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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아침밥을 먹을 "권리" 1차본. 꾸역꾸역 A4 9매

아침밥을 먹을 "권리"

 

10월 단편소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모든걸 걸고 널 들이킨 나 이젠 돌이킬 수도 없다"

  짧은 간주 뒤에, 제일 좋아하는 오빠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미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왜냐고? 아침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내 귀를 즐겁게 해줄 순수한 목적으로 울려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내 몸을 일으키게 해줄 다른 목적을 지닌 소리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좋은 노래라고 해도 핸드폰 알람으로 맞추어놓으면 도무지 오래 들을 수가 없다. 멍하니 TV채널을 돌리던 중에 그 노래가 나오면 아주 잠깐이지만 인상을 찌뿌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왜 그럴까? 나는 이 노래가 좋은데, 나는 그저 오빠들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침. 이 놈이 문제다. 특히나 월요일의 아침. 얘는 정말 노답이다. 얘가 얼마나 답이 없냐하면 마땅히 즐거워야할 일요일 오후까지를 망가트린다.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의 느낌이 그랬을까. 학교도 학원도 안가는 일요일 아침이야말로 나에게는 조국광복 같다. 이불 깔린 침대와 냉장고 앞을 전전하다 보면 어느새 오후는 해방 후 좌우대립처럼 스산하다. 이제는 별 재미도 없지만 정해진 수순처럼 보게 되는 저녁 프로그램들을 지나다보면 어느새 오빠들의 목소리가 전쟁을 알리는 포성처럼 월요일 아침을 꽉 채우는 것이다. 내가 너무 문과티를 냈나? 흐흐

 

  막상 학교에 가면 애들이랑 수다도 떨고, 매점에도 가고 즐거운 일들이 많은데 월요일의 아침은 정말 전쟁처럼 끔찍하다. 막연한 공포감. 전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분명 군인들의 공포심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공포심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지만 눈 앞에 공포보다 더 큰 공포는 늘 있기 마련이다. 정신을 차리면 미지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다.

 

  "경기도는 9시까지 등교한다던데 니네는 별 얘기 없다니?"

  "그러니까요. 학교에서도 애들은 다 아홉시 아홉시 하는데 뭐 별다른 소식은 없어요, 아직."  

  "뭐 하나 바꾸는 게 쉽진 않지.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또 모르지?"

  "에이, 내년엔 저 고3이에요."

  "고3은 사람 아니냐? 내년에라도 되면 좋지, 뭘."

  "앗! 늦겠다. 엄마 저 가요."

  "밥은 마저 먹고 가야지!"

  "갔다 와서 먹을게요!"

  엄마는 늘 자기 편이라는 생각에 오늘 미지는 기분이 썩 좋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무기력과 막연한 두려움은 다 사라졌다. 길을 나서면 아침 공기는 꽤나 상쾌하다.

 

  "이번에 배울 소설은 외국작품이에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여태 읽었던 소설들보다는 다소 분량이 있지만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을 거에요. 특히나 이 소설의 마지막은 여지껏 제가 읽었던 소설들 중 가장 서늘한 결말을 자랑합니다. 기대가 되시죠들?"

  아, 리상쌤. 월요일이 그리 나쁘지 않은 이유다. 문학보충이 있다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무기력과 두려움, 그 사이에 작은 버팀목 하나 놓는 거. 버팀목이 많을 수록 행복한 사람이 되고.

 

  여기 아침이 두려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카프카의 <변신>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이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그는 언제 벌레가 되었나

 

  그레고르 잠자. 그는 언제 벌레가 되었을까. 이것이 리상쌤이 처음 던져놓은 질문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소설의 시작과 함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벌레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리상쌤은 그런 뻔한 질문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그는 몸이 흉측한 벌레로 변했음에도 자신이 벌레가 된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내 일상적인 걱정들을 한다. 여동생은 학교에 갔을지, 어머니가 걱정하시지는 않을지, 회사의 매니저가 찾아오지는 않을지 등등. 몸은 벌레로 변했지만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다. 소설에서처럼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설마, '코앞이 수능인데...' 이러고 있지는 않겠지?

