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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트리

레몬트리 3차본

이응준, <레몬 트리>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야, 이런 남자는 진짜 싫다. 나는 절대 이런 남자는 만나지 않을 거야.”

  “그래. 한겨울에 동물원에서 이별이라니, 그것도 여자는 기다리는데 일부러 안 나간 건 좀 심했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진짜 왜 그런대니?”

  “그거 분명 카메라 주기 싫어서 그랬을 거야. 남자새끼가 찌질하기는. 아 짜증나.”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봐.”

  혜민이의 갑작스런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간엔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해줘도 쉽게 돈독해지곤 하는 게 당연한 일상인데 이런 신선한 태클이라니.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미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혜민아,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남자가 먼저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연애가 시작될 즈음에 남자는 뭔가를 선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잖아. 소설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었고.”

  저녁시간 빈 교실에서 지난 시간에 읽었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으레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던 것이다. 3학년 언니들이 먼저 급식실에 들어가면 1․2학년은 십오 분에서 이십 분 정도 늦게 급식이 시작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일상이었다. 리상쌤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언제나 수업 얘기가 벌어지곤 했다.

  “아니, 혜민아. 우리는 소설 얘기가 아니라 그 남자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기껏 데이트 잘하다가 화장실 간다고 해놓고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여자를 덜덜 떨게 한 그놈 말이야. 넌 그놈이 좋아?” 이럴 때는 수정이도 상당히 격해진다.

  “내가 언제 좋다 그랬니? 좋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사정도 이해해주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야. 그 남자는 이 여자와 헤어지면서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거라구.”

  “새출발이라니? 자기 혼자? 그럼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지원이가 발끈하듯 끼어들었다.

  “남기는 뭐가 남아. 둘은 그저 연애를 한번 한 거라고.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 따위가 아니야.”

  “혜민아.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의 이별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미지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 여자도 이별을 원하고 있었을 거야. 카메라에 필름도 넣지 않았었잖아?”

  “그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지. 하지만 그놈이 여자를 동물원에 내팽개치고 해질 때까지 내버려둔 건 팩트라구. 그것도 한겨울에!” 수정이가 다시 쏘아붙였다.

  “내팽개친 건 아니잖아. 사실을 똑바로…….”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너 그거 고쳐라. 비판도 합리적인 선에서 통하는 거지. 지금 니 주장은 거의 억지거든?”

  “그게 무슨…….”

  “상담사가 되려면 비판능력보단 공감능력이 필요한 거라고. 미지처럼 말야.”

  “…….”

  “야야. 시간 됐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메뉴가 뭐였더라? 스파게티 아니었나? 근데 우리 학교는 맨날 토마토만 줘. 난 크림이 좋은데. 혜민아, 수정아. 빨리 가자. 지원아 빨리 가야지 안 그러면 줄 길다.”

  이럴 땐 수더분하게 넘기는 게 최고라고 미지는 생각했다. 혜민이도, 수정이도 쉽게 양보할 성격들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찌질남이 나왔던 소설은 이응준의 <레몬 트리>. 소설 이름은 예쁘지만 소설 내용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두운 터널

 

  ‘가만보면 얘는 반대하려고 사는 애 같애. 여럿이서 맞장구치는 일에는 항상 반대편에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혜민이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까 수정이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잊는 건 고사하고 자율학습 시간 내내 수정이의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잔등을 괴롭혔다. 그 말을 듣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것은 당혹감 때문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혼자 발가벗겨진 채로 놓여져 있던 어느 날의 꿈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나조차도 잘 모르고 있던, 아니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내내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내 모습이란 그런 것이었나.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렇게 까칠하진 않았다. 그냥 보통 여자애들처럼 적당히 수더분하고 적당히 푼수스럽고, 그랬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애들이 있을 때는 좀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더 겉돌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무던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왜 이렇게 돼 버렸을까?

