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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섭4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스마트폰 어벤져스

배명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이름부터 뭔가 압도적이었다.

 

대한민국보다 4배나 커다란 크기에 겨울이면 눈이 오기도 하고 고이는 물은 대부분 사람이 먹을 수 없어 더 위험한 사막. 그러나 이 사막의 북쪽과 남쪽의 경계로 이어진 오아시스를 따라 아랍, 인도, 티벳, 중국, 러시아의 땅들이 붙어 있어 예부터 비단길로 유명했다. 1271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신임장을 받고 출발해서 17년 동안이나 중국에 머물며, 그 동안의 기록을 동방견문록으로 정리한 마르코 폴로가 둘러간 곳도 바로 이곳 - 타클라마칸 사막이었다.

 

미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검색하자 스마트폰에 떠오른 이야기였다. ‘위키 백과라는 사이트였는데, 화면을 밑으로 내리는 대로 타클라마칸의 지형과 기후, 인물, 민족, 분쟁 등등 온갖 이야기들이 밀려 나왔다.

 

다른 블로그에 링크된 3D 지도 사이트 - 구글 어스에서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는 화면에서 시작해 카메라가 줌인하듯 지정된 타클라마칸의 지역으로 쭈우우욱 확대해 들어가는 지도를 보여주었다.

 

단비야, 이거 봐봐! 오오, 이거 신기한데!”

 

미지는 지구 밖에서부터 시작해 지구의 어느 지역까지 쭈우욱 떨어져 내리는 화면을 보는 게, 이게 생각보다 엄청 신기하고 짜릿했다. 마치 자이로드롭을 타고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는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땅바닥만 쳐다보고 으아악!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재밌어서 인제 다른 것 좀 보자는 단비의 걸걸한 한 마디가 나올 때까지 미지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화면을 다시 봤다. 그렇게 확대해서 본 타클라마칸은 정말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누렇게 말라붙은 바다 같았다.

 

링크를 타고 들어가니 타클라마칸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볼 수도 있었다. 놀랐던 것은 모래언덕이 바람을 따라 진짜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도 과학이나 지리시간에 몇 번 듣기도 했을 테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영상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바람이 심한 날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높은 바위산에서 캠코더로 찍어서 빨리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마치 모래로 된 파도가 서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사람이 나르면 수 천 대의 트럭으로도 수 십 년이 걸릴 지도 모를 그 거대한 작업을 모래바람은 단 하룻밤에 해 내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그 작은 화면만으로도 그 영상은 진짜 대단했다. 미지는 정말 자연의 신비나 어떤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듯해서 놀라웠다.

 

 

스마트폰 논쟁

 

미지는 단비와 함께 리상샘이 내 준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지난 시간에 리상샘은 다음 시간에 할 소설로 배명훈 작가의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를 소개하면서 스마트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소설에 대해 검색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수업시간에 핸드폰이라니, 오오~~ 하는 웅성거림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무언가 금지된 것이 다시 허락될 때의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아이들의 표정 속에 있었다. 하지만 미지는 모든 아이들의 핸드폰이 다 스마트폰인 듯이 너무도 당연스레 말하는 리상샘이 좀 거슬려서 좀 볼 멘 소리로 물었다.

 

그럼 스마트폰 없는 사람들은 뭐 하나요?”

 

미지에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핸드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아직 2G폰을 벗어나지 못한 미지였다. 새로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비싼데다가 액정도 쉽게 깨지는 거 같고, 뭐 좀 할려고 하면 그놈의 까똑. 까똑.’하는 소리가 영 거슬리는 게 공부를 할려면 없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개뿔!!

 

미지는 사실 스마트폰이 정말정말 갖고 싶었다. 미지네 학교와 반의 온갖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그 단톡방도 언제 어디서든 바로 들어가고 싶었고, 오늘 학교 급식의 점심메뉴가 뭔지 클릭만 하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그 간편함도 즐기고 싶었고, 멋지게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당장 프사에 올리고도 싶었다.

 

또 멋진 글과 사진과 영상을 올려서 미지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며 재치가 있는지 친구들에게, 아니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고도 싶었다. 미지가 무슨 그런 대단한 능력이 있다기 보다, 일단은, 그렇게 하는 일이 정말 간단하니까 말이다. 페이스북에 사진 몇 장, 동영상 몇 개로 단번에 수십만의 좋아요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 갈 일도 아니었다. 사진작가가 꿈인 우리 반 영주는 매주 월요일에 우리 학교 5, 전망이 좋은 서쪽 창문에서 학교의 풍경사진을 찍었다. 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공원에 작은 연못과 조그만 언덕과 숲을 끼고 잘 정돈된 산책로에 저녁이면 조명도 은은해서 우리 학교는 꽤 예쁜 학교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영주는 물론, 그 사이에 몇 번 빼먹기도 했지만, 우리 학교의 그 이쁜 풍경을 스물 몇 장의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가 2학년에 올라오는 2월에 자기 페이스북에 올렸다. 우리 학교에서 1년을 보낸 짧은 감상을 덧붙여서 말이다.

