,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전의 예쁜 사진이라고 했잖아요. 서미혜는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더 죄책감이 커지구요. 자전거도 마찬가지에요. 자전거로 자꾸 남자를 유혹하는 것도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방법인 거죠. 자전거로 오빠를 대신할 사람을 찾아서 오빠에게 못해주었던 것을 대신해 주려는 거죠. 말도 안되는 행동이지만, 말도 안되는 행동으로라도 덜어 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에요. 죄책감 때문이에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을 때, 죄책감이 더 커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선생님은 문학선생님이면서, 서미혜의 감정이 그렇게 이해가 안되요?”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아무리 평소답지 않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수정이가 말을 하다가 저 혼자 흥분해서 더 격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생님한테, 다구나 리쌍샘한테 이러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수정이가 잘못하는 거였다. 미지는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상처라는 함정

 

수정 학생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어찌되었건 서미혜는 오빠를 죽였어요. 그것 때문에 서미혜가 얼마나 상처 받고,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을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남자를 노골적으로 꼬시고, 그것도 이 남자가 안되니까 다른 남자를 또 꼬시고 그러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뭔가 핑계 같아요.”

 

리쌍샘을 보던 수정이의 눈길이 미지를 향했다. 미지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미혜는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타고 김승호 앞을 쌩 지나가죠. 아는 척도 안하고요. 김승호를 사랑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거에요. 죄책감이건 뭐건 간에, 서미혜는 김승호를 그냥 이용했던 거에요.”

 

미지학생. 발표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명확하지 않은 게 있어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쳤다고 했는데, 근거가 뭐죠? 김승호에게 한 행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있나요?”

 

리쌍샘이,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지에게 물었다. 수정이의 말을 끊고 수정이의 이야기에 반박할 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평소답지 않은 리쌍샘의 공격적인 질문을 듣고 미지는 당황했다. 리쌍샘, 나는 선생님 편이라고요,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수정학생. 말해 보세요. 서미혜가 또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있나요?

 

그건...김승호가...”

 

김승호는 그날 밤, 서미혜로부터 오빠 이야기를 듣고 뭔가 함정인 거 같다는 느낌에 서미혜의 방에서 도망쳐 나오죠. 그리고 보름 만에 그날, 서미혜를 그야말로 잠깐, 스치듯이 만나죠. 김승호도 그 보름 동안 서미혜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김승호는 서미혜가 다른 남자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다고 이야기 하죠. 그 자전거는 서미혜가 새로 샀을 수도 있고, 빌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옆집 봉구네 자전거를 훔친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김승호의 주관적인 판단이에요. 이 주관적인 판단 이외에 서미혜가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다른 객관적인 증거가, 있나요?”

 

조용히, 침착하게 말했지만, 리쌍샘의 목소리에는 어떤 날카로운 근엄함이 있었다. 뭔가 더 냉정해 주기를, 뭔가 더 치밀하고 책임감 있게 소설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미지는 할 말이 없었다. 수정이도,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약간은 다들,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상처 받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상처 받은 사람은 대개 너무 아파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거나 도망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자기 마음이 어떠한지도 잘 모르게 되지요.”

 

아이들이 조용했다. 잠시 토론을 따라 격하게 오고갔던 감정 때문인지, 아까처럼 아이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뭔가 진중한 분위기였다. 리쌍샘이 말을 이어갔다.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상처는 어떻게 함정이 되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수정이와 미지 학생 덕분에 우리가 순식간에 이 소설의 핵심으로 쑤욱, 들어올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그럼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 아니 상처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찾아 보세요. 이 소설에서 그 사람을 찾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로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둠별로 토의해 주기 바랍니다.”

 

리쌍샘을 보기 위해 칠판을 향했던 미지와 수정이는, 다시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혜민이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미지와 수정이의 얼굴만 계속 살폈고, 지원이는 수정이를 먼 눈길로 지켜보았다. 수정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리해 보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김승호야.”

 

그래, 맞아, 그런 거 같지? 뭐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김승..”

 

당연하지.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서미혜랑 김승호 밖에 없잖아. 서미혜가 아니면 김승호겠지. 당연한 거 아냐? 문제는 이유잖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어떻게든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는 혜민이의 말을 끊고, 미지가 차갑게 말을 던졌다. 그 때는 미지도 분명히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틀어져서 노골적으로 수정이에게 시비를 거는 투였다. 수정이가 가까스로 참는다는 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미지를 쳐다보고 말했다.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야.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서미혜의 이야기를 빼고는, 나머지 서미혜에 대한 모든 판단은 김승호가 자기 멋대로 한 거야. 그러니까..”

 

그거 누가 몰라? 김승호가 왜 그런 거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미혜가 자전거 타는 걸 보고 남의 자전거니 다른 남자 꼬시니 그러고 있냐고? 어렸을 때 상처가 뭐? 그런 거 없는 사람도 있어? 다들 다치고 낫고 그런 거잖아. 뭐가 얼마나 무서워서 그렇게 맨날 도망가냐고, 배배 꼬여서. 누구처럼.”

 

정말 위험했다. 이러다가는 뭔가 일이 단단히 날 것 같았다. 혜민이가 어떻게든 둘의 이야기를 끊어 보려고 나섰다.

 

...저기...얘들아? 저기 소설을 보면, 김승호가 무서워 하는 게 딱 하나 나와. 저기, 아빠가 실수로 수도상회에서 소주 2병을 안가져와서 속상해서 막 울다가, 다음에 소주 2병 훔친 거 기억나지? 그 때 저기... 혹부리 할아버지한테 걸려가지구 김승호 아빠가 당황하니까, 김승호가 자기가 했다고 그러잖아. 그리고는 자기 아빠한테 뺨 막 맞고. 그 때 죽는 한이 있어도 에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하잖아. 그러니..”

 

그래. 김승호가 정말 두려워 하는 건 아빠가 되는 거야.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다구. 그런 비참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거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비참한 것일 수 있는지 김승호는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도망갔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서미혜를 돌봐 주지도 않고 도망갔다고? 그게 말이 되냐?”

 

미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마구 쏘아 붙였다. 아까까지 서미혜를 비난하다가 이제는 김승호를 마구 비난하고 있는 자신이 뭔가 앞뒤가 안맞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어디부터 꼬였는지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자기를 외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수정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째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꽁한 표정을 짓고는, 내내 미지에게 무언가 감정이 있는 거 같았다. 그 때부터 꼬였다. 왠지 이러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지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운함과 속상함을 어떻게 참을 방법이 없었다. 원래 미지는 이런 애가 아니었다. 미지는 명랑하고 쾌활하고 재밌는 사람이다. 뭔가 원래 자기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에 미지는 더 짜증이 났다.

 

자기랑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더 이해하고 감싸주고 그래야지. , 무슨 드라마나 연애소설 봐도 다 그래. 그런 사람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그러는 게 더 당연한 거야. 자기랑 비슷한 상처를 가진, 정말 예쁜 사람, 그것도 자신의 품에 안기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을 그렇게 보냈다고? 무슨 그런 한심한 사람이 어디 있냐?”

 

, 염미지. 네가 뭘 알아? 네가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지 알기나 해?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는데도, 그게 안되서 그냥 다 포기하고 싶고, 억울하고, 열받고 그런 걸 니가 이해할 수 있어? ”

 

이해해.”

 

, 뭐라구? 이해한다구?”

 

그 때까지, 그래도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수정이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졌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수정이는 미지를 죽일 듯이 쏘아보며 자신의 말을 조용히 씹어 뱉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대일밴드, 혹은 빨간약

 

사실 미지는 이제까지, 무슨 대단한 상처를 받은 적이 없다. 엄마는 선생님이었고, 아빠는 시청 공무원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뭐가 아쉬울 때는 있어도 부족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걱정과는 달리, 미지의 생활에 대해 그리 큰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그럭저럭 공부를 해 내는 탓도 있겠지만 그러기 전부터, 엄마는 약간 거리를 두고 미지가 하려는 것을 지켜보는 편이었다. 아빠는 시청일로 이래저래 바쁘고 몇 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겨야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얼굴을 자주 보며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에는 곧잘 여행도 같이 다니고 때로는 엄마를 빼 놓고 우리 딸하고만 데이트 하자면 둘이서 쇼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아빠는 중년에 수트를 멋지게 입은 아저씨가 드레스를 입은 늘씬하고 예쁜 딸과 함께 거리를 걷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며 말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덤벙한 등산 잠바를 입은 키 작은 아저씨와 하체 두꺼운 청바지 여고생의 조합이란 게 함정이었지만, 미지는 즐거웠다.

 

그래서 미지는, 이 방과후수업을 들으면서 더욱,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넘어져도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나는 미지의 성격에서는, 대체 왜 그렇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뒹굴뒹굴 대는지 좀 불쌍하긴 한데 이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였다. 갑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자고 내가 어디 가서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자리를 마무리하고 교실에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미지는 정신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학책을 펴 놓고는, 숫자 한 자 쓰지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야자를 그렇게 보내고 있을 때, 리쌍샘이 미지를 불러냈다. 두 사람은 학교 옆 연못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미지야, 아까 수업할 때, 좀 서운했니?”

 

?.. 아니요.”

 

그래... 미안하다. 선생님이 오늘은, 수정이가 많이 마음이 쓰여서 미지한테 좀 거칠게 이야기 한 거 같구나.”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그냥... 저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그랬어요. ... 선생님?”

 

?”

 

“...인문학이란 게... 사람들 이렇게 마음 아픈 거 공부하는 거에요?”

 

하하......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는 게 인문학이니까.”

 

그렇구나...그럼 전, 이젠 안배울래요.”

 

미지는 눈가에 눈물이 슬쩍 고이는 것을 애써 참았다. 리쌍샘 앞에서는, 더구나 오늘같은 날에는 울고 싶지 않았다.

 

으응? 아니 왜? 미지같은 인문학 영재가.”

 

아니에요. ... 전 별로 상처 받은 게 없어서요. 다른 사람 아픈 걸 이해하는 게 잘 안되나 봐요. 수정이도 그렇고, 지원이도 그렇고. 사실, 저 걔네들 무슨 일 있는 지 대강 알거든요. 그거 알았을 때, 이 깍쟁이들이랑 떡볶이 먹고 순대 먹고 같이 오밤중에 놀이터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할 때 그 때서야 듣고, 저 막 펑펑 울고, 같이 울고 그랬거든요. 근데, 너무 미안한 거에요. 저는 그런 상처가 없어서요. 괜히 미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어디 가서 상처를 받고 올 수는 없잖아요.”

 

미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쌍샘은 미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왠지, 그걸 아는 체 하면 안될 거 같아 리쌍샘은 멀리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거면 돼. 미지야, 그거면 돼. 같이 옆에 있어주고, 같이 울어주면 돼. 미지는 상처가 없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미지같은 사람이 더 필요한 거야. 미지는 튼튼하니까, 누군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잖아. 곁에 있어주고, 일어나자고 해 줄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르잖아, 라고 누가 그러면, 응 맞아요, 그래요,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길 바래요. 당신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같이 걷고 싶어요, 그러면 돼. 우리는 그걸 연습하는 공부를 하는 거야. 언젠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정말 잘 사랑하기 위해서.”