  침대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레고르는 몸은 벌레지만 정신은 사람이다. 데카르트가 그랬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하지만 침대 위에 누워있던 생각하는 벌레는 어느 순간 정말 벌레가 된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시점이다. 여동생, 부모님, 그리고 지배인까지. 소설에 후반에는 하숙생들이 그레고르를 발견하는데 이때는 이미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을 때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전에는 벌레가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레고르를 보는 순간, 그가 벌레가 된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생각한 거긴 하지만 참 잘했다. 후후.

  "그럴 수 있죠. 좋은 대답이에요. 미지 말대로 우리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예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시선에서 자유로운 현대인은 별로 없죠. 저를 포함해서, 아마 여기 앉아 계신 분들도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음... 다른 의견은 없나요?"

 

  10반 1등 윤정이가 살포시 손을 들었다. 호기심도 많고 이과생답게 논리적이지만 다소 수줍음이 있는 친구다.

  "어... 가족들한테 벌레취급을 받게 된 순간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이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아니, 처음에는요. 벌레가 됐는데도 여동생이 되게 잘해주거든요. 음식도 여러가지로 넣어주고 주기적으로 들어와서 환기도 시키고 청소도 하고요. 근데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여동생이 그레고르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게 어느 시점이었죠?"

  "어... 그게 여동생이 알바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었나요?"

  "오! 좋아요. 근데, 알바가 왜요?"

  "알바를 한다는 건, 직접 돈을 번다는 거잖아요. 그 전에는 그냥 학교만 다니는 학생이었을 텐데, 그러니까 경제적 능력도 없고, 근데 돈을 직접 벌기 시작하니까 오빠는 지금 돈을 벌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거잖아요. 당연히 싫을 것 같은데."

     

  가족들에게 짐이 된 순간. 실제로 여동생 그레테는 오빠가 벌레가 됐음에도 그를 극진히 대한다. 그랬던 그레테가 변하는 순간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부분은 여동생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경제적인 권한을 갖게 된 순간 경제적 능력이 없는 오빠는 가족의 등불이 아닌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씁쓸하다.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벌레라는 말인가? 나는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러면 나는 벌레인가?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생들은 죄다 경제적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 겉으로는 우리나라의 미래네 희망이네 하면서 속으로는 얘는 공부를 얼마나 잘하나 하고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 미지도 한 두번 느껴본 것은 아니지만 언제 맞닥들여도 적응되지 않는, 적응하고 싶지 않은 눈빛들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경제적 능력을 수월하게 가질 수 있는 가능성? 그래서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들을 우대하는 건가?

 

  성적이라는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줄을 세우고, 앞줄에 서는 아이들에게는 형광등이 매달린 개인 공부공간을 준다. 미지도 이 안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참 쾌적하다. 행정실에서 통제하는 에어컨 외에도 우리가 끄고 켤 수 있는, 공기청정 기능까지 포함된 에어컨이 따로 있다. 교실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크기로 자못 튼튼하게 생겨먹은 철제 사물함이 있다. 크기가 작긴 하지만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을 넣어놓기에는 그만인 냉장고도 한 대 있고, 시원한 물과 뜨거운 물이 늘 나오는 정수기도 하나 놓여 있다. 여지껏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크고 작은 혜택들이 모두 하나의 고리로 꿰뚫어졌다. 담임선생님 이외에도 정기적으로 하게 되는 학년부장님과의 상담, 방학 시즌이면 봉사활동이며 체험학습이며 이것저것 학생부를 채울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들. 그 모든 혜택은 면학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내신 이외에도 모의고사 성적까지 따로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잘하니까 학교가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나도 언제든지 그곳에서 밀려날 수 있다. 햇볕이 짱짱한 여름날 체육시간이 끝나고 난 뒤 시원한 정수기 물 한 모금이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를 수 있다. 갑자기 미지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옳은가. 내가 지끔까지 별 생각없이 누려온 특혜아닌 특혜들은 모두 나의 '성적'에 기인한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어하는 걸까?