 

영주의 사진은 순식간에 퍼져 놀랍게도 불과 열흘만에 좋아요3천이 넘었다. 댓글에는 우리 학교 애들이 써 놓은 응원과 공감의 말도 있었지만, 졸업생 언니들의 추억 돋는 댓글도 있었고 이제 우리 학교에 입학하려는 중3 아이들의 감탄과 기대에 찬 댓글도 있었다. 근처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러움과 질투 섞인 댓글도 있었고 심지어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외국어로 된 댓글도 있었다. 내 손 안에서 간단한 조작 몇 번이면 내가 만든 무언가가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간단하고 대단한 일도 먼저 스마트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에효, 작은 한숨이 미지의 입가로 새어 나왔다.

 

청소년 요금제로 한 달에 이 삼만원 정도면, 왠만한 스마트폰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정도 돈은 미지의 용돈으로도 해결될 만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빠였다. 다른 것에는 그리 엄하지 않은 아빠가 유독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에는 엄격하게 반대했다. 스마트폰은 바보상자이고,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을 중독 상태에 빠뜨리는 아주 위험한 것이라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위험한 걸 아빠는 왜 샀으며, 고작 10만원 어치 사 놓은 걸로 무슨 대단한 투자인양 왜 맨날 주식시세는 들여다 보고, 주말마다 몇 시간 넘게 야구에, 드라마에, 예능에 빠져서 밥 먹다가도 맨날 엄마한테 혼나는 아빠는 뭐냐고 미지가 따져 물어도 아빠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는, 정말이지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말만 했다. 그런 일은 스마트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반복되었는데, 얼마 전에 아빠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지가 씩씩 거리며 거의 소리를 지를 듯이 아빠에게 마구 따져 묻었을 때, 대답은 않고 내내 듣기만 하던 아빠가 말했다.

 

“..., 염미지.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이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하자.”

 

아빠는, 일년에 몇 번 볼 수 없는, 웃음기 하나 없이 아주 딱딱해진 표정이었다. 뭔가 뜨겁고 날카롭고 빨간 경고등이 윙윙 대는 듯한 아빠의 표정에 미지는 일단 멈춰 섰다. 뭔가 더 말을 하면 안될 거 같았다. 그래서 아빠가 성큼성큼 미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 버려도, 아빠를 쫓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거의 화를 내는 일이 없었지만, 한 번 화를 내면 무서웠다. 이 쯤 되면 생각을 좀 해야 했다. 아빠를 쫓아 가야 하나? 한 번 더?

 

미지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화를 내는 아빠를 보는 것도 물론 싫었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아빠랑 그렇게 진짜 싸우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그 서먹서먹한 시간이었다. 뭔가 깝깝하고 답답하고 어색한 그 시간이 미지는 정말정말 불편했다. 거기까지 가야 하나? 스마트폰 때문에? 아빠에 대해 미지의 화가 풀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빠의 말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고민이다. 서로 진짜로 화를 내고 싸워서 그 메마른 시간이 얼마나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더 아빠에게 말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스멀스멀, 그 때 풀리지 않은 화가 뜨끈하게 속에 차올라서 미지는 가슴이 두근댔다. 괜히 리상샘에게 질문을 가장해 그렇게 쏘아 붙인 것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상샘의 대답이 또 기가 찼다.

 

... 미지학생. 스마트폰을 갖는 능력보다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는 게 더 큰 능력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스마트폰이 있는 친구를 짝꿍으로 데려오세요.”

 

아니 폰을 가져오라면서, 폰이 없다는데, 그 시간에 사람을 데려오라니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이냐? 꼭 질문을 하면 대답은 안하고 맨날 능력이 어쩌고 하는 그런 이상한 쫄리는 말같은 걸 던져서, 순간 우리가 당황하는 사이에 그냥 스윽 빠져 나가는 게 이 사람의 말도 안되는 특기란 걸 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당했다. 순간 뭔가 알쏭달쏭해서 미지가 더 할 말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리상샘은 미지와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고는 스윽, 교실을 나가버렸던 것이다. 아놔, 진짜 이 남자인간들을 그냥...