  “난 이 부분이 참 좋은 거 같애. 반대과정이론!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도 항상 자신의 감정이 중립에 위치하길 원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지. 왜 그럴 때들 있잖아. 국가대표 축구경기 같은 거 볼 때, 우리 나라가 엄청 앞서고 있는데 애국심 넘치는 아나운서가 ‘지금 더 몰아쳐야 합니다’라고 하면 슬 짜증 나는 거, 왠지 상대팀이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구 말이야.”

  소설에서 제일 좋았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리상쌤의 요구에 수정이가 꺼낸 말이었다.

  “그래. 나도 딱 그런 상황 오면 채널 돌리고 싶어지더라. 약자를 배려하는 스포츠 정신 따위는 없고 그냥 메달에 굶주린 사람들 같애.” 지원이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반대 머시기 말야. 짠 과자 먹다 보면 단 과자 먹고 싶고, 또 단 과자 먹다 보면 짠 과자 생각나는 그런 거랑 비슷한 건가?”

  “아! 역시 단비는! 맞아. 그거 진짜 공감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빈 껍질만 수북히 남아 있는 악순환의 고리!” 미지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리액션을 했다.

  어느 새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나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마주보며 둘러앉은 자리가 은연 중에 강제하는 무언의 압박.

  ‘내 차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수정이의 의견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떠올려야…….’

  “야, 반대쟁이. 넌 뭐 할 말 없냐?”

  머뭇머뭇 하는 나를 기다리다 못한 수정이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음…, 그게…… 어, 나도 그럴 때가 많은 거 같은데?”

  “오! 웬 일이니. 투덜이 혜민이가 공감질이네. 해가 서쪽에서...

  “그러게. 반대과정이라고 공감하는 거야? 반대를 많이 해봐서?”

  단비의 딴소리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난 별로 웃음은 안 났다. 정말 그런 건가 싶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서.

 

  언제나 그랬다. 누가 약자 같은 걸 보호하며 사냐고. 누구나 강자가 되는 걸 꿈꾸는 거, 그게 사실 아닌가. 이 정글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보이고 싶어하는 속물에 불과한 거라고.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조금 바뀌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스승의 날 준비 문제로 반에서 단톡방을 열었었다. 기존에 친구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이 했겠지만 반 전체가 한 방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한 명이 말실수를 한 것이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그닥 잘 어울리지는 않던 은서였다. 너무 돈을 많이 걷는 것 아니냐며 한 마디 했다고 들었다. 딱히 실수랄 것도 없는 그 말이 반장을 비롯한 일당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쯤에는 아예 대놓고 은서를 씹고 있었다. 사실 주도하는 무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격력은 강했고, 보통 아이들은 조용히 읽고만 있거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도로만 반응했다. 그런데 나는 왜인지 욕을 해대는 아이들보다 ㅋㅋㅋ만 연발하는 아이들이 더 미웠다. 불쑥 하고 가슴에서 뭔가 치밀어 올랐고,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니네 너무 심한 거 아님?

 

  몇 분의 침묵이 흐른 뒤 공격이 재개됐고, 타겟은 나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학생부에 내려가서야 안 사실이지만 주동자들 몇 명이 따로 방을 하나 더 파서 그곳에서 작당을 했다고 했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입을 다물었다. 외모부터 시작해서 목소리, 옷차림, 평소에 나의 행동들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욕은 참을만 했다. 욕이야 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의 수준이 딱 그 정도 겠거니 하며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더욱 참기 힘든 것은 그들의 대화 메시지 옆에 뜨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 애들이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 없는 애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저 애들. 나랑 같이 웃고, 나랑 같이 밥 먹으면서 나랑 같이 연예인 얘기 하며 놀았던 애들. 너네는 도대체 왜 가만히 있니.

  방을 나가 버릴까 싶었지만 왠지 나가고 나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내 욕을 해댈 것 같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화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지만 혹시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싶은 기대를 놓지 못했고, 누가 또 그들 편에 서는가 싶은 초조함도 놓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반장 일당의 집요한 강요가 있었다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욕을 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늘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세 명이 글을 다 확인한 아침 8시까지 잠을 자지도, 톡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마지막 대화는 반장이 남겼다.