 

...미지는 누운 채로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다, 옆에 같이 벌렁 누워 있는 가방을 뒤졌다. 여기 어디 있을텐데... 아마 대일밴드와 빨간약이 이 가방에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찌져지거나 하는 그런 큰 상처가 아니라면, 이거 두 개만 있으면 별 탈 없이 까진 데가 아물었다. , 여기. 찾았다. 미지는 일어나 가로등불이 잘 보이는 스텐드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오른쪽 무릎이 또 여지없이 깨졌다. 다른 데는 약간 쓸렸을 뿐, 피가 베어나오지는 않았다. 이젠 팔꿈치에도 굳은 살이 베긴 것일까? 쓴 웃음을 지으며 미지가 물티슈를 꺼내 상처를 닦았다. 아팠다. 잠깐이지만, 미지의 모든 감각이 한 순간 무릎에 다 쏠리는 듯했다. 미지는 빨간약을 바르려고 윗 뚜껑을 돌리다가 문득, 멈췄다. 과학시간에 배운 것이 생각났다.

 

인류에게 죽음과 질병의 고통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획기적으로 막아준 의학의 발전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게 빨간약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종기로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 대부분이 종기를 짜고 난 후 항생제를 제대로 쓰지 못해 일어나는 일이었단다. 그래, 빨간약.

 

그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나는 나다. 미지는 먼저 자신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인문학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래, 나는 나다. 내가 그 친구들, 그 아픈 마음들, 다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치유해 주지도 못하지만, 적어도 내 곁의 사람들 몸에 난 작은 상처는 내가 감싸줄 수 있지. 빨간 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줄 수는 있지. 곁에 있어줄 수는 있지. 안아줄 수는 있지. 엎어진 김에 누워도 된다고, 다시 일어날 거면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해 줄 수는 있지.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살아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면, 그런 내 맘을 알아준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나는 빨간약이다. 그것만이라도 괜찮아.

 

상처 난 미지의 무릎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또 상처가 쓰라렸다. 하지만 어디가 진짜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미지는, 다시 상처를 닦고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였다. 두 개를 붙였다. 그래, 이거면 됐어. 미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언덕배기에 지어져서 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학교 스텐드에서, 온 시내와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미지는 오늘만큼은 왠지 그 불빛이 별빛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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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 2/4

자전거도둑 2014.09.28 17:14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지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비밀주머니에 대일밴드와 빨간약을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다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싸늘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 다 알고 있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도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란 것인지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속상하고 화나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말도 내뱉지는 않았다.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미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그 말들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오늘 함께 읽은 소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 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미지는 하늘을 보았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별이 빛났다.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다.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했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여고에서는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말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된다는 걸 혹시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해 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서미혜라는 여자가 있다. 에어로빅 강사란다. 아마도 늘씬하고 예쁠 테지. 소설에서도 서미혜의 모습이 나오는데, 흰 남방에 타이즈 바지를 입고,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자전거를 탔단다. 세상에, 이 소설이 나온 게 1995년이라던데, 그 때면 지금보다 20년 전인데, 지금 한참 유행인 하의실종 스타일을 그 때 벌써 하고 다녔다니, 정말 대단하다. 미지는 얄쌍하고 비교적 가느다란 상체에 비해 하체가 좀 굵었다. 무릎의 자글자글한 상처 때문에 스타킹이 없으면 스커트는 왠만하면 입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느낌 탓인지, 다른 애들보다 스타킹이 더 꽉 껴 보이는 거 같아서 그것도 별로였다. 스키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미지는 핏은 좀 사는데, 약간 헐렁한 바지만을 골라서 입었다. 그럴 때마다 다리선이 예쁜 아이들이 참 부러웠다. 그런데 서미혜는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탄다고?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이 여자는 김승호라는 남주네 아파트 윗층에 사는데, 이 남자의 자전거를 훔쳐 탔다가 매번 다시 갖다 놓는다. 그리고 김승호와 퇴근길에 만나서 술 한 잔을 한 며칠 후에 김승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일단 명분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 낯선 남자를 초대해 놓고, 이 남자가 올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서미혜는 김승호가 올 시간에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에어로빅 타이즈를 입고... ... 그건... 좀 민망하지 않나? , 대담한 여자일 수도 있지. 근데 그 다음은 더 이상하다. 집이 엉망이라고 하면서 뭔가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알고 보니 저녁식사도 다 준비해 놓고, 술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이 여자, 샤워를 한다. 샤워를 했다고?

 

그래, 샤워를 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 밖에 안되는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서미혜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자고 하더니 커텐을 치고, 불을 끄고, 김승호의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는 김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이건 뭐지? 내가 이상한 건가? 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름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하는 미지도 이런 행동은 감히 상상이 안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정말 서미혜가 실제로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남자를 꼬시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자, 뭐지?

 

김승호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수도 있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세상에는, 있잖아?”

지원이 네가 왠일로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다 하냐. 하지만 난 뭔가 아닌 거 같애. 첫눈에 반한 사람치고는, 글쎄.. 뭔가 너무 치밀해. 김승호의 윗집에 살면서, 김승호의 자전거를 훔쳐 타면서, 서미혜는 김승호가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뭔지, 언제 퇴근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게다가 자전거, 그 자전거를 그렇게 탔다가 갖다 놓을 수 있다는 건 김승호가 잃어버렸다는 그 자전거 열쇠를 어디서 주웠다는 건데... 뭔가 이상해. 이건 반한 게 아니라, 뭔가 작업 같은 느낌이 나.”

그래, 혜민이 말이 맞아. 이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이거 완전 꽃뱀이잖아. 완전 남자한테 꼬리치는 게...”

아니 뭐, 꽃뱀까지는 아니고...”

 

미지의 말을 듣다 뭔가 표정이 굳어진 수정이가 미지의 말을 끊고 이야기를 꺼냈다.

 

서미혜가 김승호를 유혹하고 있다. 이건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꽃뱀이다, 이건 아닌 거 같아. 꽃뱀이라 하면 남자를 유혹해서 무언가 돈이나 권력 같은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해야 하는데, 서미혜는 그런 모습은 없잖아.”

그래도 하는 걸 보면 꽃뱀이잖아.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자기 예쁜 거 이용해서 남자들 비위 맞춰 가지고 꼬시는 이런 여자들, 뻔하다구.”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혜민이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수정이가 정리한 건 알아봐야 할 거 같아. 서미혜의 굳이 자전거를 가지고, 이렇게 치밀한 과정을 거쳐서 남자를 유혹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야. 지원이 넌, 아직도 사랑이라고 생각해?”

글쎄... 아닌 것도 같네. 그럼 이유가 뭔데?”

아마도 오빠 때문이 아닐까 싶어. 어릴 때 자전거를 잘 탔다가 간질 발작이 나서 벽장에 가둬져 키워졌다는 그 오빠. 소설 뒷부분에 서미혜가 자기 오빠를 죽인 이야기를 하잖아. 뭐 자기 손으로 죽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죽인 거나 다름없지. 어쨌든 중요한 건 서미혜가 자기가 오빠를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야. 그게 죄책감이 돼서 그걸 어떻게 속죄해 보려고 그러는 거지.”

말도 안돼. 수정아, 확실히 하자구. 서미혜가 죽였다고 느끼고 있다고 하면 안돼. 서미혜가 죽였다구. 2주 동안 오빠를 벽장에 가둬 놓고 밥 한 끼 안줬다잖아. 그건...”

서미혜가 가둔 건 아니고, 가둬 놓은 건 엄마고, 서미혜는 하루에 밥을 한 번씩 주기로 했었지. 그걸 안했을 뿐이야.”

어쨌든. 엉덩이나 궁뎅이나 마찬가지지 뭐. 그건 살인이야. 이건 명백히 살인이라구. 서미혜는 자기 오빠를 죽였다고. 존속살인은 중죄야. 그래 놓고 나중에야 그걸 속죄하겠다고 자전거로 남자를 꼬신다고? 말도 안돼. 이건 뭐, 거의 미쳤다고 봐야지.”

 

미쳤다고 봐야지, 라는 미지의 말에 수정이의 눈빛이 꿈틀, 했다. 수정이가 뭔가 말을 더 하려는데, 리쌍샘이 리듬을 타며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하셨다. 첫수업을 시작하는 날, 리쌍샘이 부탁한 약속이다. 토론을 하다 보면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다가 수업진행이 안될 수도 있으니, 리쌍샘이 집중하는 박수로!’라고 말하면 우리가 박수를 세 번 치면서 선생님을 봐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세상에. 그 유치한 규칙을 리쌍샘은 되게 진지하게 소개해서 더 웃겼는데, 이게 또 의외로 수업을 하다 보니 꽤 괜찮았다. 박수를 몇 번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리쌍샘한테로 시선이 모아졌던 것이다.

 

, 이렇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쉬, 사람은 잘 생기고 봐야 하는 군요.”