 

벌써 몇 번이나 수업에 빠지고 딴 데로 새 버렸던 단비가 오늘만큼은 이 수업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미지는 아침부터, 자리까지 몰래 바꿔가며 단비 옆을 내내 지키다가 단비를 방과후교실로 끌고 왔다. 단비에게는 스마트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신형에다, 예쁜 폰트에다가, 토끼양 케이스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단비의 핸드폰은 스마트폰이긴 했지만 완전 구형에다가 액정은 다 깨져서 전화나 될까 싶은 걸 들고 다니다가, 얼마 전부터 단비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렇게 예쁜 아이를 들고 나타났다. 으이그, 기집애, 뭔 일인지는 몰라도 단비, 너의 이 이쁜 아가는 오늘의 나를 위해 준비된 운명이었던 거야. 오늘은 이 언니가 네 스마트폰 좀 써 주실께. 미지가 무슨 말을 해도 빙긋이 웃기만 하는 단비를 옆에 두고, 미지는 스마트폰이 쏟아내는 이야기 속에 빠져, 나올 줄을 몰랐다.

 

 

스마트폰은 할 수 없는...

 

“...미지학생? 대답해 보세요.”

 

으잉? 이게 무슨 소리지?

 

내내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가 미지는 자기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오늘 미지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교실의 맨 뒷줄에 앉아서, 책상에 코를 박을 듯이 몸을 숙이고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지는 자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슬쩍 폰의 전원을 끄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옆눈으로 단비를 쳐다 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무슨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비는 미지의 당황해 하는 눈길은 전혀 모른 채 소설 학습지에다 노란색 색연필로 박박 낙서를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기집애. 으이그, 이걸 짝꿍이라고... , 짝꿍!

 

그제서야 미지는 리상샘이 짝꿍끼리 얘기해서 소설에 대한 토론주제를 정하고 같이 이야기 해 보자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 때도 리상샘의 말을 귀로만 듣고는, 요것만 보고, 요것만 보고 하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 이런... 이건 사고였다. 이건 정말 의도하지 않게 일어난 순전한 사고였다. 미지는 정말 이 소설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었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제목이 특이해서 무심코 넘겼다가 재밌어서, 점심시간에 미지는 이 소설을 한 번 다 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어떤 내용이냐고 물으면 대강 말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리상샘과 아이들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미지학생, 빈스토크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죠?”

 

리상샘의 질문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땐 가벼운 연기가 더 필요했다. 10여년 학교 생활에, 졸고 있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연마했던 필살의 연기력을 발휘해서, 미지는 벌써부터 같이 고민하고 있었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을 만들고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며 진지한 목소리로 리상샘에게 질문을 다시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은수는 폭격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격추되어 죽을 위기에 있지요. 그런데 빈스토크 방위군은 은수를 구하러 가지 않아요. 은수가 수행한 임무는 선제공격을 금지한 국제법을 어기는 불법적인 비밀임무였기 때문이지요. 만일 그를 구하기 위해 구조작업을 펼치면 빈스토크가 불법적인 공격을 명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겠지요. 이 부분을 근거로 많은 학생들이 빈스토크를 비난했어요.”

 

, 그래, 은수, 기억난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추락했지. 그래, 국제법, 아까 그걸로 검색도 했었어. 그거라면 대답도 할 수 있지. 그런데, 그래서, 질문이 뭐지?’

 

미지는 리상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검색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 되려 자신감도 생겼다. 그래서 리상샘의 질문에 또박또박하게 답하는 자신을 상상하기까지 하면서, 미지는 리상샘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혜민이는,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밀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고, 어떤 병사가 그것을 이미 다 알고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빈스토크군은 은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빈스토크군이 은수를 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은수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 중에서, 미지학생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 ... 선택하라구요?

 

순간, 미지는 머리 속이 하얘졌다. 분명 읽은 소설이라 대충 무슨 이야기인가 알기는 하겠는데, 입장을 선택하라니,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라니. 그런 걸 생각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며 검색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까 잠시나마 솟았던 자신감 넘치는 미지는 쨍그랑 부서지고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초라한 여고생만 남았다.

 

“..., 저기... 그게...”

 

리상샘은 그런 미지를 보다 빙긋이 웃고는 말했다.

 

미지학생, 스마트폰이 참 대단하긴 해도, 결국 질문하고, 선택하고, 상상하는 그 힘까지 스마트폰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걸 잊지 말고, 잠시, 서 있는 채로, 생각을 정리해 주길 바래요. 먼저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미지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볼께요.”

 

리상샘의 말은 차분했지만, 미지는 전혀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런 쪽팔림이라니...