 

이 년 맷집 좋네 어디 두고 보자

 

  이 말을 남기고 반장이 방을 나가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후두둑 방을 빠져나갔다. 늦게 남은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지만 위로는 없었고 실망스런 기대만 남았다.

  정신은 멍했지만 일상은 조립을 앞둔 컨베이어 벨트처럼 빈틈없이 진행됐다. 마치 늦잠을 잔 듯 방을 나와서 욕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엄마가 갈아준 과일 쥬스를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집에서 나왔지만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진 못했다. 나름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담임에게 몸이 아프다고 거짓 전화를 했다.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던 담임은 흔쾌히 결석을 허락해주었다. 엄마가 아실까봐 걱정도 됐었지만 그런 걱정 따위가 눈 앞의 두려움을 이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여기저기를 맴돌았지만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는 못했다. 아침에 수거된 핸드폰이 배분되는 청소시간이 되자 여지없이 방이 만들어졌고, 나는 동의도 없이 초대되었다.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 조롱거리가 되었고, 더 많은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애들마저 하나 둘 반대편에 서는 걸 보면서, 그 때 나는 뭔가가 많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 있는 전철 1호선의 바닥이 흔들리듯. 그렇게 심한 메스꺼움이 전해져 왔다. 전철은 지하 서울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통을 감당할 자격

 

  “길지도 않은 단편에서 세 번 이상의 반복이 있다는 건 실수가 아니라 의도라고 여러 번 이야기 했었죠? 이 소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나 문장은 뭐가 있나요?”

  오늘도 리상쌤의 수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고통이나 불행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요. 그것도 선생님이 좋아하는 처음이랑 끝에!”

  “네. 미지 학생 잘 찾아냈구요. 또 다른 건요?”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마찬가지네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하다뇨? 수정 학생. 그건 왜 그렇죠?”

  “음… 반복도 세 번이나 되고 있고, 뭐랄까 중요한 대목마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수정이가 정리가 좀 덜 되었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정리를 한 번 해 보죠. 이 소설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의 연인을 만난 찌질남이 나오죠. 예전에는 그도, 그녀도 어두웠는데 지금 남자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도 이루고 있는 것 같고. 대신 여자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 살고 있죠. 여전히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는 중이고.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가 다시 현재에 돌아와서 최면술로 여자의 진심을 들어보는 그런 이야기죠.”

  “너무 친절하게 정리해주시는데요? 쌤답지 않게.”

  다른 누군가가 배실배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하. 이럴 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기서 말입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피하는 걸까요?”

  “그거야 뭐, 유부녀인 줄 알고 있는 데다가 끌리는 점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에요?”

  다른 누군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아뇨,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나는 그럴 때가 있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 나를 닮은 것들에 대한 짜증. 짜증이란 개선되지 않는 현재의 반복에서 출발한다.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그 여자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여자를 보면 과거의 어두웠던 내가 보이고. 그래서 그 여자가 싫어서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이 싫어서, 아니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 여자를 멀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요?”

  “오. 대단한 통찰인데요. 멋집니다! 근데, 혜민 학생은 혹시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모습이 있나요?”

  다들 쳐다보는 통에 갑자기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리상쌤의 수업은 늘 이런 식이다. 주목받는다는 것은 설레고 가슴뛰는 일이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쌤. 갑자기 그런 질문은 곤혹스럽잖아요.”

  미지가 긴급히 진화에 나섰다. 아, 고마운 녀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깊게 들어갔군요.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혜민 학생은 아무렇지 않다와 아무것도 아니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여러분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5분간 집중토의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10분간.”

  하루의 일탈은 아무 것도 바꿔놓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뭔가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엄마 몰래 옷장에 숨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해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도망을 칠 때에는 마주하고 싶은 하루가 도저히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아닌가. 하루 만에 돌아온 학교는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메시지에서 시작된 그들의 공격은 내 물건으로 내 신체로 확장되어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었다. 몸이 받는 고통이 사람의 자존감을 얼마나 무너트리는 지 깨닫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교실의 공기, 아무 것도 모르는 선생님들, 그들이 다가오면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피하는 우리반 아이들, 꿈에서조차 나를 괴롭히던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두려워지는 날들, 죽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때도 그 때였다.