 

~~~~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다들 웃음이 나서 더러 깔깔대기도 했는데, 리쌍샘이 함께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둠토의를 하면서 이미 많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눈 거 같은데요, 서미혜의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 급하고 과잉된 행동의 원인을 살피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먼저, 서미혜와 김승호의 스킨쉽이 어디까지 갔는지, 아는 사람?”

 

이 소설에 스킨쉽이 나와요?”

 

놀라며 크게 말한 7반 연재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꺄아악 하며 웃었다. 그리곤 다들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하던 때에 갑자기 혜민이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가슴이요!”

 

아이들이 다시 꺄아악 하며 술렁였다. 다들 혜민이를 돌아보았다. 혜민이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설 학습지 10쪽에 나와요.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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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1/ 4

자전거도둑 2014.09.28 14:55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1.

 

저기... 수정아... 같이 가..어멋!!”

 

우당탕탕, 철퍼덕. ... 아야... 아이고 아파라... 아놔, 진짜.

 

오늘도 넘어졌다. 야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멀리 수정이를 본 듯해서 부르며 달려가던 참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발라당 엎어진 것이었다. 에라이.. 대체 내 무릎관절에는 무슨 중요한 부품이 하나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달팽이관이라던가, 그 귀 속에서 균형을 맞춘다는 그게 뭔가 심각하게 덜 꼬여서 그런 것인지, 유독 자기만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는 건가 싶어서 미지는 속이 상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자주 넘어지는 미지였다. 그래서 미지의 무릎과 팔꿈치 주변에는 온갖 쓸리고 까진 흉터가 유난히 많았다. 얼마나 자주 넘어졌는지, 아기 때는 한 달음에 달려와 미지를 안고 상처를 살피던 엄마도 언젠가 부터는 미지가 넘어져도, 심지어는 무릎이나 팔꿈지에서 피가 베어 나와도, , 그래, 우리 딸, 탁탁 털고 일어 나야지, 아이고 이뿌다,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대하셨다. 미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예 책가방 안쪽 비밀주머니에 대일밴드와 빨간약을 넣어두고 넘어지거나 다치면 이걸 바르고 붙이라고 엄마는 미지에게 말했다. 글쎄... 그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넘어져 다치면 빨간약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는 게 워낙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또 그 때 의사놀이를 할 때면 으레 자주 쓰는 장난감이 그것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릎과 손바닥과 팔꿈치가 욱신거리며 쓰라렸다. 어디에 큰 상처가 하나는 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었던 것은 누가 나를 보진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혹시 누가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를 봤으면 어쩌지? 아 진짜... 이 쪽팔림을 어쩔 거냐... 일단, 확인을 해야 했다. 미지는 엎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조금 안심이 되자 미지는 살짝 고개를 들어 좌우로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다행이었다. 미지는 다행이란 생각에 마음이 풀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텅빈 운동장에서 혼자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좀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웃음이 나자 미지는 괜히 마음이 풀어져서 그냥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왕 엎어진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엎어진 김에 누워 간다고 누가 그러지 않았나? ‘상처라는 게...

 

...상처. 미지는 잠깐, 가슴이 먹먹해졌다. 상처. 오늘 방과후 수업 내내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오늘 미지가 넘어진 것도 이 낱말에 마음을 뺏겨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지는 멍하니 수업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다가 찌릿, 마음 한 구석이 되게 아팠다. 그게 싫어서 미지는 엎어져 있던 몸을 돌려 철푸덕, 가슴을 쫙 펴고 벌렁 누워 버렸다. 수정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생하게.

 

말 함부로 하지 마. 너는 몰라. 너 같은 애는 진짜 모른다구. 고개 끄덕이지 마. 고개 끄덕이지 말라고. 뭔가를 알겠다는 그 표정 그거 정말...”

 

. . . ... 수정이가 마저 못했던 말은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미지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이 찡..하며 아팠다. 심장 안에서부터 무언가 뾰족한 것이 바깥을 향해 꾸우욱 찌르는 느낌.

 

모둠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전혀 없던 수정이가 갑자기 너무나도 흥분해서, 미지에게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미지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한 일이라 더 당황했다. 옆에 앉은 지원이에게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미지가 수정이한테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뭘 잘못한 건 아니라고 지원이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지원이는 가만히 있었다. 늘 그러던 것처럼 책상의 어느 한 구석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몸을 뒤로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 수정이가 한바탕 말을 쏟아 놓고 씩씩거리며 흥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지원이는 몸을 책상 앞으로 숙이더니 조용히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수정이가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뜨거운 눈빛이었다. 지원이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았다. 차갑지만, 뭔가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수정이가 고개를 돌리며 살며시 손을 빼고는, 그대로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았다. 지원이는 그런 수정이를 말없이 보더니, 고개를 돌려 미지에게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미지가 잘못한 거 같아. 네 잘못이 아니지만, 네 잘못이야. 그런 말은 미지가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말이라니.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니. 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수정이에게 한 말은 늘 하던 말이잖아. 어려운 말도 아니고, 나쁜 말도 아니었어. 비난하는 말도 아니고 조롱하는 말도 아니었어. 당연히 욕도 아니었지. 그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야?

 

이해해.”

 

그게 미지가 한 말이었다. 미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말이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말이란 것인지.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그래서 더 화가 나서 미지는 속으로 이런 말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말도 내뱉지 않고 미지는 가만히 있었다. 미지는 그게 무슨 말이든 왠지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잠시 멈추는 게 필요할 거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과후수업이 끝나고 미지는 그게, 그러니까 잠시 멈추기로 하자 했던 그 마음만이, 오늘 자기가 한 말과 행동 중에 유일하게 잘 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차가운 밤이었다. 맑은 밤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도시답지 않게 하늘의 별이 빛났다. 그렇게 미지는 밤하늘을 보며 한참을 누워서, 오늘 읽었던, 그래서 오늘 우리를 싸우게 했던 소설을 다시 생각했다. 그건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이었다.

 

 

여자의 유혹

 

오늘은, 쌕쉬한 소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소설을 나눠주며 리쌍샘은 오늘따라 왠지 능글능글, 무언가 기름진 눈빛으로 약간 들떠 있었다. 자기가 아는 중에 가장 섹시한 소설이라고 하셨다. 섹시한 소설이라니, 이 사람이 아무리 엉뚱하다고 해도 멀쩡한 여고생들을 데려다 놓고 무슨 야설을 보여주는 건 아니겠지? 남선생님들이 멀쩡히 잘 지내다가도 한 마디, 행동 한 번 잘못하면 그대로 변태로 찍혀서 어디 다른 학교로 갈 때까지 아주 죽을만치 고생하게 되는 게 여고의 생리라는 걸 혹시 모르시나? 미지는 좀 어이가 없으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두근두근하며 기대가 된 채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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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 편집 관련 2014.09.28 12:24



1 지원- '사랑'인듯, '사랑'아닌, '사랑'같은.. 레스터 델 레이, <헬렌 올로이>

2 미지- 아침밥을 먹을 '권리' 카프카, <변신>

3 미지- 머리카락을 기를 '자유' 김승옥, <역사>

4 수정- ‘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김경욱, <맥도날드 사수대작전>

5 단비- ''이냐 돈이냐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6 미지- 빨간 약, 혹은 대일밴드 김소진, <자전거 도둑>

 

 이게 흐름이 좋은 것 같아.

차갑게 시작해서 따뜻하게

지원에서 미지로

사랑에서 사회 역사를 거쳐 사랑으로

개인에서 사회를 거쳐 개인으로

친구 미지 미지 친구 친구 미지 요것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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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냐 돈이냐

"꿈"이냐, 돈이냐

 

 

4월 단편소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야, 미지야. 너 그거 봤어?"

  "뭐?"

  "케이블에서 하는 드라마 말야. 고등학생이 대기업 본부장인가로 나오는."

  "아. 그거 알아. 근데 아직 보진 못했는데, 벌써 시작했어?"

  "어. 이번 주말에 시작했는데, 대박. 꼭 봐? 보고 이야기 좀 하자 나랑."

  "그 드라마가 왜?"

  "아니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재밌고, 이제 첫 화긴 한데 남주 매력 터지고. 딱 내 스타일이거든. 이 드라마의 향후 전개에 대해서 예비 작가님한테 이야기를 꼭 듣고 싶어서 말야."

  "정말 요샌 케이블이 대세라니깐. 보기만 하면 열불 터지는 막장 드라마 없지, 뻔하디 뻔한 재벌 드라마도 없지. 소재도 신선하고. 배우들도 신선하고."

  "그건 그래. 근데 나는 뻔한 드라마도 보다보면 재밌든데, 존잘생긴 애들도 많구."

  "아니야. 뻔한 드라마는 그 자체로 죄악이야. 특히 배우 바뀌고 회사만 바뀌는 재벌 드라마는 꼭 사라져야할 존재라구. 나는 작가되면 그런 건 절대 안쓸거야."

  "그래. 유난히 재벌이 많긴 해. 근데 왜 계속 재벌이야?"

  "단비야, 그건 말이야. 방송사들도 무한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작단가를 낮출려고 외주제작 드라마들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외주 제작사들은 개네들 나름대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간접광고에 목을 매게 되고 광고비를 많이 받으려면 아무래도 대기업이 들어오는 편이 수월하니까..."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봐."

  "뭐 돈이 되니까 그렇지." 

  "그래, 돈. 그게 제일 중요하지. 그렇긴 해."

  "근데 너 오늘 보충 들을 거야? 왜 계속 빠져?"

  "아, 그거. 오늘은 들을 거야. 걱정 마." 

 

 

화성에서 온 단비

 

  돈이 제일 중요하다. 이 냉혹한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화성인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처럼 더운 날엔 짜먹는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먹으면서 나는 원래 더위를 잘 견디는 체질이었을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곰곰히 따져 보려면, 결국 돈이 있어야 한다.

 