 

미지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괜히 옆에 앉은 단비를 흘겨 보았다.

 

어느 새 단비는 아까 그 박박 낙서하던 학습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놓고는 뭔가 열심히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아놔, 진짜, 이 기집애가 의리 없이 자기만 살겠다고...

 

하지만 단비한테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단비는 원래 이런 수업에 집중을 잘 못하는 애였다. 단비한테 오늘 그냥 옆에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것도 미지였다. 이건 분명 미지의 책임이었다. 미지는 선 채로, 다시 소설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빈스토크라는 도시가 있다. 가로가 2키로, 세로가 3키로에 최고 높이가 674층인 엄청 거대하고 화려한 이 건물에 50만명이 살고 있다. 이 도시 안에는 군대도 있고, 의회도 있고, 인공위성 제작과 서비스라는 주요 산업도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라 할 만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곳이어서, 이 건물 안의 모든 공간과 시간은 돈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돈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거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빈스토크는 그게 유난히 심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 소설의 남주인 은수였다.

 

사랑하는 연인 민소가 빈스토크에 있는 인공위성 제작회사인 이엔케이에 입사하면서 연락을 끊자, 은수는 군대에 들어가 해군 파일럿을 지원한다. 빈스토크는 시민권이 없으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빈스토크 방위군의 경력이 있으면 빈스토크 영주권을 얻는데 아주 유리했다. 문제는 은수가 빈스토크군의 정규군이 아니라 빈스토크 해군에 고용된 방위업체의 비정규직 파일럿이라는 것이었고, 하필 제대하기 6개월 전에 은수가 폭격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있어 봐, 비정규직이라고 했지? 빈스토크 해군은 왜 이런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비정규직 파일럿에게 맡긴 거지?’

 

 

타클라마칸과 배달사고

 

국가가 비겁해요. 은수는 비정규직 파일럿이었어요. 어찌 됐든 정규직보다 불안한 자리이고 언제든 짤릴 수 있는 자리라고요. 혜민학생의 말대로 그게 정말 중요한 임무고 필요한 임무라면 정규직 파일럿에게 시켜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수정학생의 말도 맞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임무를 맡아서 수행하겠다고 한 것은 은수잖아요. 그럼 둘 다 합의했으면 문제 없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 그건 비겁해요. 합의라는 게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해야 합의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까지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약속을 하게 하는 건 합의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비정규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써먹고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은지지 않는 걸로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수정이였다. 수정이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해서 선생님의 논리를 차근차근 반박하고 있었다. 다들 수정이의 발표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정학생은 빈스토크군의 결정이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애초에 계약이, 그러니까 합의가 성립되지 않는 걸로 봐야 한다는 것이군요. 또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 거기, 손 들은 학생. 3반 연미학생 맞죠? , 이야기해 주세요

 

저기... 저희는 빈스토크의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빈스토크 헌법에는 입주자와 방문자를 모두 보호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사실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만 보호하고 있어요. 그렇게 따지면 은수도 일단은 빈스토크의 방문자라고 할 수 있는데, 빈스토크군은 입주자나 자기들 입주한 기업의 이익만 보호하려고 하지 방문자도 보호하려고는 안한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헌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거죠.”

 

맞아요... 어머!”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순간 다들 좀 놀라서, 리상샘과 친구들의 시선이 한번에 미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미지의 모습을 보자 다들 하하하 하며 웃고 말았다. 다시 얼굴이 또 빨개지다가 미지도 자기가 한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었다. 리상샘이 말했다.

 

아고, 미지 학생, 미안해요. 이렇게 존재감이 확실한 미지학생을 제가 잠시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우리 수업이 더 명랑해 졌네요. 좋아요, 미지학생. 할 말이 있는 거죠? 발표해 주세요.”

 

미지는 이 우스꽝스런 상황에 계속 웃음이 나서 마음을 고르지 못하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리상샘을 보며 말했다.

 

하하, 흠흠. . , . 발표하겠습니다. ... 저는 빈스토크군이 은수를 구하러 가지 않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빈스토크는 애초에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시가 아닌 거 같아요. 오로지 돈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이 소설에 또 나오는 병수와 아내도 그래요. 병수의 아내는 남편과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병수에게 화목한 아내의 모습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는 완벽하게 연기를 하고 다시 나가버리잖아요. 화목한 부부라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얻는 어떤 이익이 있는 거겠죠.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구요. 빈스토크는 행복해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만 신경쓰는 껍데기 도시 같아요.”