  그 때를 돌아보면 단 한 명만이라도 내 편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은서. 그 애라도 내 편을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래준다면. 작정하고 보낸 구구절절한 메시지에 대한 답은 짧게 왔다.

 

다른 애들처럼 하는 거야

다들 그렇게 하잖아

다들

ㅇㅋ?

 

  내가 버틴 건 3주였다. 찢긴 교복 때문에 어머니께서 사실을 알게 됐고 그 후 2주 정도 장기결석을 했다. 그리곤 아빠의 직장이 가깝다는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그 해 여름을 나는 말수 없는 전학생으로 보냈고 2학기가 시작됐을 때 나는 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다만 멀리 존재함으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별들의 세계가 그러하다. 초저녁 서쪽 하늘의 고혹스런 비너스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곧이어 화성의 붉은 사막이 남서쪽 처녀자리 일등성 스피카 곁을 산책하고, 목성은 길잡이별 거문고자리 직녀의 밝기를 무시하며 제 고뇌를 빛낸다. 목성의 자전 주기는 대략 열 시간 가량이어서, 꼬박 지새울 각오만 한다면야 모든 면모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밤 깊도록 해변에 주저앉아, 수평선 어두운 사위로 떠오르는 낯익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았다. 내가 상처 주었던 사람들과 때로는 되레 내 쪽에서 크게 앓고 말았던 여러 얼굴들, 우리 악수한 손에서 전해지던 운명선의 차가운 느낌이라든가, 방금 한 결별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곰곰이 지켜보아야 했던 어떤 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을……

  그러나 그 모두는, 서른번째 여름마저 무료하게 지나가버리고 만 것에 불과했다.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이 문장 말이야.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를 대봐. 근거를!”

  “야, 염미지. 너 리상쌤 놀이야? 재미없다!”

  “헤헤, 미안. 그래도 이야기를 해야지.”

  “그 문장 다음에 바로 그게 이어지잖아.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 끝 부분에서도 그렇고.”

  “진짜 그렇네. 근데 참 멋있는 문장이긴 한데 무슨 말이지?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 주지 않는다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주어지는 게 고통이라는 거야? 이 사람 고통이란 걸 당해보기는 했나?”

  “아니야, 미지야. 보통 고통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엄청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오고 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게 보통이지 않아?”

  “응?”

  “몸이 아플 때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그 때는 정말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잖아. 추억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인간이란 그렇게 성장하는 게 아닐까?”

  “오우우, 반대쟁이. 멋진데? 그래서?”

 

  고등학교에 오고 나서 굳이 그 때를 생각해보진 않았다. 공부에만 몰입하는 환경이 날 그렇게 만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만큼 유치하게 달겨드는 애들도 없고 나도 그 때처럼 물렁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한다? 이 작가는 아무 일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별일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나도 거기까지야. 아무일 없다는 것은 좋은 거 같은데, 모르겠어.”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혜민이 말처럼 힘들었던 순간들 덕에 인간이 성장한다면 말야. 그럼 고통이라는 거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원인이네?”

  “원동력이겠지.”

  “그래, 원동력. 예전의 모습을 딛고 현재의 내가 있는 거라면 그 때의 모습이 찌질했었다고 해서 모른 척 할 일은 아니라고 봐.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도 있지 않겠어?”

  “음...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거다?”

  “그럼 아무렇지 않게 살면 안된다는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빛나는 순간이라니 그거야말로 억지야. 신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내가 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말하면 안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 나는 굳이 그 구절을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야.”

  “고통은

 

  “무슨 얘기가 이리도 재밌습니까?”

 

  제 주변에 저렇게 반대를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을 지켜주고 싶을 겁니다.

별일 없이 산다.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괴롭고 흉한 무늬와 빛깔일지라도, 그건 한 땀 한 땀 힘들게 새겨놓은 시간의 자수, 엄연한 너의 지난날이라는 것을. 더욱이 내겐, 너를 그토록 함부로 대할 만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아무 것도 아닐 순 없다

 

 아니,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절대 오케이 되는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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