  엠버. 내 별명이다. 대형 기획사 소속 걸그룹에서 보이시한 역할을 맡고 있는 멤버의 이름이다. 그래 내가 남자애 같기는 한데 왜 걔랑 비교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걔는 나랑은 다르게 눈은 크고 얼굴은 작고 피부도 좋다. 펑퍼짐한 옷을 주로 입는 까닭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몸매도 좋을 거다. 내가 걔랑 비슷한 거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큰 키, 그리고 짧은 커트 머리 밖에는 없을 텐데. 그래도 나는 그 별명이 썩 싫진 않다. 내 주제에 아이돌이라니.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한때는 내가 정말 남자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초등학교 내내 팔씨름이든 닭싸움이든 힘으로 하는 거는 져본 적이 없고 여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보다 더 잘 달리는 아이는 본 적이 없다. 피구를 해도 발야구를 해도 늘 나에겐 '넘사벽'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서 모두 내가 있는 편에 오려고 하는 게 기분 좋았다. 샤워를 하는 욕실에 전신거울만 없었다면 나는 정말 내가 남자구나 하고 착각하며 살았을 지 모른다. 그랬던 게 고등학교에 와서는 조금 바뀌었다.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는 체육시간에는 -대학에서 그것을 전공했다던 선생님 덕에- 발레를 한다. 체육시간에는 자고로 한바탕 땀나게 뛰어야 성이 풀리는데 보기만 해도 민망한 타이즈 바지를 입고 몸을 배배 꼬고 있으려니 몸만 꼬이는 게 아니라 심사도 꼬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1년에 하루 체육대회가 있다는 것은, 그것도 1학기인 5월에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날 하루 반짝 하면 일년 내내 무시받지 않고 산다. 이날 만큼은 아무도 날 막을 수 없겠지, 벼르고 별려 왔건만 체육대회 예선 종목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줄다리기, 단체 줄넘기 같은 고전적인 반대항 종목은 그런다 쳐도 '안전바 밀어밀어', '릴레이 신발 던지기', '널빤지 공 튀기기' 같은 중딩스럽고 아기자기한 게임들 속에서는 도무지 나의 탁월한 신체적 역량을 마음껏 뽐낼 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건강 에어로빅은 또 뭐냐. 우리가 무슨 주민센터 아줌마도 아니고. 우리 앞에서는 우아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한가득 숨겨놓은 뱃살을 어찌할 줄 몰라 고민하는 발레 전공 체육선생님의 농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자 단비는 분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면 신경써야 할 종목은 딱 두 개에 불과했다. 이어달리기와 개인 줄넘기. 결승전이라곤 하지만 워낙 실력차들이 있었던 탓에 한 바퀴 가까이 차이가 나고 말았던 이어달리기도 시시했고, 30분 가까이 줄을 넘다 비로소 시작된 이단뛰기도 150개를 넘어가자 슬슬 걱정은 되었지만 결국엔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이기고 만 개인 줄넘기에서는 '저거 참 독하네' 하는 뒷소리만 많이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던 1학년의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자 단비는 갑자기 늙어버린 것 같았다. 몰랐으면 좋았을 인생의 비밀을 알아채 버린 어린아이처럼 말수가 줄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건 참 기가 막힌 일이다.

 

  그때 눈에 띈 게 미지였다. 잡티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나는 명랑해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눈빛, 거기에다가 친절한 미소와 덤벙거림까지. 한 눈에 봐도 인기있을 것 같은 저 아이와 함께라면 남은 고교 생활은 순탄할 것 같았고, 예상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그런 미지가 공부까지 잘하는 건 덤이었다. 그 덕에 바닥을 기던 내 성적도 올해에는 조금씩 밝은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라인을 잘 타야 돼, 라는 말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염미지 라인.

 

  "단비야, 니 사진은 다 좋아. 기획 좋고, 구도 좋고. 근데 색감이 살짝 떨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색감? 그게 어떤데?"

  "음... 뭐랄까. 너무 천연색이 많이 섞인 느낌이랄까? 좀 파스텔톤이 섞이면 고급스러울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도 나 카메라 바꿀려고 알바하고 있어. 지금 있는 거는 어지간한 폰카보다 못해서 말야. 카메라 사면 나랑 사진 찍으러 가자."

  "우와! 언제쯤? 꼭 나랑 가기다! 약속했어?"

 

  아, 이 세상 걱정없는 밝은 녀석. 미지는 드라마 작가가 꿈이라는데 정말 십년쯤 지나고 나면 TV 화면 속에서 '염미지 극본' 이라는 다섯 글자를 볼 것만 같은 기대감이 들 정도다. 기대감? 모르겠다. 그게 기대감인지. 체육대회 종목을 알기 전에 내가 가졌던 감정이 기대감이라면 종목들을 알고 나서 내가 가졌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미지가 이름난 드라마 작가가 되는 건 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그 때가 되면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정단비. 너는 도대체 뭐가 될 거냐?

 

 

 

금성에서 온 미지

 

  "당연히 돈보다는 사랑이지."

  그래. 돈보다는 사랑을 택할 낭만도 기미 하나 없는 하얀 피부 정도는 가져야 가능한 거지, 라고 단비는 생각했다. 해도 뜨기 전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샛별처럼 하얗고 조막만한 얼굴을 갖고 있는 미지는 분명 금성인임에 틀림없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금성은 영어로 비너스라니 참 아니꼽게도 어울린다 싶었다. 화성은 영어로 뭐라고 부를까? 파이어스? 아니면 바이러스? 화성인 바이러스? ㅋㅋㅋ

 

  꿈? 그게 나중에 무슨 직업을 가질 거냐고 묻는 거라면 나도 그런 게 하나 있긴 하다.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 그게 내가 꾸는 꿈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타고난 신체능력을 발판삼아 체육선생님이나 할까 했었는데 그것도 담임이랑 상담하고 나서는 물건너 갔다.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사범대의 성적과 어떻게 지방의 사회체육과를 가더라도 날고 기는 애들도 재수 삼수가 기본이라는 임용고시 얘기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대신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만화나 그리면 좋겠다 싶어 만화가가 되려고 했다. 근데 이건 또 웬 인생급 태클인지 따지기 좋아하는 혜민이란 녀석이 만화가가 되려면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아야 하며 머리까지 좋아야 한다는 거다. 옆에서 수정이가 맞장구 치지만 않았어도 나도 한 마디 따져 보았을 텐데 그 때 한 마디도 못하고 나서는 꿈을 바꿨다. 그래. 생각해보면 만화는 그림만 있는 게 아니고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거는 금성사는 미지나 잘 하지 나하곤 영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 인터넷을 뒤진 끝에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라는 직업을 찾아냈다. 적당히 길고 적당한 영어도 들어가 있어서 있어보이고 좋다. 그래. 그렇게 내 꿈은 만화 배경 어시스턴트로 정해졌다.

 

  화성에서 온 주제에 지구인 흉내라도 내고 살아가려면 참고 버티는 정도는 해야한다. 이번 학기부터는 방과후 학교를 신청해서 한다지? 당연히 미지와 시간표를 맞췄다. 들어봤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수학도 하나 끼고 다른 것도 딱히 나을 건 없지만 진짜 나랑은 완벽하게 반대편에 놓여있는 영어도 하나 꼈다. 남는 칸엔 뭐지? 그나마 들을 만한 국어 차롄가 하고 보는데 뭔 제목이 이리 길어.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인문학? 아니 국어쌤이 왜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거야? 그리고 문학이면 문학이지 인문학은 또 뭐야. 내가 실업계에 온 건 아니니까, 인문계는 다들 인문학이란 걸 배우나? 그렇게 시작한 수업은 소설 읽는 수업이었다. 한 시간은 소설을 읽고, 한 시간은 수다를 떤다. 나머지 한 시간에 발표를 하거나 글을 쓴다. 나의 경우에는 마지막 시간엔 대개 잠을 잔다. 아, 이 얼마나 완벽한 조합인가. 소설책을 읽고, 수다를 떨고, 잠을 자는 수업이라니.

 

  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나는 잠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딴 생각은 할지언정 엎드려 자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생겼다.

  사진을 찍고 싶다. 이왕이면 컴퓨터 바탕화면 같은 멋진 걸루. 풍경 사진을 찍고 나서 그걸 그림으로 옮겨보는 게 내가 요즘 흥미를 붙이고 있는 일이다. 이게 퍽 재미가 있다. 연습장 한 바닥에 사진 한 장을 정밀하게 그리려면 -그림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시간 반 정도가 필요한데 이거 하나 하고 나면 야자 시간이 뚝딱 갔다. 다 그린 그림을 칠판 가운데에다 슬쩍 붙여 놓으면 내일 아침 담임이 발견하기 전까지 많은 애들이 본다. 심지어는 사진으로 찍어 담아가는 애들도 있고, 그렇다. 한번은 지원이네 반에 놀러갔을 때, 칠판에다가 송도 신도시를 그렸었는데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자세히는 못그렸지만 리상쌤이 정말 대단한 재주라고 칭찬도 해줬다. 아, 얼마만에 듣는 선생님의 칭찬인가.

 

  DSLR을 갖고 싶다. 하지만 집엔 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알바를 한다. 편의점 야간 알바. 여자 고등학생이 편의점 야간알바 자리를 따내기는 쉽지 않지만 내 덩치와 보이시한 분위기가 한몫 했다. 덩치가 고맙기는 처음이었다. 다음날 쳐박아뒀던 이력서를 다시 꺼내 읽어보시고 나서야 내가 여자임을 인정한 점장님은 내가 여학생임에도 생각대로 무거운 음료 박스를 잘 나른다며 탄복했고, 내가 여학생임에도 생각보다 밥을 많이 먹는다며 탄식했다.

 

  "소설에서 기린이 뭘 상징하는가를 알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소설이란 그냥 재밌게 읽으면 그만이죠. 재미 있게 읽고 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세요. 없으면 말죠 뭐."

 

  없으면 말라니. 참 무책임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 불러주며 칭찬해준 선생님이니 넘어가지 뭐, 라고 생각했지만 단비는 할 이야기가 없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기억이란 게 있던 순간부터 아빠는 늘 누워만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할 때도 응 그래, 학교 다녀왔습니다 할 때도 응 그래. 가끔씩 일어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늘 가슴을 쥐어뜯으며 장판이 꺼질 듯 기침을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중3 때. 참 희한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오히려 살만해졌다는거다. 한부모가정인가 뭔가도 됐고 그래서 주민센터에서 돈도 얼마 나오고 그러니 나랑 동생 학비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했다. 옷은 맘대로 못 사입어도 수업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옷이야 뭐 알바하면 되니까 뭐 걱정거리도 안된다. 아빠는 갔지만 우리는 잘산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쌤쌤.  

  지금이야 그림 그리는 야자도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천국이었다. 알바천국. 뭔가 부모님 몰래 돈이 필요한 애들은 죄다 나한테 상담을 했다. 나는 또 나대로 그런 애들이 반가워서 열과 성의를 다해 안내를 해주곤 했다. 초딩때부터 전단지도 돌리고 신문도 돌리고 했던 경험을 밑천삼아 주유소에 편의점에, 안해본 일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참 많은 일을 해본 건 사실이다. 얼마 전엔 공부도 잘하고 도도한-공부를 잘하면 저절로 도도해지는지 나는 참 알 길이 없긴 하지만-수정이가 알바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하길래 호텔 부페 서빙 알바를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소개라니, 나도 같이 하려고 갔다가 과장이란 사람이 너는 안된다며 훼방을 놓는 통에 주차장에 내려가 딱봐도 할아버지같은데 자기는 노총각이라고 주장하는 아저씨와 농담따먹기는 많이 했지. 검은 진에 흰 남방을 입고 오라고 하길래 깔끔하게 차려입고 갔는데 수정이한테는 근사한 베스트를 주고 나한테는 분홍색 어깨띠와 경광봉을 주길래 이거 참 폼이 안난다 싶었지만 뭐 폼이 중요한가. 돈이 중요하지. 끝나고 오는 버스 안에서 수정이한테 물어본 결과 받은 돈은 같았으니 뭐 또 결과적으로는 쌤쌤.

 

  노동의 현장을 꼭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다나 어쨌다나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은 수정이도 그렇지만 말이 많다는 건 또 금성인들의 특징인가 보다. 미지 이 녀석도 말이 꽤 많다. 늘 붙어다닌 덕이긴 하지만 나조차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대로 지구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렷다.

 

  "알바하면 힘들겠지?" 딱히 나를 보고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내가 대꾸하지 않으면 맥이 탁 끊길 것 같아 "힘들긴 뭘." 하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금성인이 화성인의 마음을 알까 싶었다. 라면값이 왜 이리 비싸 요앞 마트는 다섯개 삼천원 하더만 아니 아줌마 그러면 거기 가서 사시든지요-네네, 청년이 고생이 많네 아니 할아버지 제가 청년으로 보이세요-네네, 어째 결산이 안 맞는 것 같네 돈이 비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딴짓 못하게 cctv까지 달아논 거 다 아는데 무슨 소리세요? - 네? 아, 네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 네네 하며 웃어주면 그럭저럭 시간이 가고 그럭저럭 시간이 가면 여차저차 돈이 들어오는 게 알바라는 것을 금성인들이 꼭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돈보다 사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도 그런 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기가 쉬웠다.

 

 

나의 산수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분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산수. 시간당 오천백원씩 열시간이면 오만천원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사흘하면 십오만삼천원 그렇게 한달 반을 하면 구십만원이 모이는구나 하는 게 내가 세운 식이었다. 물론 공식을 세운다고 답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다. 온갖 유혹을 견뎌내야 비로소 답을 낼 수 있다. 키스가 푸딩 맛일까 푸딩이 키스 맛일까 같은 알쏭달쏭한 궁금증도 천이백원이 있어야 풀 수 있다. 그러니 그런 궁금증은 갖지 않는 게 건강에 좋다. 치즈 넣은 불닭볶음면이 맛있어요 계란 넣은 불낙볶음면이 맛있어요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건 그냥 둘다 살쪄요 라고 생각하고 전주비빔밥의 껍질을 뜯으면 된다. 야간 편의점엔 까먹고 싶은 게 정말 많지만 유통기한이 갓 지난 삼각김밥과 달달한 쥬시쿨이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

 

  온갖 유혹을 참고 답을 냈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신이란 게 있다면 이거야말로 신의 영역이 아닐까 하고 단비는 생각했다. 내가 낸 답에 동그라미가 쳐지느냐 마느냐. 카메라는 손안에 잡히는가 싶더니 엄마의 아픈 허리가 도졌다. 병원에 사흘 입원해있던 엄마는 허리에 커다란 압박 붕대를 감고 돌아와서는 두 달동안 마트에 못 나갔다. 에휴 갖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어쩌누 어쩌긴요 엄마가 쉬니 나라도 벌어야지. 편의점엔 애초에 세운 공식보다 한달 반만큼 더 나갔고 카메라는 없었다. 내가 하는 산수란 늘 그런 식이다. 빼기와 나누기는 많은데 더하기와 곱하기는 없다. 운좋게 더하기가 들어서면 다음엔 0이 오고, 더 운좋게 곱하기가 들어서면 다음에는 1이 오고. 그러다가 빼기, 그러다가 나누기.

 

  "열차는 뭐 가장 기본적인 은유지. 한 량의 정원은 180명인데 실은 400명이 타야한다잖아. 당연히 못타는 사람들이 있겠지." 수정이가 간단하다는 듯이 말했다.

  "못타는 사람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못타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리고 문제는 탄 사람들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는 거지. 밀리고 구겨지고 봉변당하고." 혜민이의 말이었다.