 

오오~~하는 소리가 아이들 사이에서 나오더니 다시 까르르 하는 웃음이 아이들 사이에 번졌다. 막 당황한 모습으로 웃겨 주다가 미지가 차분하게 근거를 들어서 정리된 발표를 하자 그 의외의 모습이 그 자체로 아이들을 좀 웃겼던 것이다. 뭔가 좀 쑥스럽기도 하면서 뭔가를 또 해 낸 거 같은 만족감이 들어서 나중에는 미지도 같이 웃었다. 그렇게 다같이 웃고 나서 다시 고요함이 찾아올 때 쯤, 리상샘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하, 미지학생. 고마워요.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제 앉아도 좋아요. ... 하지만 빈스토크에는 파란 우편함이 있잖아요. 이 우편함은 순전히 돈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죠.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자기 층의 주소가 적힌 편지가 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갖다 주잖아요. 이건 이익과 상관 없는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배송 성공률이 94%나 된다고 했죠. 그렇다고 하면 빈스토크를 그냥 껍데기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 연미학생?”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파란 우편함도 개인에게 책임을 맡긴 것이지 빈스토크가 책임을 지지는 않죠. 거기 경고문에도 써 있잖아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요. 은수의 편지가 민소에게 배달되지 못한 것도 병수라는 한 사람이 편지를 가져갔다가 잊어버려서 였잖아요. 물론 병수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느껴서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결국 은수를 찾아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인만 책임을 느낄 뿐, 빈스토크라는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죠.”

 

2반 선경이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이 소설에서 자꾸 닳아 없어진다’, 혹은 풍화되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걸 이야기했는데요, 왠지 사막을 연상시키는 거 같다는 거만 이야기하고, 이 표현들이 왜 이렇게 자꾸 반복되는 건지 저희끼리 이야기할 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지금 발표를 들으니까 좀 이해가 된 거 같아요. 은수가 민소를 보낼 때, 병수가 아내의 빈 방에서 아내의 흔적을 떠올릴 때, 이 말들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이게 사람들의 관계를 말하는 거 같아요. 빈스토크는 사람들이 완전히 개인화 되어서 사람들의 관계가 다 메말라 버린 거죠. 그래서 빈스토크는 사막처럼 되 버린 거에요.”

 

타클라마칸처럼?”

 

순간, 미지의 팔뚝에 소름이 올랐다.

 

, . 타클라... ? 어머, 맞아요, 그래요. 어머머, 타클라마칸 사막처럼요! , 그러니까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이 제목에서 타클라마칸은 빈스토크를 말하는 걸 수도 있죠. 우와! 선생님, 저 방금 소름 돋았어요!”

 

선경이의 외침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어머어머, 어머머머를 연발하면서, 소매를 걷어 팔에 난 소름을 확인하며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나 미지는 그렇게 같이 웃으며 법석을 떨 수도 없이, 팔에서 그치지 않고 등줄기까지 뻗어나가는 소름에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지의 머릿 속으로 뭔가 퍼즐이 다다닥 맞춰져 들어가는 느낌에 온 몸이 찌릿했던 것이다.

 

그건 타클라마칸만이 아니었다. ‘배달사고도 있었다. 은수가 추락한 곳은 타클라마칸이었다. 그런데 은수는 폭탄을 떨어뜨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하다 사고가 난 것이므로 일종의 배달사고라 할 수 있었다. 병수가 은수의 편지를 민소에게 제 때 배달하지 못한 것은 배달사고였다. 그런데 병수는, 또 은수와 민소는, 방금 애들이 이야기한 내용을 근거로 하자면, 인간적인 관계가 메말라 버린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외롭고, 그립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들이 다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그 가득한 마음의 배달사고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타클라마칸에 있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을 압축하고 있었다. 아놔, 정말, 이런 변태같은 소설가들 같으니라구...

 

 

우리를 구하는 것

 

선경학생, 고마워요. 다른 발표한 친구들도 모두 고맙습니다. , 그렇지요. 빈스토크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점점 더 깊어지고 풍부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의 관찰력과 논리가 더 날카로워지고 명확해진 것도 참 좋아요. 이젠 여러분들이 얼굴이나 몸매만이 아니라 뇌까지도 섹쉬해 지는 거 같아서 정말정말 좋아요.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이 모든 좋은 일의 근원은 저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겠지만요. .”

 

아이고... 잘 나가다가 근본도 논리도 없이 또 시작된 저 뜬금 없는 외모 개그에 아이들이 정말 몹쓸 말을 들었다는 듯이 온갖 표정으로 얼굴을 찌뿌리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듯한 표정들을 보였지만 물론, 진심으로 불쾌해 하는 아이도 없었다. 다들 리상샘이 우리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름, 뿌듯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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