  <면학실 이용자 외에는 출입을 금함>이라는 빨간 글씨의 안내문이 몹시도 가증스러웠다.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

 

  "네. 어마어마한 발견입니다! 그레고르가 혼자서 가정을 책임질 때에는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죠. 아버지는 여러 개의 신문을 펼쳐놓고 두 시간씩 세 시간씩 아침을 드시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지내셨고,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하녀를 고용하여 집안일을 맡기셨어요. 여동생은 교육비가 많이 드는 음악학교에 진학하고 싶어했죠. 그런데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니까 아버지는 은행의 경비로 출근을 하고 하녀는 그만두었으며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삯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아르바이트를 나갑니다. 사실은 그 동안의 모든 가정의 평화가 그레고르 한 사람의 엄청난 희생으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여기서 다시 질문.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하기 전에, 어떻게 살았나요?"

 

  벌레가 되기 전에 그레고르의 삶이라, 사실 정상적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가족들에 대한 의무 때문에 심하게 강박적이었다고나 할까. 매일같이 일생각만 했고 저녁에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 용돈은 거의 받지 않았고 불규칙하고 급하게 이루어지는 식사, 그 사이에서 겉돌기만 하는 인간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다. 일벌레. 또 이런 말도 있지. 공부벌레. 이 즐거운 세상에서 즐거운 것들을 즐기는 당연한 행동을 죄악시하며 이렇게 성실하게만 살다보면 언젠간 행복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만 가진 채 꾸준히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레고르는 일벌레였어요." 미지가 말했다.

  "일벌레라니요? 그러면 벌레가 벌레가 된 거니 변한 것은 없네요? 작품의 제목이 잘못되었군요. <변신>이 아니라 '일상' 뭐 이런 제목이었어야 했나? 하하하."

 

  아니다. 단순히 일벌레가 말똥벌레가 된 게 아니다. 벌레가 된 후에 그레고르는 뭔가 이상했다.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평화로웠다고 해야할까. 적어도 미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었다.

 

  "근데, 쌤. 하나 이상한 점이 있어요. 소설 초반에 보면 그레고르가 되게 불안해보이거든요. 저같으면 그래요. 어느날 내가 눈을 떴는데 내 하반신에 꼼지락거리는 수많은 다리가 생겼다고 하면 저는 그냥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고 싶을 거 같아요. 근데 그레고르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단 말이죠. 회사 걱정하고, 가족 걱정하고. 자기자신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걱정을 해요. 근데 정작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는 더 편안해 보였거든요?"

  "편안해 보였다고요? 어느 부분이죠?" 리상쌤은 턱을 앞으로 쭉 내밀며 눈빛을 반짝거렸다. 이런 빠른 독촉으로 볼 때 내가 뭔가 꼬투리를 잘 잡은 게 확실했다. 미지는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장면들이 있었잖아요. 천장에 매달려 있던 장면.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마치 그레고르의 아버지가 안락의자에 폭 파묻혀 있는 것이랑 비슷한 이미지였어요."

  "그러고 보니 식사를 하는 장면도 좀 독특했어요. 왜 신선한 우유랑 빵을 가져왔을 때요. 그것을 싫어했단 말이죠." 혜민이었다.

  "그게 왜요?"

  "어떤 음식을 싫어한다는 거는 반대로 다른 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썩은 치즈 같은, 상한 음식 말예요. 근데 벌레로 변하기 전에 그레고르를 상상해보면 과연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을까 싶어요. 매일매일 출장을 나가면서 식사를 건너뛰거나 아니면 허겁지겁 밥을 먹곤 했을 텐데 뭘 좋아하고 말고가 있었을까요? 근데 벌레가 되고 나서는 호불호가 정확해진 게 뭔가 독특했는데..." 딴지꾼 혜민이가 거들어주다니 미지는 좀 묘한 기분이었다.  

  "오, 언블리버블! 놀라워요. 여러분들은 다들 천재예요! 그런 생각을 하다니!!!."

 

  리상쌤의 오버를 뒤로 하고 미지는 또 생각에 잠겼다. 그레고르는 벌레다. 미끄러운 점액질에 수많은 다리, 딱딱한 등껍질까지 무엇하나 그를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할만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그는 겉모습이 벌레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며 그 생각들은 대부분 가정에 대한 걱정이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무한한 걱정, 그것은 인간의 모습인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집단을 보호하려는 일개미의 모습은 아닌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기준에 의해 판단되는 건가?