  "그럼 편안히 가는 사람은 누구야 도대체? 기관사야?" 미지가 물었다.

  "아니 기관사도 결국엔 승객이야. 코레일 사장 쯤은 되야 편안히 가는 사람이지." 수정이였다.

  "그럼 필요한 건 열차를 늘리는 거네. 배차간격을 좁히든 차량 크기를 늘리든. 그래야 되는 거잖아?"

  "꼭 그 방법만 있는 건 아니지. 이용하는 사람을 줄일 수도 있지."

  쭉 지켜보던 단비가 갑자기 끼어들자 애들은 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단비야.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다른 교통수단으로 나누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모두 열차를 타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야지."

  "아니. 그냥 사람을 줄여버리는 거야. 출근하지 못하게."

  "실직 얘기야?" 미지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뭐 실직일 수도 있고 다른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면 되는 거잖아."

  "다른 거라니?"

  "예를 들면, 음... 주... 죽음이라든지."

  "그건 일반적이지가 않잖아.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다고."

  "아니야!"

  단비가 갑자기 너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교실에 있는 모두가 우리 모둠을 쳐다보았다. 덕분에 리상쌤이 우리 모둠으로 오셨고, 아이들은 더욱 우리를 주목하였다. 

 

  "음... 무슨 일이 있나요?"

  "음.. 그게... 어..."

  "아니에요. 아무 일도. 죄송합니다." 

 

  "열차와 산수 이야기가 그렇게 복잡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꼬리를 잡으려면 소설을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모둠활동에 집중하세요들!"

  모두를 향해 그렇게 말씀하신 리상쌤은 내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으신다. 두 손을 책상 위로 모은 채 턱을 살짝 괴고 자리에 앉아있는 날 올려다 본다. 많이 조심스러운 눈초리다.

  "음... 무슨 일이죠?"

  단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아빠는 죽고 우리 엄마는 실직해서 내가 대신 열차를 타고 있는 거라고, 세상은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니네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렇게 눈 똥그랗게 뜨고 놀랄 일은 아니라고. 니네도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 나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럴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그럴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열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비좁은 열차에 많은 사람이 타는 해결책을 찾고 있었는데 미지가 차량을 늘리는 방안을 이야기했고, 단비는 사람을 줄이는 방안을 이야기했어요."

  이럴 땐 수정이도 참 고맙다. 고마운 금성인.

  "사람을 줄인다는 건 무슨 이야기죠?"

  리상쌤이 또 나를 쳐다본다. 어쩌란 거야. 나에 대해 알고 싶어? 알고 나면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 감당할 수 있어?

  "실직이라든지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줄어들 수 있다고."

  이번엔 미지다. 아깐 얄미웠지만 지금은 너무 고맙다. 또 고마운 금성인.

  "실직과 죽음이라... 음..."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조용했다. 그 와중에 단비는 좀 멍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구석에 몰리는 듯한 경험,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이럴 때마다 더 날카로워지는 자신이었다.

  니네들이야 공부 잘하니깐 다들 대학 가겠지만 나는 몰라 내년에 우리집 상황이 어떨지. 사랑? 꿈? 좋지. 근데 정말 중요한 건 돈이야. 돈이 있어야 데이트도 하고 돈이 있어야 결혼도 해. 돈이 있어야 꿈도 꾸는 거야. 나는 가끔 무서워. 이렇게 죽기전까지 알바만 하다 어느 순간 그냥 사라져버릴까봐. 어느 순간.

  "음...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사실 아직 전체적으로 논의는 안했지만 그 얘기는 다음 토의 주제거든요."

  리상쌤은 비밀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쭉 빼며 이야기했다. 덩달아 우리의 목과 눈도 쌤을 닮아갔다.

  "사실 열차라는 걸 만든 사람들의 전략은 그래요. 누구나 다 열차에 뛰어오게 하고 열차를 타야만 하게 만들죠. 180명 정원에 400명을 밀어넣고도 타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 있길 바라죠. 그러다가 타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아까 단비가 말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거에요. 대량 실업 사태라든지, 기아, 천재지변, 심지어는 전쟁까지."

 

  내가 한 말이 맞단 말이지. 틀린 게 아니라고. 틀린 게 아니다. 틀린 게...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에요. 너무 심각하시네들. 하하하."

  리상쌤은 장난기 자글자글한 얼굴로 또 경박하게 웃었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소설은 뜨거운 여름에서 시작해서 이상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에서 끝나요. 지구의 봄은 따뜻한 계절이죠. 만물이 소생하고 새싹이 움트는. 여러분들은 봄을 좋아하세요?"

 

  봄. 그런 계절이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고 새싹이 움튼다는, 상상만 해도 따뜻하고 졸리운. 근데 그런 계절이 있었나? 잘 모르겠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사이에 끼인 우울한 가을은 기억이 난다. 봄. 봄 같은 계절, 봄 같은 기억.

 

  "쌤이 말씀하신대로 시간의 흐름은 그래.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지나서 봄에서 끝나. 근데 다른 축을 생각해보면 여름으로 서술된 부분은 뭐라그럴까 현실적이랄까? 그냥 그렇고 그런 청소년소설 느낌이잖아. 근데 가을 부분에서 뭔가 좀 환타지스럽더니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갑자기 지하철역에 기린이 와서 앉아있고 그러잖아. 말도 안되는 환상이란 말이지."

  수정이는 오늘도 말이 많다.

  "시간적 배경이랑 소설의 서술이 함께 가고 있다는 말이야? " 미지는 오늘도 궁금증이 많고.

  "그렇지. 그런 셈이지.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 게 있는데 그건 화성이랑 금성 얘기야. 왜 처음 여름 부분 시작할 때 그렇게 말하거든. 화성인들은 좋겠다. 또 겨울 부분 시작할 때는 금성인들은 좋겠다라고 하거든. 화성이랑 금성. 이 부분도 이야기해봐야 돼."

 

  '화성'이라는 말에 깜짝한 단비는 수정이의 말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여름과 현실 그리고 화성. 겨울과 환상 그리고 금성. 수정이처럼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할 순 없지만 마음 속에서는 뭔가가 하나의 실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그건 같은 건데 여름이랑 현실도 그렇고 또 겨울이랑 환상도 그렇고 거기다가 금성도..."

  "단비야,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해줘봐."

  "그러니까 니네들은 금성인이니까 차가운 거고 그러면서도 꿈이나 그런 걸 갖고..."

  "아니 우리가 왜 금성인이야? 그럼 너는 화성인이냐? 하핫"

  혜민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단비는 아무래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화성이랑 현실, 금성이랑 환상이 연결되는 건 맞는데 그게 여름이랑 겨울이랑은 연결되지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야. 화성은 엄청 춥거든. "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지원이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화성이 추워? 왜? 화성은 뜨겁잖아. 그래서 화성 아니야?"

  "아니야. 화성은 추워. 오히려 금성이 뜨겁지. 화성이 빨간 건 표면에 철분 성분이 많아 그게 산화되면서 붉은 색을 띠는 것 뿐이야. 쉽게 말하면 녹슨 쇳가루가 날라다녀서 그런 거라구."

  "그래. 그러면 아귀가 맞아. 왜냐면 소설에서 화성인들은 좋겠다고 그랬거든. 지구는 더운 여름이니까, 화성인들은 좋겠다. 화성이 추운 곳이어야 그 말이 맞지. 반대로 겨울엔 추우니까 금성인들은 좋겠다. 금성이 뜨거운 곳이어야 그 말이 맞지. 그러네!"

 

  화성이 뜨거운 게 아니라 차갑다고? 오히려 금성이 뜨겁다고? 그럼 나는 뭐지? 나는 화성인인데, 그게 맞는데. 아니 진짜 애들 말이 맞는 거라면 나는 금성인인가? 말이 안되는데...

 

  그 다음엔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늘 하던대로 멍하니 딴 생각을 했을 뿐이고 애들이 주고받는 소리도 리상쌤의 썰렁한 유머도 BGM으로만 남아 인식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알았을까. 내가 금성인이었다니. 이른 저녁에, 새벽에 그렇게도 밝고 찬란하게 빛나던 곳이 내 고향이었다니. 사랑의 비너스. 내가 그곳에서 왔다니.

 

  화요일 아침 단비는 일찌감치 일어나 집을 나왔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살짝 들러 삼천원을 들여 오렌지색 립글로스를 하나 샀다.

 

  "단비야. 너 리상쌤이 잠깐 오라든데? 야 너 근데 입술이 왜 그래? 뭐 발랐어?"

  "어. 음.... 이상해?"

  "아니? 완전 이쁜데! 너무 귀여워. 완전 엠버, 아니야 설리 같애. 설리! 무슨 바람이야? 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아니. 뭐 그냥. 너 따라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가봐."

  "빨리 가봐! 리상쌤 놀래겠다. 캬캬컄" 

 

  교무실에 들어서니 리상쌤은 컴터 앞에서 뭔가를 열심치 치고 계셨다.

  "선생님. 부르셨다고..."

  "어. 단비 왔구나. 잠깐만. 어디 뒀더라... 아! 여깄다."

 

  "이건 딴 애들한테는 비밀인데..."

  리상쌤은 특유의 가는 눈을 하고는 주위를 쭉 살폈다.

  "사실은 나도 거기에서 왔어. 이건 선물이야. 고향친구가 주는 선물."

  쌤이 내민 건 시집이었다. 김명인이라고. 그 다음엔 또 기억이 잘 안난다. 뭔가 변했단 이야기가 들렸고 나는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던 것 같다. 교무실을 나와 자리에 돌아와서 시집을 펼쳐보았다. 중간에 책갈피가 꼽혀 있었다. 그 책갈피엔 조잡한 솜씨로 기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기린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말풍선을 하나 달고 있었다.  

 

 

  "지구에 온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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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완성판

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김경욱, <맥도날드 사수대작전>

 

 

1.

 

돈이 필요했다.

 

엄마는 내색을 안하려고 했지만, 어제밤 내내 엄마는 자꾸만 우두커니 서서, 멍해져 있었다. 밥을 먹다가, 빨래를 개다가, 어제 먹던 깻잎통이 어디 있는지, 아빠 작업복은 어디에 두는지, 수정이가 엄마에게 물을 때마다 엄마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다시 불러야 엄마는 화들짝 깨며 수정이를 보았다. , 그래, 수정아, 뭐라고 그랬지? 하며 엄마는 물었지만, 그 물음 뒤에 서려 있는 아득한 표정을 엄마는 수정이에게 감추지 못했다.

 

분명 방과후수업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 아침 조례가 끝나고 담임샘이 수정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지난 3월부터 방과후수업비가 밀려 있으니 이번 주 안으로 꼭 내 주시라고 부모님께 알려드리라고 하셨다. 가끔 부모님이 실수로 착각하실 때가 있다며, 담임샘은 별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수정이도, 별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왔지만, 사실 수정이에게 이 일은 여전히 별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자주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아니, 이런 걸 겪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더욱, 이런 일은 수정이에게 여전히 '별 일'이었다.

 

마음이 잔뜩 불편해져서, 수정이는 오늘만큼은 리쌍샘의 방과후수업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입사 대비로 논술면접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한 수업이었다. 뭔가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그 동안의 수업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아서 나름, 재미를 느끼고 있던 수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 역시, 이 수업은 듣는 게 아니었어. 아마 종례가 끝나고, 미지가 수정이에게 팔짱을 끼며 늦었다고 우당탕탕 끌고 오지 않았다면, 수정이는 오늘 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지의 호들갑 때문에 엉겁결에 자리에 앉긴 했지만, 수정이는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오늘도 여지없이 '안녕하세용~' 하는, 되도 않는 개인기로 인사를 시작하는 리쌍샘을 보고도 평소처럼 웃음이 나지 않았다.

 

어떤 알바를 해야 할까. 수정이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홀써빙은 시급은 쎘지만 일이 고되고, 괜한 오해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술 취한 남자들이 불쾌한 짓들을 하는 때도 많다고 했다. 전단지 알바는 수정이도 해 본 적이 있었다. 일이 간단하긴 했지만 시급이 짰고, 일도 자주 없었는데, 무엇보다 수정이가 꺼림직 했던 건, 뭔가 일이 볼품이 없었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괜히 뒷골이 땡기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실제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동네 할머니에게 한 바가지 욕을 들어먹기도 했다.

 

수정이가 보기에 꽤 그럴 듯한 알바는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깔끔한 제복에 하는 일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만 일하는 게 그냥 보기 좋았다. 시급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요일도 선택할 수 있고, 시간대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야자는 뺄 수 있었다. 수정이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0등에서 오르내리는 정도는 됐다. 정리의 힘이었다.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않고도 이 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담임샘은 무척 대견해 하셔서,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수정이가 야자를 빼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허락해 주셨다. 물론 엄마도, 전적으로 수정이를 믿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뭘 해도 늘 깔끔하게 마무리를 잘 해 놓는 수정이여서, 요즘은 오히려 엄마가 마음으로는 수정이에게 기대는 때가 많았다. 중학교 때, 3년 내내 여름방학마다 이어졌던 20일의 해외 어학 캠프도 혼자 다녀온 수정이었다.

 