 

  "선생님. 인간이란 뭐죠? 인간은 왜 인간일까요?"

  "아니, 미지님은 왜 갑자기 이리도 진지해지신 겁니까? 누가 뭐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혼내줄게요!"

  "아니, 쌤. 장난치지 말구요. 저 진짜 궁금하단 말이에요."

  "네, 여기 주목해주세요. 다시 전 모둠에게 공통 질문 드리겠습니다. 인간이란 뭔가요? 인간은 왜 인간일까요? 벌레와 인간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서 약 5분 간 모둠토의 진행해보세요. 단 주장에 대한 모든 근거는 소설 안에서만 찾도록 합니다."

 

  "이야기를 해 보자. 일단은 겉모습을 이야기해야 할 거야.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겉모습. 눈코입 다 있고 두 발로 걸어다니고, 껍질이 아닌 피부를 갖는, 그런 외양 말이야." 정리왕 수정이의 말이었다.

  "이것도 겉모습에 속하는 지는 모르겠는데 목소리 같은 건 어때? 처음에는 그레고르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듯 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니까 다들 동물의 소리라고 피하려 하든데." 단비가 오랜만에 한 마디 거들었다.

  "그건 그냥 '언어'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지원이는 역시 지원이다.

  "그래. 외양에다가 언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겠지. 옷을 입는다든지, 도구를 사용한다든지. '도구적 인간' 뭐 이런 말도 있잖아." 수정이가 다시 한번 정리를 했다.

  "아까 말이 나왔던 것들은 어떨까? 썩은 치즈 같은 걸 좋아하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그게 편하다고 느끼는 거 말야. 그게 좋아서 그런 거잖아. 뭔가를 좋아하는 거. 이걸 뭐라고 해야되지?"

  "좋아하는 거? 기호? 취향?"

  "취향! 그 단어 좋다. 취향. 사람이라면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취향이 있어야 인간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생각해봐. 나는 쌍커풀 없는 남자가 좋단 말이야. 눈이 좀 작아서 평상시엔 남자다워 보이고 웃을 땐 귀여운 그런. 근데 지원이 너는 눈이 커다란 남자가 좋잖아. 이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란 말이지."

  "그래. 그게 내 취향이니까. 근데 그게 왜?"

  "왜, 그레고르가 음식을 먹을 때, 신선한건 싫고 썩은 게 좋다고 했었잖아."

  "그건 그레고르가 벌레가 됐으니까 그렇지. 바퀴벌레같이 더러운."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자구. 아까 혜민이가 말한 것처럼 사람일 때의 그레고르가 과연 무엇을 좋아했을까.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얼마나 즐길 수 있었을까. 벌레가 되서 천장에 매달리니 정말 편안했는데, 그렇게 편한 휴식을 인간일 때는 취한 적이 있냔 말이지."

  "그럼 너는 그레고르가 그 전부터 벌레같은 생활을 해왔다는 이야기인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 해야할 일만 하느라고?"

  "역시 수정여왕님이야. 바로 그거지.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기 전에 오히려 더 벌레같은 생활을 했고, 벌레가 되고 나서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게 된 거야. 벌레가 된 후에 오히려 더 인간다워졌다. 아, 소름끼친다. 정말!!!"

 

  누이동생은 이윽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의 자리에서 딸의 손놀림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연주 소리에 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고개를 거실 안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는 요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관심한 상태로 지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을 쏟았었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까지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남의 눈을 의식해야만 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가? 지금 그의 방안은 사방이 먼지투성이였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풀썩풀썩 먼지가 일었다. 그래서 그의 몸은 온통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실밥이며 머리칼, 음식 찌꺼기 같은 것들을 등과 옆구리에 잔뜩 붙인 채로 기어 다니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몇 차례씩 등을 아래로 하고 누워서 바닥의 양탄자에다 몸을 비벼 대던 일도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해진 이후 도무지 그럴 의욕마저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휴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거실로 기어 나오면서도 그레고르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취향.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또 다른 무언가는 싫어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그것을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 일이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라면. 이런 조건이라면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선 동아리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지만 수시원서 쓸 거리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고등학생은 없다. 덕분에 취미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파리가 날리고 학술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면접까지 볼 정도로 지원자가 넘친다지. 학기초에 적는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언제나 '독서'라는 두 글자를 써온 나는 책이 좋다. 책을 읽을 때에는 마음이 편안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있을 때도 많고 도서관에 가면 나는 책냄새도 좋다. 당연히 도서부에 가입했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책을 많이 나르고 있긴 하지만 책에 둘러싸여 한 때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2학년이 되면서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친했던 아이들이 속속 동아리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나현이는 영어회화 동아리로 갔고 유정이는 시사토론 동아리로 갔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민주도 결국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나서 동아리를 옮겼다.

  "나 경영학과에 갈 거야. 아빠가 그 쪽이 취업이 잘 된다고 그랬거든. 근데 우리 학교에는 3학년에도 경제과목이 없대. 동아리활동이라도 해놓아야 입사 쓸 수 있을 거 같애."  

  취미마저 입시에 빼앗기고 나면 도대체 내 안에는 뭐가 남을까.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대학에 입학하면, 행복할까?  

 

  "어떻게 결론들이 좀 나셨습니까?" 또 슬그머니 다가온 리상쌤이다.

  "저희는 취향이라고 생각했어요."

  "취향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할 수 있을 때 제일 사람다워요."

  "오호.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죠. 인간이란 취향 그 자체다. 견해가 일치하네요."

  "아, 선생님 또 멋있는 척!"

 

 

  "오늘은 특별히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까. 다음 이 시간까지 글을 한 편씩 써오시는 겁니다. 주제는 <나는 왜 벌레가 아닌가?>로 하겠습니다. 각 모둠에서 나온 인간의 조건에 맞추어 자신이 벌레인지 인간인지를 정한 뒤 나는 왜 벌레인지, 혹은 나는 왜 벌레가 아닌지에 대해서 써보는 겁니다.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거에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서늘한 결말

 

결말을 놓고

아이들끼리 이야기하다

가족이란 뭔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배려와 이해가 우선되는 것이 가족

 

 

한 벌레의 이야기

 

  금세 지겨워진 핸드폰 알람소리에 흐느적흐느적 이불을 밀쳐내고 일어난다. 적어도 남들에겐 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쳐야 하기에, 최소한의 깔끔함과 단정함을 위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다. 더러 머리를 감는 날도 있지만 아침에 머리를 감으면 채 말리지 못하고 학교에 가야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기에 어제 감은 머리를 고무줄 끈으로 질끈 동여맨다. 매일같이 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시는 어머니를 위해 안먹히는 밥을 입속으로 몇숟갈 집어넣는다. 어머니가 방심한 틈을 타 잽싸게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기습한 뒤 쏜살같이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학교로 가는 도중에 한가한 마을버스를 만나게 되면 운좋게 타고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만원인지라 멈출지 안멈출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다. 버스 기다릴 시간에 한 발짝이라도 더 뛰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헥헥 거리며 학교에 도착하여 교문이 닫히기 전 입성에 성공을 하면, 다행스럽게도 교실까지는 걸어도 된다. 이것도 우리반이 1층이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일 뿐이다. 앉아서 숨을 고르기도 잠시, 제일 긴장해야하는 조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듣기평가, 수학, 영어, 수학... 영어가 많은 건 그래, 국제화 시대이기도 하고 우리는 문과니까 그렇다고 쳐. 수학은 왜 매일매일 들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본수업 1시간에 보충 한시간. 하루에 꼬박 두 시간씩 저 난해한 기호와 수식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야한다니. 그렇게 나의 무력감을 확인하는 전투를 몇 차례 치르고 나면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종이 울린다. 점심시간. 그러면 우리는 뜬금없이 전투력 충만하여 2층을 향하여 뛰기 시작한다. 신은 공평하다. 교문 가까운 1층에 위치하여 너그러운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었던 우리반 교실은 2층 식당과는 반대편에 위치하여 각박한 점심시간을 선사한다. 4교시 선생님이 돌아서시는 움직임과 동시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뒷문으로 뛰어야 한다. 자고로 급식은 남들보다 일찍 먹는 게 남는 것이다라는 짝 단비의 지론에 따라 미지도 단비와 함께 로드무비를 찍는다. 탄력좋은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복도를 질주한다지만 지정학적 위치의 불리함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건 복도 옆까지 밀려나와있는 *긴 행렬이다. 인기많은 반찬이 나온 날은 더욱 줄이 길어서 5교시에 늦을 뻔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닭 튀김과 감자탕 국물을 연신 입에 쏟아붓고는 돌아나와 단비에게 한 마디 했다.