그래, 맥도날드. 거기를 알아봐야겠어. 수정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리쌍샘이 소설을 건네 주었다. 무심결에 소설을 받았다가 수정이는 깜짝 놀라서 눈이 번쩍 뜨였다. / / / . 소설에 그 네 글자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다, / / / / , 이라니. 뭘까, 이 소설.

 

 

2. 당신의 가치

 

"그러니 그해 봄 내가 새끼 밴 고양이처럼 독기를 품은 채 지켜내려 했던 것은 거추장스럽기도 했던 순결과 있으면 성가시고 없으면 아쉬운 가정과 하나쯤 사라진다 해도 표도 나지 않을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 안락한 미래와 교환될 수 있는 나의 '가치'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몸값'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

 

고작 1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수정이는 이 문장 앞에 주저 앉아 넘어가지 못했다. 새끼 밴 고양이까지는 아니어도, 수정이는 요즘 자기가 정말 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다. 수정이는 이미 주말에 예식장 부페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 9시간이 넘도록 종일 서서 그 무거운 접시들이며 유리잔이며 음식들을 나르는 게 정말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은 뭐 그리 음식들을 빨리도 먹고 많이도 버리는지 음식을 셋팅하고 테이블 사이로 그릇을 거두고 나면, 어느 새 음식이 텅 비어 있었다. 멀리 카운터에서 말쑥한 정장을 빼 입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점장은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낌새가 보이는 것 자체부터 싫어해서, 바로 밑의 매니저들을 자꾸만 불러 채근했고, 덕분에 알바생들은 더 빡빡하게 홀을 뛰어 다녀야 했다. 독서실에서 하루 밤새면서 공부하고 오겠다고, 그렇게 토요일 새벽에 나와서 이틀을 꼬박 알바를 하고 나면, 나름 여고생 치고는 체력이 좋다고 자부했던 수정이도 너무 피곤하고 팔다리가 쑤셔서 돌아온 독서실에서 다시 책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이는 없는 힘을 짜 내어 책상 앞에 앉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모자란 공부를 마저 했다. 절박했다. 완전히 공부에만 몰입할 수 있는 여건에서 완전히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완전히 대단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수정이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수정이가 그렇게 살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사실 그 절박함은 불안함이었고, 근본적으로는, 두려움이었다. 수정이는 두려웠다. 지금의 이 생활도 유지할 수 없을까봐, 그래서 수정이의 인생마저 추락하게 될까봐서. 돈은 지금 당장 필요했지만 성적은 더 지금 당장 필요했다. 그것도 더 많이 필요했다.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고 해도, 성적이 떨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것이 몰락해 가는 집안에서 수정이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수정이가 가진 유일한 가치였다. 뉴스에서 몰락, 추락 운운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정말이지, 지금의 생활만이라도, 수정이는 사수하고 싶었다.

 

그런 불안함과 두려움이 시작되었던 것은 아마도 중 3 겨울방학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즈음부터 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술을 잘 못 먹는 아빠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는 침대에 쓰러지듯이 자는 날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진작에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엄마도 왜 그런지 그 즈음부터는 아빠를 가만히 두었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옷을 힘들게 힘들게 벗겨 잠옷으로 갈아 입힌 다음, 조용히 안방을 나와 손님방에서 잠을 잤다.

 

아빠는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도 아빠에게 그리 많은 걸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빠는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건실한 가구 공장의 사장님이었고, 15명이나 직원을 두고 있었고, 사업을 할려면 이 정도는 필요하다며 3년엔가 한 번씩 자가용을 바꾸는 사람이었다. 지금 수정이네가 살고 있는 신도시의 52평 아파트도 아빠의 한 마디로 이사오게 된 집이었다.

 

5년 전 이곳에 이사오려던 때,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가 아빠에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걱정하는 말을 건넸던 것을 기억한다. 아빠는 짧게 괜찮아, 그 정도는 돼, 라고 말했다. 뭐가 어떻게 무리라는 것인지 그 때 수정이로서는 정리가 안되었지만, 엄마의 불안함이 전해져 수정이도 무언가 걱정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집에 이사오던 날, 학교를 마치고 엄마차를 타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 와 엘리베이터로 12층에 내려 이 집에 들어섰을 때, 점점 커져가던 수정이의 두근거림은 베란다 커튼을 여는 순간 빵 터져 버렸다.

 

아기자기한 호수를 품은 커다란 공원과 그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바다가 저물어가는 노을빛에 빨갛게, 노랗게 가득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정말 예쁘고, 정말 시원했다. 아빠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진짜 고마웠다. 수정이는 신나게 이 방 저 방을 구경했다. 방이 다섯 개였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은 아빠였기에, 사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수정이와 엄마 둘 뿐이라 할 만했다. 그러니까, 그 방들은 다 수정이 꺼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는 공부방, 여기는 옷방, 여기는 책방, 여기는 이벤트방, 여기는... 방마다 재밌는 것들을 가득 채워 놓고, 좀 지루해질 때마다 방을 바꿔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정이는 정말, 신이 났었다.

 

집을 팔겠다고 나선 것은 엄마였다. 아빠가 술에 잔뜩 취해 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들이 한 달 째 거듭되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엄마는 오랜만에 우리 세 식구가 같이 앉은 자리에서 아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정이는 불안했다. 엄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며, 바깥 일은 내가 한다니까! 하고 소리를 지를까봐 무서웠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빠는 엄마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콩나물국 한 숟갈을 조용히 떠 마셨다. 그리고 탁, 숟가락을 놓더니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무셨다. 아빠, 우리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 피면 안된다고... 수정이가 말을 마저 하려 했으나, 엄마가 수연이의 어깨를 잡았다. 돌아본 엄마의 얼굴은 아빠의 뒷모습을 붙잡고 있었는데, 단단했으나, 무언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게 울음을 참을 때 엄마의 표정이란 걸 수정이는 알고 있었다. 어딘가, 우리 집이 어딘가로, 떨어지고 있었다.

 

 

3. 머리부터 발끝까지 맥도날드화

 

소설 속에서 여주는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맥도날드 매장의 메인을 지원한다. 해야할 일들이 훨씬 많았고 일은 더 고됐지만 여주가 성실히 일을 해 나가며 한 달을 보낸 어느 날, 맥도날드 매장 앞에서 전단지가 발견된다. 3세계 해방전선이라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지만 무언가 위압감이 느껴지는 이름으로 그 전단은 맥도날드를 비난하고 응분의 댓가를 운운하고 있었다. 단지 전단지 한 장일 뿐 무엇 하나 확정된 것이 없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은 더 위협적이었고, 매니저가 위험수당을 약속하자 실체가 없던 위험은 구체적인 실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전단지가 발견된 이후 맥도날드 매장의 모든 사람들이 더 강력하게 맥도날드화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예측가능하고 계산가능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행동은 기계처럼 자동화 되었다. 패티를 정확하게 굽고, 양상추를 정확하게 썰면서 그들은 더욱 표준화 되었고, 오직 맥도날드 시스템의 효율과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들의 차이는 제거되었다.

 

수정이는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무언가가 자신을 서서히 구석으로 몰아 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측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도록 무언가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기계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를 정확하게 정리해 두는 것은 수정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그건 수정이 너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렇지. 뭐든 딱 떨어지게 정리하는 거, 나는 잘 하지도 못하지만, 잘 하고 싶지도 않아. 그건 왠지 나랑 안맞아. 내 방이 엉망이라고, 여자애가 무슨 방정리를 그렇게 안하냐고 엄마는 나한테 맨날 뭐라고 하지만, 사실 그 안에도 나는 나한테 맞게 정리를 나름 한 거거든? 내가 침대에 딱 누우면, 한 두 바퀴 정도 몸을 굴려서 닿는 거리에 내가 필요한 것들이 다 있지. 나름 인체공학적인 정리랄까?”

 

모둠토론 시간에 수정이의 불만을 듣고 미지가 말했다. 물론 미지는, 수정이가 모둠토론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수다로 마구 늘어놓은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 것이 정말 고맙고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미지의 말에 수정이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나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그게 필요해서 하는 거야. 나도 정리를 꼼꼼하게 하는 거, 사실 피곤해. 하지만 무언가 일을 하려면 정리를 잘 하는 게 꼭 필요해. 공부도 그래. 학교에서 배우는 거 정리를 잘 해 놓지 않으면 시험을 잘 볼 수가 없어. 그건 정말 너무 당연한 거야.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의 문제라구.”

 

아니, 이건 취향의 문제야. 취향이 없다는 게 아냐. 취향이 다 똑같아 진다는 거지. 그게 문제라구.”

 

차가운 표정으로 지원이가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요즘 들어 지원이는 뭔가 좀 분위기가 바뀌어서 예전보다는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가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면 역시 얼음공주답게, 되게 차갑게 말을 던지곤 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곧잘 같이 다니기도 했기에 지원이가 어떤 애인지 수정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더 수정이는 지원이의 차가운 대답이 좀 더 서운하고, 좀 재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지원이도 공부를 잘 하긴 했지만, 어쨌든 수정이보다는 못했다. 수정이보다 공부를 못하는 지원이가, 같은 소설을 읽고도 무언가 더 많이 알고 있는 듯한 것 자체가 수정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들어야 했다. 자기보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잘 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하나하나 따라하며 여기까지 온 수정이였다. 지원이의 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원이의 설명이 더 필요했다. 수정이는 상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취향이 문제라니, 그게 다 똑같아 진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효율이 필요한 건 맞아. 누구든 비효율적인 일을, 정말이지 왜 이렇게만 해야 하냐고 생각되는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 진짜 죽고 싶을 거야. 작년에, 그 무지막지한 곰탱이 물리샘이 시켰던 깜지 기억나? 너나 지원이는 공부를 잘 하니까 안했지만, 물리시험 80점 밑에 맞은 애들은 3점 당 깜지 한 장씩이라고 해서, 진짜 그 때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아 놔... 지금 생각해도 빡칠라고 그러네.”

 

그래, 나도 혜민이 말에 동감이야. 효율이 나쁜 건 아니지. 문제는 취향이야. 선택이라구. 내가 선택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은 걸 무조건 하라고 하고, 효율적으로 하라고 하면, 그게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볼펜 세 개를 잡고 써서 남들보다 세 배는 빠르게 깜지를 만들어도,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 수정이 너한테 효율적으로 교과서를 다 찢어 버리고, 효율적으로 모의고사 점수 낮게 받도록 하고, 그동안 노트 필기한 거 효율적으로 다 없엘 방법을 찾아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 즐거울 수 있어?”

 

뭐라구? 아니, 그게... 그건 좀 아니지. 이게 무슨 소리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학생이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공부를 효율적으로 다 망치고 그만두라니. 그건 말이 안된다구. 정말 말이 안돼.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미지의 말에 대꾸하는 수정이의 목소리가 컸다.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컸다. 수정이도 말을 뱉고 나서 잠깐, 이렇게 흥분하는 자신이 낯설어 보일 만큼 컸다. 수정이는 이미 토론이나 발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떤 토론 시간에도, 어떤 적정한 수준의 감정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지면, 누구든 결국 흐트러졌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 사람을 되게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했다. 수정이는 프로가 되고 싶었다. 그 동안 잘 해 왔다고 자부하는 수정이었다. 그랬던 수정이가 오늘, 이렇게 흥분해 버린 것이다.

 

수정이가 이렇게나 흥분한 것은, 사실 지원이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 즐거울 수 있어? 즐겁냐고? 세상에 공부가 재밌어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원래 공부는 재미가 없는 거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하는 게 대단한 거다.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열심히 하면서도 효율적으로 하는 건, 정말 어려운 거니까. 그 어려운 걸 잘 해내는 사람이니까 그 인내력과 성실함과 우수함을 인정받는 거 아닌가?

미지 말이 맞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그렇게 살면, 다 똑같아 져. 차이가 없어진다구. 여주의 가족들을 봐. 여주의 남친을 보라구.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다 똑같아 진다구? 사랑이 아니라구? 지원이이 말을 다 듣고도 수정이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지원이가 말한 여주의 가족과 남자친구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소설 속에서 맥도날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수정이가 알바를 하게 될 지도 모를 그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이라는 게 놀라서 따로 메모를 해 둔 부분이었다.

 

맥도날드는 세계 120여 개 국가에 무려 3만여 개의 매장이 있었다. 맥도날드의 영업준비는 세계 모든 매장에서 똑같다.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하루에만 43백만 명이 넘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맛의 햄버거를 똑같은 방식으로 소비한다. 거기에는 인종과 언어와 종교와 이데올로기도, 성별과 나이와 신분과 계급도 없었다. 모두가 똑같았다.

 

그런데, 그래서, ? 똑같아 지는 게 뭐가 나쁜 거지? 이게 세계화 아닌가? 세계적으로 다 통할 수 있는 걸 배울려고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거 아닌가? 글로벌 인재라는 게 그런 거잖아. 맥도날드 안에서는 차이가 없어졌다잖아. 차이가 없으면 싸울 일도 없는 거잖아. 그건 좋은 거 아닌가? 그게 좋은 게 아니라고 쳐도, 그럼 그 좋지도 않은 걸 사람들은 왜 똑같이 하는 거지? 대체 사람들이 똑같아 지는 이유가 뭐냐구?

 

여전히, 수정이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원이가 말한 여주의 남친과 가족이야기는 분명히 읽은 것 같긴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 논리가 아니다. 주장의 근거를 대는 것이 논리다. 무엇을 주장하든 소설 안에서 근거를 찾아라. 리쌍샘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였다. 내가 너무 건성으로 읽었나? 그래, 다시 읽어 보자. 수정이는 소설을 다시, 이번에는 정말 교과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늘 하던 것처럼 검은 색과 파란 색과 빨간 색의 볼펜으로 메모를 해 가며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다 수정이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분명히 그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에 갑갑해 졌다. 무언가 확정되지 않은, 그래서 더 갑갑한 불안함이 수정이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엄마 때문이었다. 아빠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정이 자신 때문이었다.

 

 

4. 똑같은 얼굴

 

그 무렵 맥도날드화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의 의사소통은 단 몇 마디 말로도 가능해졌다. 각자의 어깨에 얹힌 제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밥은?” “됐다.” 이런 식이었다. 맥도날드의 고객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나도 끼니는 스스로 장만해 먹고 알아서 치워야 했다. 모든 가사노동은 특정한 개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각자의 필요와 능력에 맞게 분산되어 효율적으로 수행되었다.

 

그야말로 이건,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원래부터도 우리집은 그렇게 대화가 많은 집은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로 우리 집은 더 조용해졌다. 아주 간단하고 짧은 말들만이 오갔다. 아빠야 원래 말 없기로 유명한 경상도 출신의 남자라 그렇다 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많이 웃고 했던 엄마까지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수정이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아마도 집이 팔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엄마는 우리 아파트를 여기저기 부동산에 내 놓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누가 전화를 하거나 집을 보러 오는 일은 없었다. 그날 아침 엄마가 우리집을 팔겠다고 했을 때, 수정이는 아니 이 좋은 집을 대체 왜? 하며 놀랐지만 나중에는, 이 좋은 집을 사겠다고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게 벌써 1년 전이었다. 이제는 수정이도 좀 조바심이 나서, 예전에는 있는 지도 몰랐던 부동산 사무실들을 눈 여겨 보며 A4 용지로 붙어있는 알림판들을 살폈다. 들여다봐도 그게 무슨 소린지 명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1년 여 동안 지켜보자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집값이,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우리가 이 집을 산 가격보다도 더 떨어져 있었다. 정리하자면, 손해였다. 그것도 아주 큰 손해. 이건 정말, 위험했다.

 

이 집을 살 때 은행에 빌렸던 돈도 다 갚지 못한 상태였다. 언젠가 엄마를 따라 은행에 갔다가 엄마가 상담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수정이에게 통장정리를 시켰었다. 띠디딕, 띠디딕, 띠디딕 하는 소리가 한참 나고 다시 나온 통장을 무심결에 펴 봤다가 수정이는 백 팔십 구만 사천 이백 오십 삼원이 매달, 은행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큰 돈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큰 돈이었다. 그 큰 돈을 은행에 내고도 어떻게 별 일 없이 살림을 해 오실까, 문득 엄마가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찾은 엄마는 이미 은행원과 상담중이었다. 엄마의 머리 위로 <담보대출>이라는 팻말이 크게 걸려 있었다.

 

막연했던 수정이의 두려움이 구체적인 현실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은행을 다녀와서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엄마는 얼마 후에 보험설계사를 한다며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수정이도 이제 다 컸으니, 미안하지만 밥은 네가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엄마는 말했다. 밥을 차려 먹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엄마였다.

 

18살에 아빠를 만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빠랑 결혼한 엄마였다. 과외선생님으로 아빠를 만난 엄마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신 할아버지의 31녀 중 막내였다. 귀하고 예쁜 딸을 할아버지는 끔찍이 아꼈고, 그래서 아빠하고의 결혼도 꽤나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젊었고, 능력이 있었고, 패기도 있었다. 아빠는 정말 약속한 대로, 엄마의 손에 물 한 방을 묻히지 않게 해 준 건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한 이후로 엄마에게 돈걱정을 하게 한 일은 없었다. 결혼할 때부터 집과 차를 마련한 아빠였다. 그렇게 넉넉한 살림에만 살던 엄마가, 직접 돈을 벌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어쨌든, 이런저런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비위도 맞춰야 할 보험외판원을 과연 엄마가 해 낼 수 있을까?

 

그런 걱정 역시 얼마 안가서 현실이 되었다. 늦게 집에 들어온 엄마는 가끔, 술도 마시고 들어왔는데, 문제는 엄마의 표정이었다. 점점 피곤에 찌든 듯한 표정, 무언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애써 태연히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디서 이미 본 듯한 그 표정. 그래, 그랬다. 그건 아빠의 표정이었다. 엄마는 점점, 아빠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표정을 떠올리다가 수정이는 마음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 그 표정을 수정이는 아빠 말고도, 엄마 말고도 다른 곳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보는 표정이었다. 책상 위에서, 화장실에서, 독서실에서, 1등급을 기대했던 영어가 3등급이 나왔을 때, 몇 개나 겹쳐 든 쟁반을 겨우 들었다고 느끼는 순간 맨 위에 있던 컵이 떨어져 와장창 깨져 버렸을 때, 모자란 공부를 마저 하다 코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에 서둘러 막았으나, 이미 그 빨간 것이 하얀 남방의 가슴팍에 후두둑 떨어졌을 때 거울에 비춰지던 그 얼굴. 그 얼굴 말이다.

 

 

5. 그 많은 자유는 다 어디로 갔을까?

 

아니다. 너무 감정적이다. 수정이는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정리를 해 볼 필요가 있어, 그래, 우리 가족이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맥도날드에서 일하고 맥도날드를 이용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아 진다는 것도 알겠다. 그래, 그런게 세계화지. 우리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싱가폴에서, 대만에서, 필리핀에서, 베트남에서, 심지어는 브라질과 프랑스와 핀란드에서 똑같이 좋아하는 거, 한류도 세계화 아닌가. 하지만 우리집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집이 빌린 돈에다가 떨어진 집값만 합쳐도 4억이다. 4억이면 400만원을 1년에 10개월씩 모아도 10년이 꼬박 걸리는 돈이다. 현재 우리집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게...

 

“...정아, 수정아!!”

미지가 수정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때에야 미지가 자기를 부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수정이는 민망해 하면서도, 애써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 그래. 미지야, ?”

 

수정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정리의 여왕이 정리도 안하고 우리 한참 이야기 하는 데 듣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도 없고. 너 무슨 일 있지? ?”

 

“...으응? ...아냐, 일은 무슨 일. 요새 좀 피곤한가봐.”

 

얼른 가자. 오늘 일찍 끝났으니까 시간 좀 비지? 우리 떡볶이 한 접시 땡기자, 언니가 쏠게.”

 

? 무슨 소리야? 아직 수업 끝날 시간 아니잖아?”

 

수정이, 얘 진짜 오늘 이상한 거 맞네. 리쌍샘 아까 나갔잖아, 전화 받고. 참 나, 아니 리쌍샘은, 방과후수업을 이렇게 맘대로 넣다 뺐다 해도 되는 거야?”

 

? 무슨 일인데? 리쌍샘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 리쌍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저기 리쌍샘네 반에 정인이라고 알지? 수정이 너 사는 단지에 살잖아. 걔가 어제 가출했거든. 전화하는 거 들어 보니까 걔 엄마가 온 거 같던데. 걔네 엄마도 보험일 하거든. 우리 엄마랑 친해. , 얼마 전에 걔네 아빠가 정리해고를 당했대나? 암튼 오늘 못한 거 다음 시간에 보강하자고, 하는 말도 다 안하고 도망갔어. 으이그, 하여간. 뭘 해도 이렇게 확실한 게 없어.”

 

, 그래도 사람은 좋잖아. 썰렁하기는 해도. 암튼 이 언니가 떡볶이 쏘실 테니까, 혜민이 너도 뭐라고 그만 하고 같이 가자. 저기 지원이는?”

 

, 걔는 벌써 갔다. 하여간 기집애가 정이 없어, 정이. 근데 뭐해, 수정아? 가자.”

 

, 미안... ... 오늘 그거 시작하는 날이라... 좀 몸이 안좋네. 미안..”

 

거짓말이었다. 조금 쉬었다가, 가방 챙겨서 나갈테니 먼저들 가라고 수정이는 말했다. 미지와 혜민이가, 어쩐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잠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멈칫하는 사이에 수정이가 아픈 듯 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괜찮아. 잠깐 혼자 있으면 괜찮아 질 거야, 좀 쉬었다가 집에 갈게. 먼저 가. 그렇게 미지와 혜민이를 보내고, 수정이는 텅 빈 교실의 벽을 등지고 앉아 멍하니 반대편 창문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다. 어둑해진 하늘에 양떼 구름이 얼룩덜룩 어둠에 묻히고, 그 한편에 아파트 단지들이 보였다. 아파트...

 

수정이는 정인이를 알고 있었다. 친한 건 아니지만 같은 단지에 사는 엄마들의 그 입소문 때문에 몇 반에 어떤 애인지는 알고 있었다. 수정이가 알기로, 순하고 조용한 애였다. 가출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정이가 정말 놀란 것은, 어쩐지 수정이네 집과 상황이 비슷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정인이라는 애는 가출을 결심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엄마는 보험을 한다고 했지. 아빠가 정리해고를 당했다고? 정리해고라니...

 

수정이는 알고 있었다. 정리란 사실, 버리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그것을 가려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것, 그게 정리였다. 그러니까 정인이네 아빠는 그 회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려진 것이었다.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아주 싼 가격에 갖은 종류의 가구가 들어오면서 아빠 회사의 거래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 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대형 가구 회사에서 거래를 끊은 것이 가장 타격이 컸다. 구조조정이라고 했다. 그것도 정리의 다른 말이겠지. 아빠도 곧 정리를 당하는 게 아닐까? 혹시 걔네도 집을 내 놓지 않았을까? 급매라고 붙여진 그 많은 에이포 종이판 중에, 우리집이 포함된 정말 많은 동과 호수의 종이판 사이에, 걔네 집도 붙어 있었을까? 그런데, 가만...

 