 

  "우리, 식사를 한 거니? 연료를 주입한 거니?"

 

  생각해보니 그랬다. 만약 외계인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의 식민지를 선정하기 위해 지구에 감시카메라를 달아놓았다면,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뭐라고 해석할까. 빨간 벽돌 건물에 천 명이 넘는 어린 일꾼들이 모여들어서는 오전 내내 꼬박 단순 작업에 몰두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연료를 공급받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단순 작업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다가 감독관들이 속속 작업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이어진다고. 문명화된 그들이 보기에 우리들의 하루를 놓고 '교육'이라 이름붙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겨운 고등학교 생활을 성실히 마치고 이름있는 대학에 가면 행복할까? 대학 이름에 걸맞는 회사에 들어가려면 나는 또 얼마나 지겨운 생활을 해야할까. 학점을 관리하고 토익을 공부하고 어학연수에 인턴십 프로그램에 그런 것들을 죄다 성실하게 수행해서 번듯하게 취직을 하면 행복할까? 행복이란 뭘까? 나는 언제 행복한가. 좋아하는 것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행복한 것 아닌가? 돈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행복한 건 아닐 거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고 싶다. 남을 의식해서, 미래를 생각해서, 이런저런 핑계 때문에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고 싶진 않다. 내 삶의 주인은 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나의 권리다. 어떤 어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1년만 참으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다들 그렇게 살아? 그러면 왜 다들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왜 자신의 생활을 바꿔보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마음은 잔뜩 졸인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대체 나는 뭘 쫓고 있는 걸까?

 

 

  나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옅은 베이지색 니트티를 좋아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엄마표 계란후라이를 좋아한다. 햇살이 창가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좋아한다. 섹시한 몸에 둔한 뇌를 가진 사람보다 섹시한 뇌에 둔한 몸을 가진 사람이 더 좋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한 페이지 가득 나열할 수 있다.

  또 나는 이런 것들을 싫어한다. 쥐가 싫다. 검정색이 싫다. 입에 넣으면 삼켜지지는 않고 돌아다니기만 하는 현미밥이 싫다. 스토리는 뻔하면서 음향효과로만 위협하는 한결같은 공포영화도 싫다. 센 사람에게는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만 센 사람들이 싫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한 페이지 가득 나열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 사이에서 일부러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변태같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그들의 취향일 따름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싫어하는 것을 기피할 것이다.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괴로운 것도 없다. 가족 때문에, 친한 친구 때문에, 쓸 데 없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조언과 어떨 지도 모르는 나의 미래 때문에 싫은 것을 꾸역꾸역 누르며 살아갈 순 없다.  

  인간의 삶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르고 칭송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지금 내가 즐거운 것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제일 행복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잘나가는 딸을 원했던 우리 엄만 이제 '드라마 작가'라는 나의 꿈을 인정해주신다. 중3 겨울 방학 이후 길고 긴 시간을 TV 앞에서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때론 같이 열받고. 가슴 속에 품고만 있던 꿈을 어렵게 꺼내놓았을 때 뜻밖에도 엄마는 날 격려해줬다. 너라면 잘할 거라면서. 이 담에 잘 되면 조인성 사인 하나 꼭 받아달라고. 엄마는 왜 변했을까? 내 옆에서,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이런 것들을 꾸준히 지켜봤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사람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변한다.  

 

  내일부터는 집에 일찍 들어가야겠다. 야자 끝나고 애들이랑 수다 떠는 것도 재미있지만 집에서 엄마가 기다리시니까.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도 다 먹고 와야겠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먹고,

 

  조만간 나는. 인간으로 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