수정이는 잠깐 셈을 해보다가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파트 시세를 검색했다. 수정이네 집의 떨어진 가격만 2억이다. 그럼 수정이네 아파트 단지의 모든 아파트가 그 정도는 떨어졌다는 애기다. 그 단지에 아파트가 대략 1500개 있으니까, 그러면 3000억이 떨어진 거다. 3000!! 3000억이면, 1년에 3억씩 벌어도 1000년을 벌어야 하는 돈이다. 연봉 3억이면 어디가서 진짜 대단한 사람인 거다. 그런 사람도 1000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다. 이건 진짜 엄청나게 큰 돈이다. 그 큰 돈이 사라진 것이다. 돈이 사라지다니,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불안과 두려움이 집요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내내 아파트 시세만 검색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부동산 폭락을 검색했다.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정리하자면, 수정이네 집의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미국은 이미 부동산이 폭락해서 국가가 무너질 위기에까지 몰렸는데, 당시 손해가 최소한 1000억 달러란다. 1000억 달러면 지금 환율로 1200조다. 이건 대체 어떻게 정리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돈이냐? 그러니까, 1년에 3억씩 번 사람이 1000년을 모아 3000억을 만드는 일을 4000번 반복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다는 건지 수정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제는 산업자본과 유통자본이 중요한 두 축이라고 했다. 상품을 만들고 파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경제활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건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상품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는 금융자본의 시대란다. 산업자본과 유통자본이 경제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돈의 흐름을 조정하며 도와주는 역할을 하던 금융자본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금융자본이 판매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이만큼을 투자하면 이만큼을 더 벌 수 있다는 믿음. 주식이 대표적이었다. 그 믿음이 강력한 만큼, 그 이윤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 투자라는 것이 투기로 바뀌면서, 부동산 폭락과 함께 그 믿음에 가격을 매겨 파는 금융상품의 가치가 순간에 무너지면서 미국의 경제가 무너진 것이다. 정리하자면,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돈에 대한 믿음. 그것이 무너지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이, 사라져 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정리를 해도,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말들보다 수정이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미국에서 부동산이 폭락하자 한국에서도 부동산이 폭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세계화였다. 아이돌 스타들의 뮤비를 보는 즐거움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지는 것처럼, 한 나라의 경제가 무너지면서 겪게 되는 사람들의 고통도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는 거였다.

 

신자유주의라고 했다. 찾아본 인터넷의 글들에서는 이런 현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새로운 자유주의. 그럼 누군가 자유로워졌다는 것인데, 대체 누가 자유로워진 것일까? 그 많은 돈들이 정말 그냥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인가? 그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통을 당했다는 것인가? 아니, 아니다. 정리해고를 해도, 구조조정을 해도, 버려지는 사람이 있으면 남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버릴 사람과 남을 사람을 정할 것이다. 그들은 또 누가 정리할까? 그렇게 정리하고 정리하면, 그 끝에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대체 자유를 얻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수정이는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정리를 할 수도 없었다. 또박또박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무언가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북받치고 있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버려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가 수정이를, 엄마를, 아빠를, 정리하려고 하는 듯했다. 어두워가는 교실 안에서 수정이는 무서운 줄도 몰랐다. 세상이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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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수정판

알바는 내 알 바가 아니라고?

김경욱, <맥도날드 사수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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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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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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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색을 안하려고 했지만, 어제밤 내내 엄마는 자꾸만 우두커니 서서, 멍해져 있었다. 밥을 먹다가, 빨래를 개다가, 어제 먹던 깻잎통이 어디 있는지, 아빠 작업복은 어디에 두는지, 수정이가 엄마에게 물을 때마다 엄마는 답이 없었다. 몇 번이나 다시 불러야 엄마는 화들짝 깨며 수정이를 보았다. , 그래, 수정아, 뭐라고 그랬지? 하며 엄마는 물었지만, 그 물음 뒤에 서려 있는 아득한 표정을 엄마는 수정이에게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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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방과후수업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 아침 조례가 끝나고 담임샘이 수정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지난 3월부터 방과후수업비가 밀려 있으니 이번 주 안으로 꼭 내 주시라고 부모님께 알려드리라고 하셨다. 가끔 부모님이 실수로 착각하실 때가 있다며, 담임샘은 별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수정이도, 별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교무실을 나왔지만, 사실 수정이에게 이 일은 여전히 별 일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자주 반복되는 이런 상황에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 보지 못했던 수정이었기에, 아니,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정이었기에 더욱, 이런 일은 수정이에게 여전히 '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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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잔뜩 불편해져서, 수정이는 오늘만큼은 리쌍샘의 방과후수업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입사 대비로 논술면접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신청한 수업이었다. 뭔가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아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지만, 그 동안의 수업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아서 나름, 재미를 느끼고 있던 수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래, 역시, 이 수업은 듣는 게 아니었어. 아마 종례가 끝나고, 미지가 수정이에게 팔짱을 끼며 늦었다고 우당탕탕 끌고 오지 않았다면, 수정이는 오늘 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미지의 호들갑 때문에 엉겁결에 자리에 앉긴 했지만, 수정이는 여전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오늘도 여지없이 '안녕하세용~' 하는, 되도 않는 개인기로 인사를 시작하는 리쌍샘을 보고도 평소처럼 웃음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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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바를 해야 할까. 수정이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홀써빙은 시급은 쎘지만 일이 고되고, 괜한 오해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술 취한 남자들이 불쾌한 짓들을 하는 때도 많다고 했다. 전단지 알바는 수정이도 해 본 적이 있었다. 일이 간단하긴 했지만 시급이 짰고, 일도 자주 없었는데, 무엇보다 수정이가 꺼림직 했던 건, 뭔가 일이 볼품이 없었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괜히 뒷골이 땡기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실제로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동네 할머니에게 한 바가지 욕을 들어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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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가 보기에 꽤 그럴 듯한 알바는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깔끔한 제복에 하는 일도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만 일하는 게 그냥 보기 좋았다. 시급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요일도 선택할 수 있고, 시간대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야자는 뺄 수 있었다. 수정이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0등에서 오르내리는 정도는 됐다. 정리의 힘이었다. 학원이나 과외를 받지 않고도 이 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담임샘은 무척 대견해 하셔서,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수정이가 야자를 빼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허락해 주셨다. 물론 엄마도, 전적으로 수정이를 믿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뭘 해도 늘 깔끔하게 마무리를 잘 해 놓는 수정이여서, 요즘은 오히려 엄마가 마음으로는 수정이에게 기대는 때가 많았다. 중학교 때, 3년 내내 여름방학마다 이어졌던 20일의 해외 어학 캠프도 혼자 다녀온 수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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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맥도날드. 거기를 알아봐야겠어. 수정이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리쌍샘이 소설을 건네 주었다. 무심결에 소설을 받았다가 수정이는 깜짝 놀라서 눈이 번쩍 뜨였다. / / / . 소설에 그 네 글자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다, / / / / , 이라니. 뭘까, 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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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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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해 봄 내가 새끼 밴 고양이처럼 독기를 품은 채 지켜내려 했던 것은 거추장스럽기도 했던 순결과 있으면 성가시고 없으면 아쉬운 가정과 하나쯤 사라진다 해도 표도 나지 않을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이 아니라 안락한 미래와 교환될 수 있는 나의 '가치'였다. 누군가는 그것을 '몸값'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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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수정이는 이 문장 앞에 주저 앉아 넘어가지 못했다. 새끼 밴 고양이까지는 아니어도, 수정이는 요즘 자기가 정말 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기 때문이다. 수정이는 이미 주말에 예식장 부페 알바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루 9시간이 넘도록 종일 서서 그 무거운 접시들이며 유리잔이며 음식들을 나르는 게 정말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은 뭐 그리 음식들을 빨리도 먹고 많이도 버리는지 음식을 셋팅하고 테이블 사이로 그릇을 거두고 나면, 어느 새 음식이 텅 비어 있었다. 멀리 카운터에서 말쑥한 정장을 빼 입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점장은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낌새가 보이는 것 자체부터 싫어해서, 바로 밑의 매니저들을 자꾸만 불러 채근했고, 덕분에 알바생들은 더 빡빡하게 홀을 뛰어 다녀야 했다. 독서실에서 하루 밤새면서 공부하고 오겠다고, 그렇게 토요일 새벽에 나와서 이틀을 꼬박 알바를 하고 나면, 나름 여고생 치고는 체력이 좋다고 자부했던 수정이도 너무 피곤하고 팔다리가 쑤셔서 돌아온 독서실에서 다시 책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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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이는 없는 힘을 짜 내어 책상 앞에 앉아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모자란 공부를 마저 했다. 절박했다. 완전히 공부에만 몰입할 수 있는 여건에서 완전히 공부에 몰입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완전히 대단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수정이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수정이가 그렇게 살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사실 그 절박함은 불안함이었고, 근본적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